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

BELOVED/ETC.2021. 1. 26. 23:08

첫번째

   엔은 멍청하게 그 자리에 멈췄다. 뜻밖에도, 발이 꽉 묶인채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을 보면 항상 생각보다도 먼저 뛰쳐나갔던 발이. 엔은 멍하니 바닥에 쓰러진 나오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큰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듯, 엔은 스스로를 현실과 분리시켰다. 마치 한낱 꿈처럼. 그러나, 한평생 그를 방해했던 모리안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런 중에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지. 이름을 불린 그는 현실로 돌아와야했다. 그러나 그는 모리안을 돌아보지 않았고, 하기 싫은 일을, 잊었다는 것처럼 하듯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언제나 그렇듯 나오의 쪽이었다. 그는 단 한번도 모리안을 향한적이 없었다.

 

두번째

   그 앞에 도착한 엔은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달리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도 몰랐다. 눈을 감은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채로,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그 후로도 계속 그랬듯이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단정하고 가지런하게. 엔은 모르는 새에 그 손을 쥐었음을, 한참 후에나 알아챈다. 무심한 그의 손이 따뜻한 것처럼, 다정한 그녀의 손은 어울리지 않게 늘 차가웠다.

 

세번째

   그가 나오를 만난 것은 다른 밀레시안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에린에 왔고, 마치 한가지 절차와도 같이 나오를 만났을 뿐. 그 역시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나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러지 않겠다 처음부터 다짐했었다. 다만, 그는, 나오의 부탁아닌 부탁을 져버릴 수 없어 모리안에게 말려들었고, 그 결과 영웅의 곁을 지키게 되었을 뿐. 그는 그 일로 매우 강해졌다. 무너질 수 없었다. 자신이 무너진다면, 그 곳엔 홀로 남는 영웅만이 있을 뿐. 그는 우온에게서 왠지 모를 부채감을 느꼈다. 자신이 그 무게를 함께 짊어져줄 수 없는 것에 대한. 때문에 그는 스스로 강인해지기를 선택했다. 어떤 것에도 무너지지 않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영웅이 무너지기 전까지, 그는 슬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강한 죄책감이 그를 실제로 강하게 했고, 그는 결단코 무너지는 일 없이 오랜 세월을 지내왔다. 마치 감정이 다 말라버린 것처럼. 그러나 그는 영웅의 앞에서 어린 아이같은 투정을 부렸고, 정령에게 핀잔을 주며 화를 냈고, 나오의 앞에서 웃었다.

 

네번째

   모리안이 그를 계속해서 불렀고, 주변이 매우 소란스럽고 어수선했지만 엔은 듣지 않았다. 시간이 모두 멈추고, 마치 두 사람만 있는 것처럼. 그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끝내 나오지 않았으니, 그다지 상대가 대답할리도 만무했다. 이 곳에 도착하고, 단 한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그의 표정이, 지금 마구 무너져 내렸다. 슬픔, 절망, 비애, 좌절, 고통. 이름을 가진 갖가지 감정. 그의 손이 참을 수 없는 감정들에 바들바들 떨렸다. 이제, 내 에린은 무너졌어. 그 곳엔 견딜 수 없는 분노만이 남아있을 뿐. 그는 결국 그 차가운 손을 놓치고 말았다.

 

다섯번째

   그 뒤의 기억은, 깨끗이 절단된 것처럼 사라졌다. 누구를 향했는지도 모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날뛰었으리라, 하고, "그랬으리라" 하고 짐작해봤을 뿐. 엔은 침대에 누운채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전등엔 불이 꺼져있었지만, 이미 날이 다 밝아 방 안을 충분히 다 볼 수 있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고, 잠시 감각이라도 잃었는지, 일어나려는 순간 모든 고통이 전신을 찔러왔다. 팔엔 온통 난도질 당한 흔적이 가득했고, 가슴부터 허리까지는 붕대를 묶어 볼 수 없었으나 아마 무기에 구타당했으리라 하고 짐작했다. 다리에 남은 화상의 흔적까지. 엔은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일어나고자 하면 일어날 수야 있겠지만, 이젠 일어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젠 매일 아침 장사를 나가지 않아도 되었고, 특별히 모험을 다니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유물을 찾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매일 아침을 부지런히 일어나 수련할 필요도 없었고, 구태여 위험이 득실한 던전에 갈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이제, 모든 생활이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는 유일하게 성한 목을 돌려 주변을 느리게 살폈다. 침대 옆 협탁에 그의 가방이 놓여있었다. 그는, 그의 가방 주머니 속에서, 처음 나오에게 받았던 영혼석을 찾아냈다. 이리 떨어뜨리고 저리 떨어뜨려 가장자리가 다 닳아버린, 그러나 그 빛을 여전히 잃지 않은. 그러나, 당신은 이제 오지 않겠지. 헬 수 없는 무기력이 그를 집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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