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

BELOVED/ETC.2021. 6. 23. 03:48

   눈을 뜬 곳은 동굴이었다. 뭐라고 정의하기 힘든, 하얀 선들이 주변을 떠다녔다. 그것이 어떤 생명의 형태라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나중이었다. 나의 정체를 깨닫기도 전에 나는 유기를 겪었고, 또 상실을 겪었으며 우리 두 사람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았다. 그 인격의 소중함은 별개로 하더라도 말이지 이 세상에 사쿠라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나 뿐인 듯 했다. 아니, 나는 결국 사쿠라가 만든 또 다른 '사쿠라'니까 자신만큼은 그 소중함을 알고 있던거겠지. 나는 나야… 하지만 나 자신이 사쿠라임을 인정하는 것과 달리 사쿠라는 나를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했다. 그런 날 것의 인격은 내가 아니라는 것처럼, 그랬기에 특별히 성씨가 없었던 사쿠라에게 사이온지라는 성을 붙인 것은 나였다. 나의 이름은 사이온지, 사이온지 사쿠라.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그 아이는 사이온지라 불리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듯 했다. 소심하고 용기도 없어서 싫다는 말을 못 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어쨌든 좋든 싫든, 나의 세상은 사쿠라가 전부였다. 사쿠라는 날 싫어했고, 지독히도 숨기려 들었다. 딱히 반발심이 생기는 것도 아니여서 그 아이가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내버려뒀다. 그 아이는 괴롭거나 견디기 힘든 공포를 겪으면 기절하는 버릇이 있었고, 그리고 그 기절에서 깨어나는 것은 나였다. 사쿠라는 그런 공포스러운 상황을 헤쳐나가고, 다시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나를 꺼냈다. 나의 쓸모가 그것이라면 그렇게 해주는 수 밖에, 그리고 볼일이 끝나면 다시 주도권을 사쿠라에게 돌려주었다. 독특하게도 나는 자유롭게 나타날 순 없어도 자유롭게 들어갈 순 있어서 원하는 때에 그 아이에게 몸을 돌려주는 게 가능했다. 이것 또한 사쿠라의 입맛에 맞춘 것일까. 그랬기에 내가 세상을 아는 방법은 오로지, 사쿠라 뿐이었다. 스스로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었고 내가 이제까지 해온 일은 주변에 있는 것들로 위협이 되는 것들을 물리치거나 도망치고 싸우고 다투는 것 뿐이었으니까. 평범한 삶이란 너무도 먼 것이었고, 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충사가 된다면 견디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그 아이의 공포의 근원은 벌레이므로 해결을 위해선 충사가 되는 게 불가피한데도 말이지… 오로지 쓸모를 위해 충사 일을 자처했으면서도 나는 그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평범한 사람의 행복을 알게 되었다. 무엇을 먹고, 어디에 가고, 무엇을 하는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리는 평범한 행복이 무엇인지, 언젠가부턴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런 행복을 돌아보고, 곱씹는다면 분명 돌아가기 싫어질 것이다. 돌아간다 뿐일까. 이 일이 해결된다면 사이온지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당연하게도, 사쿠라는 다시 나를 부르지 않겠지. 이것은 대가였다. 결말을 알면서도 비극을 자처한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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