문제의 '딱 한 잔'

COMMISSION2021. 1. 8. 03:58

   좋은 일이었다. 대특집! 정신나간 사이퍼즈 제 3탄이 무사히 발행된 것은. 그러니까 즉, 지난 몇달간 클리브를 골머리 앓게 했던 그 잡지가 무려 3탄까지 나왔다는 것. 그는 1, 2탄에 이미 쓸 소재를 다 썼다면서 타자기 앞에서 한참 머리를 뜯었다. 무슨 빛나는 아이디어가 있어 갑작스럽게 글을 우다다 쓰더니 연장하고 또 연장하고 또 연장한 마감일 전날, 원고를 다 썼다며 벌떡 일어나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야 돌아와 집 문을 열며 마감을 외쳤다.

 

   그는 모처럼이라며 술을 잔뜩 사들고 돌아왔다. 그는 새턴을 집에 거둔 뒤로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정말 말그대로 '모처럼'이라며 있는 술 없는 술을 잔뜩 끌어모아 테이블에 앉았다. 그 자리에는 자다가 억지로 끌려나온 새턴, 그리고 그런 새턴을 안아 달래고 있는 잭도 함께였다.

 

   "…클리브. 몇 주를 쥐어 뜯어서 번 월급을 이렇게 술로 탕진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에이, 거 참! 이런 날은 모처럼, 모처럼이지! 자, 새턴. 너도 거기 앉아."

 

   새턴은 잭의 품 안에 안겨 애옹 거렸다. 클리브에게는 안됐지만 한참 잘 시간이었다. 잭은 여전히 잠결에 부비적 거리는 새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지못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잔은 하나 뿐인데, 뭐하러 앉으라는 건지.

 

   "정신나간 마감을 축하하며!"

 

   잭은 김빠진 건배, 로 클리브의 건배사를 받았다. 정신 나간건 너같다, 클리브. 그런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는 클리브가 '사이퍼즈'를 뺀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쩐지 조용하다 싶었더니, 새턴은 이미 다시 잠에 빠져 고롱거리고 있었다. 클리브는 별 안주거리도 없이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키며 마감 중 있던 일들을 잭에게 하소연했다. 취재 허가 편지가 씹혔던 것, 직접 허가를 받으러 찾아갔더니 별안간 사건에 휘말려 된통 얻어 맞은 것, 허가를 받아서 취재하러 갔더니 또 다른 사건에 휘말려 한바탕 고생을 또 치르고, 아예 허가를 받지 않고 취재하러 갔다가 또 다시 몰매맞은 것까지. 게다가 소잿거리가 이게 뭐냐며 까이고, 글이 이상하다며 까이고, 홧김에 거하게 술을 걸치고 원고를 쓰고 보냈다가 다음날 거하게 무릎꿇고 혼난 일까지. 듣는 이마저 눈물을 흘릴만큼 가련한 기자 일화였다. 그래도 소득이 아주 없지만은 않았다. 공식적인 핑곗거리가 생긴 것은 또 나름 좋은 일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댈 필요 없이 일이니까, 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테니까. 그는 새턴이 자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하고 그동안 못했던 말들을 몇가지 더 풀어놓았다. 새턴이 찾아오고 나서 그들은 난데없는 평화를 맞았지만 그럼에도 해야할 일들은 여전히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눈물젖은 이야기들을 안주삼아. 그들은, 아니, 클리브는 모처럼 사온 술을 밤새 들이켰다. 마치 그동안 참은 욕망을 한꺼번에 터뜨리기라도 하듯이, 잭은 잔을 받을 기회도 없이 그가 술을 입에 부어넣는 모습을 덤덤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때로는 심심한 맞장구를 치고, 고개도 끄덕여주고, 건조한 위로도 건네면서. 이야기의 출발점은 분명 취재였지만, 이야기의 끝은 결국 새턴이었다. 한참 자신이 얻어맞고 온 일을 얘기하던 클리브는, 문득 눈에 들어온 새턴으로 화젯거리를 바꿨다. 가끔은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리기도 하는 골칫덩이였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아이. 귀신같이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새턴은 눈을 떴다. 더 졸리진 않은지, 아까처럼 다시 잠드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눈을 뜬채로 클리브를 쳐다보았다. 클리브는 눈을 뜨고 자신을 보는 새턴을 마주보았다. 쓰다듬기 위해 뻗은 팔이 그만 병을 쳐버려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잭이 잡을 새도 없이 병은 테이블 아래 바닥을 굴러다녔고, 클리브는 그대로 손을 뻗어 새턴을 쓰다듬었다. 상대에게 풍기는 술냄새 만큼이나 잔뜩 취한 채였다.

 

   "하하! 깼어, 새턴?"

   "클리브. 많이 취한 것 같군. 이제 그만…"

   "아아니! 새턴. 내가 따악 한 잔! 만 더 할게."

 

   클리브는 그만 마시라는 잭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그 눈은 어디까지나 새턴에게 향해있었다. 금방 잠에서 깬 새턴은 멍한 눈으로 클리브를 쳐다보… 기는 무슨. 자신을 쓰다듬는 클리브의 손을 발로 확 쳐냈다. 그만 마시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클리브는 잠시 새턴을 쳐다보더니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 아니 이 배은망덕한 똥고양이가! 너도 이제 깻잎 없어."

 

   그는 여전히 고양이가 깻잎을 잘 먹는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잘 먹던 밥마저 입대지 않았던 그 저녁 소동을 클리브는 술의 이름으로 잊고 있었다. 잭은 새턴을 한팔에 안고 남은 한 손으로는 뭐라고 왁왁 소리치는 클리브의 뒷덜미를 붙잡고 끌고갔다. 뒷정리는 항상 그의 몫이었다. 작은 한숨이 고양이 울음소리와 기자의 발악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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