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편지

COMMISSION2021. 1. 8. 03:55

친애하는 대니 에게.

 

    대니, 나는 드디어 잭 더 리퍼와 함께 사라지게 되었어.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 즈음엔 이미 사라져 있겠지. 날 찾으려 하지마, 이것은 완전한 나의 의지고 나의 의사였으니까. 너는 내가 자연스러운 선택을 하길 바란다고 했었지. 나는 이 결정이, 내게 있어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믿어.

    이제서야 나는 네가 내게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야. '이해'와 '납득'은 아주 다른 단어니까. 네가 파렴치한 의사라는 의견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어. 내가 사이코메트리로 본 것들은 왜곡된 것이 아니야.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잔인한 과거이고, 현재이고, 미래일 뿐이지. 내가 그랬듯, 언젠가 네가 나를 오롯이 이해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라. 

    다시 돌아와서, 나는 이제서야 잭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어. 아마 넌 궁금해 하겠지. '사라진다'의 의미를. 글쎄, 뭘까? 죽음이라는 시시한 생각은 하지 않길 바라. 우린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거야. 스스로 죽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많은 잔해를 남기는 귀찮은 선택이잖아? 우린 죽은 채로 살아가겠지, 영원히. 외롭진 않을거야. 잭과 함께니까. 적어도 매일매일을 더러운 소문, 무시무시한 도시 괴담과 참혹한 진실에 둘러싸였던 이제까지의 삶보다는 훨씬 나을거야. 기자란 그런 직업 아니겠어? 매일 지긋지긋한 참상을 마주하고 살지. 아니, 대니. 가장 두려운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난 이제 알 것 같아. 나는 어떤 사실들은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걸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어. 그러니 너도 나를 잊어주길 바라. 이 편지도, 네가 갖고 있는 나에 대한 그 어떤 것들도 전부 태워버려. 몰래 숨겨두거나, 간직하거나, 남에게 보여줄 생각은 추호도 하지마. 몇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네가 아는 다른 친구에게 그런 녀석도 있었지, 라며 운을 띄울 생각도 하지마.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던 사람들이니까. 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소름끼칠만큼 닮은 꼴이거든. 편지를 한 까닭은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어. 너는 나를 기억하는,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일테니까. 내 가장 친한 친구였던 네게 이런 말을 직접 하게 되어 유감이다. 용서해줘. 그렇지 않으면 (지워져 알아볼 수 없다.)

    대니, 내 걱정은 부디 하지 않길 바라.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을 쓰느라 네가 괴로워할 필요도 없어. 편지지를 꺼내지도 마. 네 성격이라면 지금쯤 나를 무척 걱정하고 있겠지만 사실 나는 지금 무척 기분이 좋아. 태어난 이래로 이렇게 기분 좋았던 적이 없어. 대니, 난 괜찮아. 정말이야. 이것은 나의 선택이고 여기엔 그 누구의 압력도 없었으니까. 알겠지? 그러니 제발 날 잊어줘. 날 찾으려 하지 않겠다고, 날 뒤쫓지 않겠다고 약속해. 너도 알잖아? 기자는 질문하고 듣는 사람이지, 말하는 사람이 아니야. 네가 날 찾아와 몇 만 가지 질문을 해도 제대로 대답할 재간이 없다고.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네 이름을 부를게. 대니, 잘 있어. 안녕.

 

이제 이 편지를 불태워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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