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트와 너트를 세며

COMMISSION2021. 1. 8. 03:57
난 두려워
새벽의 정적, 낯익은 목소리, 쓸쓸한 일상과 허전한 빈자리가

마치 너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그 방은 무척 좁았다. 혼자 눕기도 벅찰 정도로 좁았지만 마치 세상 만물을 억지로 우겨넣은 것처럼, 방 안은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벽면에 낡은 나무 책상이 하나 있다. 왼쪽 끝으로는 책장이, 오른쪽 끝 책상 다리로 서랍 세 개가 붙어있는 평범한 모양의 책상이다. 책상 위에는 책, 둘둘 말린 종이, 연필, 펜, 테이프, 펀치, 클립, 빈 종이, 초콜릿과 자, 커팅기, 작은 보관함과 멈춘 달력 등이 제멋대로 뒤섞인 채 굴러다녔다. 책장에는 온갖 외국어 서적이 가득했다. 어느 나라 언어인지도 모를 책들이 크기, 순서 할 것 없이 아무렇게나 꽂혀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책상 옆으로는 높은 수납장이 있는데, 그 안엔 작은 기계 장치들, 통신기, 고글과 지도, 시계, 이름 모를 약과 브로셔, 빈 액자 같은 것들이 아무렇게나 들어있다. 그 옆으로 거대한 이름 없는 기계, 녹슨 장비, 옷걸이와 아무렇게나 구석에 처박힌 침구, 이미 넘친지 오래 된 쓰레기통과 장신구들. 바닥엔 갖은 공구와 자잘한 부품들이 굴러다녔다. 볼트와 너트. 이 짓에 가끔 회의감이 느껴지면, 바닥에 굴러다니는 볼트와 너트의 갯수를 셌다. 다 세기도 전에 그 일마저도 질려 이제까지 다 세본 적은 없지만.

 

    처음엔 방 안을 다 뒤져야했다.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망가진 기계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남아있는 것이 무언가, 작은 것이라도 있다면, 그곳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나는 그 믿음 아래 버려진 노란 기계를 찾았다. 이미 뚜껑이 날아가고 반쯤 몸체가 망가진데다 들어올리자마자 강한 죽음의 향기가 코를 찔렀기 때문에 그 몸을 그대로 쓸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상자 안에 기계를 넣고, 이 곳으로 돌아와 온 방을 다 헤집고 다녔다. 박스를 다 뒤집어 뒤졌고, 서랍이란 서랍은 모조리 열어 물건을 밖으로 내던지며 뒤졌다. 그래도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너는 밑그림 따위 그리지 않는 아이였으니까.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고 꺼내지 않은 채 세상에 창조해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그 아이에게 설계도는 귀찮고 하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창문을 열고 상자에서 기계를 꺼내 하나하나 찬찬히 분해했다. 그 모습을 눈에 담고, 반 정도 찢어진 아무 종이를 집어 손으로 새겼다. 날아가 없는 부분은 어쩔 수 없이 기억과 상상, 추측과 추론, 이성과 논리, 수학과 과학으로 채웠다. 아쉽긴 했지만 어렵진 않았다. 그 일은 내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으니까.

 

    그 아이가 만든 치밀하고 정교하게 설계된 이 기계장치를 되돌리는 일마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슷한 노란색 철판을 구하고, 깎아내고, 휘고, 이어붙이고, 회로를 구해 복잡한 선을 연결하고 시스템을 구축해주는 일까지 해야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 작업은 언제나와 같이 보람찼고, 볼트며 너트를 하나 둘 세는 것마저 지겨워졌을 때 쯤 나는 기계를 완성했다. 내가 다시 만들어 낸 이 똘똘한 노란 로봇에 나는 그 아이가 붙였던 이름과 똑같은 이름을 붙였다.

 

    "제피."

 

    그래도 대답이 돌아올 리는 만무했다. 그 아이와 용케 똑같이 만들어냈으니 제대로 못 만들어서 대답을 안했을리는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원을 킬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스위치를 올리면, 지금 너를 작동시켜 네게 이름을 부여하면. 너는 더이상 그 아이가 아닌 내 이름을 부르며 내 말을 대신하겠지. 그렇게 되면……. 나는 엄습하는 어떤 두려움에 못 이겨 애써 만든 제피를 옆에 치워뒀다. 겉면이 원형인 제피는 몇 걸음 굴러가다가, 다리에 걸려 금방 멈춰섰다. 그래, 아직은 아니야. 아직 만들 게 많이 남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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