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ract

COMMISSION2021. 1. 8. 03:51

    그 저택은 숲 속에 있었다. 잿빛 도시를 떠나서 한참을 마차로 달려야지 도착할 수 있는 울창한 숲의 입구에서 또 다시 한참을 달려야지 하늘을 뚫을 듯 솟은 대저택을 볼 수 있었다. 최바리가 처음으로 저택을 봤던 날로부터 벌써 10년이 흘렀다. 처음으로 마주한 그 고풍스러운 저택은,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성처럼 봄의 햇살을 받아 반짝 반짝 빛났다. 한 층 한 층 천장이 높은 2층 건물. 건물은 대체로 때 하나 안 탄 새하얀색이었지만, 햇빛을 받으면 연한 분홍, 아니. 연한 보라색, 아니. 총천연색으로 빛났다. 1층엔 커다란 현관문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두꺼운 기둥이 일렬로 박혀 2층을 지탱했고, 건물 모서리에서 현관문까지 약간의 거리가 있어 통로처럼 보였다. 그 1층의 통로에는 누가 가꾸는 것인지, 봄이 만연했음을 몸소 알려주듯 파릇하고 화사한 화분들이 모인 작은 화단도, 훌륭하게 그 위엄을 잔뜩 발산하고 있는 대형견도, 빨래를 걸어 둔 건조대도 있어 꽉 찬 듯 보였다. 저택의 앞으로는 널찍한 정원이 있었다. 저택으로 들어가는 대리석 길 옆으로 왼쪽에는 푸릇한 잔디가, 오른쪽에는 본 적도 없는 꽃들이 색깔을 맞춰 마치 줄세운듯 정렬되어 피어있었다. 잔디의 한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속엔 금빛 잉어들이 꼬리를 흔들며 헤엄쳤다. 그 어느곳을 봐도 시선을 빼앗기고 말을 잃게 되었지만, 정작 최바리의 정신은 오직 한군데 꽂혀있었다. 2층 구석 방에 붙은, 돔 형태의 베란다에 몸을 기대 자신을 보며 손을 흔드는 어린 아이에게.

 

    대저택의 메이드라니, 말이 간단하지 사실 해보면 무척 고되고 힘든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일과에 꼭 맞춰 일어나야하고, 일어나고 주인의 아침 일정을 챙김과 동시에 집안일들도 부지런히 시작해야했다. 한동안 최바리는 그 일정에 자신을 갈아넣느라 눈물을 흘려야했지만, 모든 일이 으레 그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일은 익숙해졌고, 최바리는 제법 괜찮은 메이드로 성장했다. 그래도 최바리에게 딱 한가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 있었다.

 

    "바리야, 바리! 귀여운 우리 바리, 여기 있었구나!"

 

    그게 이 아가씨다. 한내솔.

 

    최바리의 할 일은 주인 어른의 사랑스러운 딸을 돌보는 것이었다. 한내솔이 최바리보다 3살 정도 어리긴 했지만 어쨌든 이러나 저러나 해도 비슷한 나이대였다. 열 몇 살이었던 최바리에게 발랄하고 활발한 아가씨를 통제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뒤를 잘 쫓아다니는 것만도 벅찼다. 집안일은 점점 익숙해져 가는데, 이 놈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밝은 깨발랄 아가씨만큼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냥 발랄하기만 했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 온 최바리를 졸졸 쫓아다니며 귀찮게 굴었다. 항상 똑같은 머리에 똑같은 메이드복을 입고 똑같은 일을 해도 오늘은 어떻다, 어제는 어땠다 하며 하루종일 쫑알거리는 것은 기본으로, 온 집안 사람들에게 최바리는 너무 귀엽다며 소란을 피우질 않나, 일하는 중에 몰래 놀러가자면서 똥고집을 부리질 않나. 최바리에게는 일로 인한 피곤함보다도, 이젠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귀여운 바리'라는 말로 인한 스트레스가 컸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무슨 말로 변명하려고 해도, …그래도 도저히 미워할 수는 없는 말괄량이 아가씨였다.

