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화

BELOVED/ETC.2021. 1. 26. 23:07

   그 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우온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장사를 하든, 탐험을 하든, 일을 하든 항상 출타중이기 때문에 미리 시간까지 잡아가며 약속을 했다. 도대체 뭘 하려고? 혹시나 또 험한 일을 하려나 싶어 이런저런 준비를 해갔지만, 그녀가 제안한 것은 단지 무기를 손 보는 일이었다. 그 무기에는 정령도 포함이 되어 있었고, 일순간 엔은 맥이 빠져버렸으나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성미기에 결국 자리에 앉았다. 변변한 장소도 없이, 드넓은 아무 평원에나 앉아서 그들은 조용히 무기를 손보기 시작했다. 엔은 새로 얻은 악기들을 손질했고, 우온은 꺼낸 김에, 라는 말로 연주를 요청했다. 생각나는 것이 없어 엔은 아무거나 불기 시작했고, 아무도 없고 아무 소리도 안나는 평원에 느닷없는 악기 소리가 퍼졌다.

 

   "왠지 무드있다."

   "글쎄, 무드 차리느라 오늘 장사도 다 버리고 왔지만요."

 

   우온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오늘은 꼭 이러고 싶었어.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평온한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엔은 그 말에 더 이상 싫은 소리 없이 악기를 불어주었다. 부지런한 그는 평소에 모든 손질을 주기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다지 시간을 내서 할 일까진 없었던 것이다. 느긋한 시간이 난 김에 정령까지 옆에 꺼내두고, 엔은 조용히 줄곧 악기를 불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악기를 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들은 한참을 그 자리에 가만 앉아 느린 시간을 보냈다. 무기를 닦던 우온은, 돌연 무언가 생각난듯 일어섰다.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생각난게 있어서. 잠시 맡아주겠어?"

 

   우온은 짐도, 무기도 전부 놔둔채 구름을 하나 불러 타고 사라졌다. 아무것도 안 가져가는 것을 보면 싸우러 가는 길은 아닌듯한데, 이 넓은 평야에 무슨 볼 일이 있다고. 그러나 엔은 괜한 신경은 끄기로 했다. 사생활이라는 것이 있듯이, 말하지 못하는 일도 분명 있을 것이다.

 

   "주인! 언제까지 여기 있을거야? 지루해 죽겠어."

   "해질때까진 있을거에요. 자든지, 아니면 뭐. 상태는 괜찮아 보이는데, 어디 안 좋은 곳 있어요?"

   "그런건 됐고, 주인아! 새 밥은?"

   "아, 부러뜨릴걸 잘못했나."

 

   그들은 실없는 대화를 했다. 나란히 놓인 활과 실린더에서 서로 다른 색이 반짝였다. 엔은 악기를 닦던 천으로 활을 몇 번 닦았고, 화살을 대는 곳에 새로운 붕대를 묶었다. 구태여 묶을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익숙해진 습관이었다. 어린 투정을 받아주던 엔의 시선이 잠시 시종일관 조용히 있던 실린더로 향했다. 마치 눈이 마주친 것처럼, 실린더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의 한심한 정령은 여전하군요."

   "뭐, 뭐?! 주인아, 쟤가 지금 뭐라는거냐? 이 활의 정령을 두고 한심하다니!"

 

   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다지 자신의 정령 편을 들어주지도 않았다. 늘 그랬듯 두 정령은 시덥잖은 말싸움을 시작했고, 엔은 진절머리가 난듯 활을 옆에 내려놓고 일 없이 며칠 전에 만난 고양이를 불러 장난치기 시작했다. 두 정령은 처음 만날 적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저 바보같은 활 정령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 주인 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실린더 정령이 주인 외에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가 실로 궁금했다. 아니, 그 이전에 제 주인과의 관계도 과연 '바람직'할까. 엔은 우온이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이 생산성 없는 말싸움을 끝낼 수 있는 것은 그녀 뿐이었다. 실린더 정령은 은근히 활 정령을 향한 말들에 주인인 엔에 대한 얘기를 끼워넣어 심기를 긁어댔지만, 엔은 아예 듣지 않는듯 품에 안은 고양이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타인의 칭찬, 야유, 평가, 시선. 모든 것에서 무뎌진 그를 상처입힐 수 있는 말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내 주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야, 주인아! 너도 뭐라 말 좀 해봐, 넌 내 편 아니냐? 아우, 정말!"

