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없는 찻잔
COMMISSION2021. 1. 8. 04:001
유향은 며칠 째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었다. 이젠 그러지 않을 법도 한데, 라는 생각은 실제로 일어난 결과 앞에서는 무의미해졌다. 이럴때면 지독한 두통이 느껴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전에 없던 편두통이라도 생겼는지, 오른쪽 관자놀이 부근이 견딜 수 없이 아파왔다. 그것은 누군가 날카로운 것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쑤셔대는 것과도 같은 통증이었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젖은 비명을 지르며 애써 준비한 차 두 잔을 손으로 박살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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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몇 주가 지나고,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유향은 이따금씩 처음에 여기 왔을 때 저지른 실수를 똑같이 저지르곤 했고, 그럴 때마다 다시 두통이 찾아왔다. 그래도 이전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제 찻잔을 하나만 깨뜨리고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나면, 머리를 깨부술 것만 같던 통증은 신기하게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때로 두통 때문에 미쳐버리진 않을까 걱정되어 외출할 적마다 약을 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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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몇 달이 지나 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수를 거의 저지르지 않게 되었다. 가끔씩은 반복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전과 같은 두통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은 잔잔한 두통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서랍 속에 수두룩하게 쌓아둔 진통제를 꺼내 먹었다. 가끔은 그 통증에서 벗어나는 것이 너무도 절실해 그녀는 물도 없이 약을 삼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확실히 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적어도 귀한 찻잔을 깨뜨리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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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일 년이 지났다. 그녀는 아주 드물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그러나 두통은 없었다. 알고서 저지른 실수기에 당연했다. 그러고 나면, 그녀는 찾아오지도 않은 두통이 있는 것처럼 약을 꺼내 먹곤 했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고 나면,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자기 혐오에 빠져 한동안 차를 끓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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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몇 년이 지났다. 그녀는 이제 실수하지 않는다. 당연히 두통도 이젠 찾아오지 않았다. 서랍 속에 쌓아둔 진통제 상자 사이에는 뿌연 먼지가 꼈다. 그렇게 애지중지 아꼈던 찻잔이며 차주전자는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아둔 후로 이젠 어디에 갔는지도 몰랐다. 깔별로 작은 병에 모아둔 찻잎들도 전부 바람에 날려 버린 후였다. 이제는 찾을 수도 없는 향기들. 그녀는 이제 차 끓이는 법도 잊어버렸다. 그래도 이젠 상관 없었다. 찻잔 주인은 이미 한참 전에 없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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