 

    그런 식으로 시간은 흐르고 흘러 최바리는 이제 스물 세 살이 되었다. 일부러 센 것은 아니었으나, 한내솔의 생일에 여기 왔으니 내일이면 꼭 10년이 되는 날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벌써 10년이나 한건가? 최바리는 내심 10년 씩이나 버텨온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아니, 굳이 10년이란 시간이 아니더라도 최바리는 자신의 일에 긍지를 느끼고 저택을 좋아했다. 그래, 내일이면 10년. 이 저택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어쩐지 감회가 새로워 최바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력을 홀린듯이 쳐다보았다. 그러나, 눈물젖은 감상도 잠시. 내일이 한내솔의 생일이었으니 긴장해야했다. 최근 한내솔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다. 2주 전에는 평소보다 더 뛰어다니고 난리를 쳤는데, 1주 전부터는 뭔가 이상했다. 최바리를 은근하게 피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덕분에 일은 훨씬 수월했지만 10년이라는 세월에 맞게 어쩐지 허전하고, …그리고 쓸쓸했다. 최바리는 달력에 스티커까지 붙여 둔 내일의 날짜를 눈 부릅뜨고 쳐다보았다. 생일 때문인가. 생일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건가? 고민해도 알 순 없지만 어쩐지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최바리에게는… 10번째 맞는 한내솔의 생일에 무엇을 해줘야 주인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묘안이 없었다. 뭘 해줘야하지? 뭘 해야하나? 일주일 씩이나 저리 구는 것을 보아 심상치 않은 기대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최바리에게는 애석하게도 그에 상응하는 묘책이 없었다. 뭘 해줘야 하는거야, 당장 내일인데! 케이크며 하는 것들은 어차피 다른 메이드들이 매년 준비하는 일이었고, 한내솔도 당연히 뻔히 알고 있을 것이다. 선물을 사줘야하나? 선물이라면 무엇을?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질 수 있는 대저택의 아가씨에게, 자신의 선물이 씨알만큼이라도 먹힐지 의문이었다. 와, 큰일났네. 당장 내일인데. 아니, 근데.

 

    왜 내가 이런 걸 걱정해야 하는거야?

 

    걱정해도 별 수 없이 시간은 흘러 벌써 밤이 되었다. 아니, 밤이라고? 최바리는 하루종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문득 시계를 쳐다봤다. 밤 열한 시. 이런, 맙소사. 한 시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이 안 갔다.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난다기보단… 내가 무슨 일을 해야할지 몰랐던거겠지. 최바리는 간식 먹고 남은 설거지를 하던 손을 멈췄다. 넓고 평평한 접시에 과일 포크, 과도와 찻잔. 찻잔에 남은 잔여물을 보아 유자차에 과일이라도 깎아 준 모양이었다. 깎아 준 모양이었다? 아… …내가 했지. 오늘 간식은 토끼 모양으로 깎은 사과와 따끈하게 끓인 유자차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최바리는 폭 익은 한숨을 뱉었다. 뭐가 이렇게 불안한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내일 뭘 해야할지 몰라서 불안한 것은 아니었다. 요즘 낌새가 이상했던 것에 더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은근한 불안과 초조함이 슬쩍슬쩍 고개를 들었을 뿐. 지금이라도 나가서 뭔가 준비해 와야하나? 그는 멍하니 생각하느라 제 뒤로 누군가 바짝 다가온 것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불이 꺼져 어둑한 뒤통수에서 갑작스러운 말소리가 들렸을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놀라 그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최바리."

    "으, 으아아악!"

    "아, 하하! 놀랐어?"

 

    바리는 역시 귀엽네. 한내솔 이었다. 최바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뒤돌아 낯익은 얼굴을 원망 섞인 눈으로 쳐다봤다. 제 고민의 원흉인 한내솔. 한내솔은 아는지 모르는지, 예전처럼 방긋 방긋 웃으며 최바리를 놀리고 있었다. 화가 풀린건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건가? 최바리는 알 수 없었다.

