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번 째 편지
COMMISSION2021. 1. 8. 03:54██에게,
안녕, ██. 잘 지내?
이런 것을 물어봐도 소용 없겠지. 여긴 좋아. 잭도 상태가 많이 좋아졌어. 솔직히 말해서, 이걸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가 떠날 때보단 좋은 것 같아. 잭을 돌봐주는 의사 말로는, 이제 죽을까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다고 해. 그렇다고 해서 그가 눈을 뜬 것은 아니지만, 너도 알다시피 잭은 우리 중 누구보다도 강한 아니. 그냥… 아니야.
변화가 있다면 나는 당분간 일을 쉬기로 했어. 잭을 돌보기도 해야하고, 당분간은 널 찾는 일에 집중하고 싶거든. …사실, 난 널 찾고 있진 않아. 네가 떠난 것에는 나로서는 다 알지 못하는 너만의 이유가 있고 네 나름대로 숙고한 선택이겠지. 너의 선택을 내가 부정하고 널 억지로 찾아올 순 없는거야. 하지만, ██. 난 매일 네 방을 청소하고 있어. 네 물건 중 버린 것도 없고, 네가 머물던 그 공간은 모두 그대로야. 그래, 너의 기나긴 첫번째 실종 때와 마찬가지로. 널 억지로 끌고오진 않을거야. 하지만 네가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게 난 항상 이곳을 지키고 있어. 그게 내가 당분간 일을 그만둔 이유야.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해주길 바라.
일을 그만두긴 했지만서도 막상 아무 글도 쓰지 않으니 불안하더라. 뭐라도 쓰고, 기록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 매일 습관적으로 수첩을 꺼내고, 걸어다니면서 펜을 돌리고, 남의 말들을 엿듣고, 타인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다녀. 이게 네가 예전에 말했던 지독한 직업병이라든가, 나쁜 습관이겠지? 수첩 보며 걷지 말라고 말하면서 항상 내 손과 잭의 손을 잡았잖아. ██, 이젠 손을 잡아줄 너도 잭도 없어 매일 수첩을 보고 걸어. 그러다 누군가와 부딪히고 신호등을 깜빡하고 물건을 흘리고 다니지. 그러다 이젠 수첩을 볼 필요도 없다는 걸 곧 깨닫곤 코트에 다시 수첩을 넣는 일을 반복하고 있어. 이상하지, 그 후엔 항상… 견디기 힘든 상실감이 몰려오더라.
어쨌든, 그게 내가 편지를 삼십 번째 쓰고 있는 이유야. 이전엔 한 번도 왜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지 설명하지 않았잖아. 뭐, 나와 잭의 안부도 전하고, 내 개인적인 일기장으로 삼기도 하고, 겸사겸사. 물론… 나도 알아. 편지는 쓰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는거지. 하지만 ██, 왜인지 모르겠지만 받는 사람에 네 이름을 쓰진 못하겠어. 왜일까? 하긴, 그렇겠지. 난 이 편지가 갈 곳을 모르잖아.
혹시나 우리에 관해 궁금한 게 있을까? 있다면 답장해 줘. 내가 아는 것이라면 뭐든 대답할게. 내가 이 편지를 몇 장이나 쓸지 아직 잘 모르겠어. 이건 매우 개인적인 기록이 되겠지. 받는 이 조차 읽어보지 못하는 그런 기록 말이야. 아니, 언젠가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그땐 아마 이 편지들은 내 마지막 글이 될거야.
그럼, 오늘은 이 정도로 쓸게. 언제든 돌아오고 싶어질 때 돌아와. 그리고 잭에 관해서는 걱정하지마. 너도 알겠지만 잭은 널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을거고 아마도 곧 일어날테니까. ██,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만약 이 편지를 네가 보는 일이 있다면,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비어있는 내 이름을 써주길 바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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