 

    "바리야, 바리야. 설거지 끝나면. 그래, 딱 12시가 되면 내 방으로 와. 알았지?"

 

    얄궂은 아가씨는 그리 말하고선 바로 주방을 떠났다. 최바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불이 반 꺼져 어둑한 주방에 홀로 남은 최바리는 제 주인이 떠나는 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최바리는 무거운 발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하다 만 설거지는 다 끝냈다. 시간은 11시 55분, 오라고 했던 시간까지 딱 5분. 왜 그 시간에 맞춰 오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그는 괜스레 긴장되는 마음에 계단 난간을 붙잡고 올라갔다. 이걸 어떻게 해야하지. 무슨 심각한 말이라도 하면… 아니. 생일인데 뭐가 없냐고 하려나? 뭐가 없는데……. 그는 방문 앞에 선 채로 노크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이 앞에 벌어질 일이 막연히 두려웠다. 뭔가 잘못되었나? 내가 뭔가 실수했나? 놓친거라도? 이제까지 그렇게 심술 부리거나 샐쭉한 적은 없었는데. 누가 혼냈나? 혼나도 절대 기죽는 일이 없어서 제발 좀 혼났으면 했던 날까지 있었으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이 넘실거리는 마음은……. 최바리는 넋놓고 멍하니 문을 노려보며 생각하다, 바로 눈 앞에서 빠르게 열린 문에 다시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바리야! 왔구나.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어."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게 잡은 것치곤 한내솔은 계속 말을 끌었다. 무슨 말이라도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으니 빨리 해줬으면 하고 바랐지만 말할 생각이 없는지 아무 말 없이 계속 흥, 흐흥 하고 콧노래만 불렀을 뿐. 최바리는 문 앞에 쭈뼛 쭈뼛 서있다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매도 빨리 맞고 싶은데, 꺼낼 생각조차 없이 한내솔은 자꾸만 최바리를 애태웠다. 뭐야! 뭐냐고. 입밖으로 꺼낼 수도 없이 입술만 우물거리고 있을 때, 한내솔은 침대 옆 협탁을 뒤지더니 갑자기 하얀 상자를 꺼냈다.

 

    "짜잔!"

 

    …짜잔? 그게 대체 뭐냐는 식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한내솔은 해설이라도 하듯, 고풍스럽게 남색으로 장식이 된 하얀색 철제 상자를 열며 최바리에게 내밀었다. 뭐지? 이건? 최바리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상자 안을 쳐다봤다. 상자 안에는, 잘 구워진 쿠키가 하나씩 비닐 포장 된 채로 일렬로 담겨 있었다.

 

    "이 쿠키 엄청 맛있어. 먹을래?"

 

    …할 말이, 그거예요? 응. 최바리는 아찔함을 느꼈다. 한내솔은 크게 소리내어 웃으며 포장된 쿠키를 몇 개 집어 비닐을 뜯었다. 우리 귀여운 바리, 아~ 하면서. 최바리는 또 무슨 소리를 들을라 순순히 입을 벌렸지만, 그럼에도 왠지 허무했다. 뭐야, 이게. 왜 난 문 앞에 서서 고민한건데? 그는 밀려오는 허탈함에 입 안에 들어온 쿠키를 몇 번 씹을 생각도 없이 과자를 대충 목구멍으로 넘겼다. 녹차 맛인가? 부들부들한 사브레 쿠키는 몇 번 씹지 않아도 쉽게 부서져 목에 걸리거나 하진 않았다. 한내솔은 하얀 상자를 통째로 벙 찐 최바리의 무릎에 얹어주고, 의자 맞은편에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사글사글 웃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 귀여워. 우리 바리. 하는 말만 반복하면서. 최바리는 영 찝찝한 눈으로 제 앞치마 위에 놓여있는 쿠키 박스를 괜히 몇 번 뒤적였다. 이것은 초콜릿 칩 쿠키, 버터 쿠키, 화이트 초콜릿… 하며. 한내솔은 눈을 몇 번 꿈뻑이며 최바리가 하는 모양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당연히 쿠키 얘기는 단지 핑계에 불과했다. 할 말은 달리 있었지만, 2주 간 용기가 안 났기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쿠키, 맛있었을까? 최바리는 감상 같은 것을 잘 말하지 않으므로 알 수 없었다. 최바리가 하는 감상평이란, 외출복을 고민하는 자신에게 이게 어때서 나은 것 같다는 짧은 한마디 뿐이었다. 아님, 가끔 하는 음악이 어떻단 말이거나. 조금 더… 자기 얘기를 해주면 좋을텐데. 그것은 한내솔의 욕심이었다. 아니, 지금 이러고 있는 것 자체가 욕심이었다. 그저 마음 좋은 최바리가 그것을 받아주고 있을 뿐. 한내솔은 괜히 눈을 몇 번 굴렸다. 듣고 싶지 않은, 보고 싶지 않은,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을 마주하는 데에는 용기가 조금 필요했으니까.

 

    "바리야."

 

    그 목소리는 조금 무겁게 떨어졌다. 항상 부르던대로 이름을 부른 것 뿐인데도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지 한내솔은 알 수 없었다. 나는 네게 물어볼거야. 그것은 아주 중요해. 아주… 생각만으로도 눈매 한쪽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한내솔은 샐쭉 웃어보였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울 수는 없었으니까. 최바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주인의 목소리에 반응해 상자를 뒤지던 손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오늘, 내 생일이야."

    "…압니다."

 

    역시 그런거였군. 이제 뭐라고 하려나. 난 네게 쿠키를 줬는데 당연히 더한 걸 주겠지, 라고 하려나? 최바리는 몸에 바짝 긴장을 줬다. 뭘 요구할지 모른다. 그러니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했다. 마치 생일을 잊어도 잊지 않은 것처럼, 선물이 없어도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아도 준비 된 것처럼. 그는 생일에 관한 어떤 말이 떨어질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바로 다음에 이어진 주인의 말은 마치 최바리의 이마를 때리듯 떨어졌다.

 

    "동시에 네 계약 만료일이야."

 

    최바리는 멍하니 주인을 쳐다봤다. 그랬던가?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랬다. 딱 10년 치 계약이었다. 10년 후면 최바리는 이곳을 나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그렇게 본가와 합의를 봤었다. 그래, 딱 10년 이었다. 내일이면. 아니, 이제 12시가 지났으니 오늘인가. 그랬다. 오늘은 자신이 이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다. 아… 최바리의 입에서는 낯선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뭐라고 해야할지 몰랐다. 그런가? 확실히 그러긴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그만 둘 생각도 없었다. 계약이야 연장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내쫓으려고 그러는건가……. 어느쪽이든 스스로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아니, 상관 있나. 이 알 수 없는 미련과 아쉬움은 뭐지? 최바리는 혼란에 빠진 채 일없이 상자 속 쿠키들을 만지작 거렸다. 만약, 내일 여기서 나간다면.

 

    "바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바리를 존중할게."

 

    앞으로 뭘 하면 좋지?

 

    "바리는 아마 음악을 하고 싶어 했지? 내가 잘 말씀 드릴거니까, 앞으로 일도 잘 풀릴거야."

 

    앞으로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거지?

 

    "본가에도 말씀 드려, 바리야. 이미 알고는 계시겠지만, 당장은 본가에서 지내야 할테니까."

 

    그럼, 내일부터 당신은 누가 챙기는거야?

 

    "…내 걱정은 하지말고."

 

    최바리는 멍하니 한내솔을 쳐다봤다. 왜 이렇게 막연한 두려움이 몰려오는거지? 이 답답함과 먹먹함은? 목이 타는 게 느껴졌다. 최바리는 책상에 떨리는 손으로 하얀 쿠키 상자를 내려놓았다. 내일 여기서 나간다면, 이제 당신은 다른 사람이 돌보게 되겠지.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 뿐이었다. 나는 마차를 타고, 다시 이 울창한 숲길을 나가 다시는 여기에 돌아올 일이 없게 되겠지. 당신을 다른 누군가가 깨우고, 아침 차를 챙기고, 식사를 챙기고, 외출복을 골라주고, 방을 청소해주고, 돌아온 당신을 맞이하고 간식을 챙겨준 뒤 잠든 당신을 보고 불을 끄고 나간다면. 싫다. 싫어. 그건 내가 할 일이야. 10년 동안 내가 해 온, 내 할 일. 그는 한내솔의 눈을 바라본다. 아가씨는 그걸로 좋아요? 그 눈은 딱 10년 전의 오늘부터 똑같은 사람만을 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일방향적인 동경의 시선이었지만. 심장에 물이 차듯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폐부터 천천히 숨이 역류해 기도를 막는 듯 호흡이 답답했다. 왜 당신은 붙잡아주지 않는거야. 그냥, 다른 사람으로 갈아치우면. 그것으로 되는거야? 최바리는 앞치마를 꾹 쥐었다. 고집 부리면 안 돼. 어른스럽게 굴어야 해. 받아들여야 해. 폐가 되면 안 돼. 그런 말은 머릿속에서나 굴러다녔고,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어린 아이 같은 투정이었다.

 

    "…그냥, 계속 여기 있으면 안되는건가요?"

    "뭐?"

 

    한내솔은 최바리의 입에서 돌연 튀어나온 한 마디에 놀란 채 그를 쳐다보았다. 계속해서 제 곁에 남아줄 것이라곤 생각 못했으니까. 최바리에게 자신은 귀찮을 뿐이라고, 단지 자신만이 이 관계의 지속을 원한다고.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앞길에 방해가 되는 자신은 이제 물러나야 하는 게 아닐지, 그런 생각만이 2주간 한내솔을 괴롭혔다. 그래서 그는 최바리에게서 스스로 정을 떼기 위해 요 몇 주간 최바리를 멀리하고 다녔다. 멀리하고 다니면 멀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뜻대로 되진 않고 단지 좀 더 그 마음이 격해질 뿐이라는 것을. 싫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바리를 보내려고 했는데. 한내솔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최바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바리야. 돼. 여기 있어도 돼. 여기 계속 있어도 돼. 아니, 있었으면 좋겠어."

 

    한내솔은 대답이 바로 들려오지 않자 횡설수설하며 말을 덧붙였다. 나, 잘할게. 편식도 안하고, 아침에도 잘 일어날게. 다른 메이드 말도 잘 듣고 부모님 말도 잘 들을테니까. 할 일 먼저 하고 놀고, 일하는 바리 방해 안할게. 네 말도 잘 들을테니까, 우리 바리. 

 

    괜찮다면 계속 내 곁에 있어주면 안 될까?

 

    바보같은 고민이었다. 내일 당장 집을 나간다니,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최바리는 주인의 반응을 보고서야 확신했다. 2주 간 이상하게 굴었던 것은 오늘 자신이 나가는 날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제 딴에는 정이라도 떼려고 그랬나 모르겠지만… 그래도, 미리 말해주었다면 좋았을텐데. 알아채지 못한 자신이 오히려 바보같이 보였다. 최바리는 제 어깨를 붙잡은 주인을 쳐다본다. 오늘은 내가 이곳에서 맞이하는 당신의 열번째 생일. 내가 이곳에 온지 정확히 10년 되는 날. 당신과 만나고, 그리고… 맺음은 없어. 마주한 그 눈은 생각지도 못했던 기대로 반짝이고, 밀려오는 불안에 떨리고 있었다. 아, 그래. 제가 10년 전에 봤던, 제 시선을 홀랑 뺏어버린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렸다. …사랑스러운 사람. 나의 주인. 최바리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계약 성립이었다.

'COMMISS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른번 째 편지  (0) 2021.01.08
밤 바람 만이 아는  (0) 2021.01.08
심야의 붉은 하트  (0) 2021.01.08
차가운 화염과 청색 나방  (0) 2021.01.08
낙엽길  (0) 2021.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