   "큭큭…, 포기하세요, 그는 비겁하고 비열한 부랑자 나부랭이일 뿐이니까. 영웅의 이름을 팔아서 제 좋을대로 돈을 벌려는, 그런 밀레시안 따위… 자신의 정령을 아껴줄리도 없겠죠."

   "너 말 다했어?!"

 

   '영웅'이라는 단어가 엔의 귀에 꽂혔다. 저에 대해 무어라 떠들든 그는 이제 신경쓰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그녀에 대해서는. 그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다시 실린더 정령을 쳐다보았다. 고양이는 주인의 품 안이 답답한지 이미 뛰쳐나온 후였다.

 

   "못 들었어요. 다시 말해줄래요?"

   "그 뾰족한 귀로도 못 듣는 것이 있습니까? 반경 몇 km의 바람 소리도 듣는 엘프의 몸을 빌리고서……."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엔이 그를 돌아보길 기다린 것처럼. 처음부터 그는 엔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엔 뿐만 아니라, 우온에게 접근하는, 그 자신 이외의 어떤 존재라도 그는 좋아할 수 없었다. 그가 단 한가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세계엔 오로지 그녀 뿐이었다는 것. 그녀의 세계에도 그가 전부였다면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 문제는 전부.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짊어지고 있고, 그 무게가, 그 무게로 하여금 얻는 모든 것이, 그리고 그 옆에서 그녀를 지탱하는 단 한 명의 밀레시안이. 미치도록 거슬렸을 뿐. 그는 엔이 자신을 돌아보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듯 말을 쏟아냈다.

 

   "당신은 항상 영웅을 위로하는 것처럼 행동하죠.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를 이해하고, 또 수용하는 척하며… 정말 힘들고 고된 일은 그녀에게 전부 맡기고, 속편히 장사를 하며 돈을 벌고, 여행을 가며 탐험을 하고, 저런 한심한 정령을 끼고 시시덕 거리며 하루하루를 보내지. 당신은 그녀가 가진 고통의 반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테죠. 당신이 그 고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세상을 스스로 짊어지고, 돌아갈 곳 없이 영원을 살아가는 영웅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당신은 비겁하고 비열하니까."

 

   엔은 실린더를 가만 쳐다보았다. 흔들림 없는 그 표정은 여전했다. 그는 고작 말 몇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래서요."

 

   그의 정령이 옆에서 뭐라고 떠들어댔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자신을 벗어났던 고양이는 어느새 관심을 주지 않는 주인의 곁으로 돌아와 발목에 몸을 부벼댔다.

 

   "그래서, 뭔가요? 저는 이해 못하니까 썩 꺼지라는건가요? 왜, 당신 주인이 날 좀 내쫓아달라 하던가요? 그 말은 못 들은걸로 하겠어요. 제가 아는 그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하는 사람이니까. 당신처럼 남이 안 보는 틈을 타서 상대를 무너뜨리려 하는 비겁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 대화는 자연스럽게 거기서 끝났다. 어디에 갔다왔는지, 먹을 것을 한아름 들고 우온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정령과 엔 둘 다 특별히 그 대화를 떠벌리고 괜한 분쟁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엔은 그 일이 없던 것처럼 행동했고, 실린더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고양이는 어느새 제멋대로 주인 곁을 빙빙 돌며 나란히 놓인 반짝이는 무기들을 만지작 거렸다. 그는 아마 그 자신만이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 주변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내가 아니꼬운거겠지. 엔은 눈치가 썩 좋았다. 그러나 그는, 그 말 몇 마디에 자신의 행동을 바꾸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내일 평소처럼 장사를 나갈 것이고, 며칠 후에 예정해두었던 탐험도 떠날 것이다. 그는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등에 노란 빛의 정령을 데리고 다닐 것이고, 그가 먹을 보석을 사다 못해 직접 야금지에 찾아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기,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라도 그녀가 그를 필요로 한다면. 그는 모든 일을 멈춘채 그녀에게 갈 것이다. 그것이 그가 정해놓은 단 한가지의 규칙이기 때문에.

 

   "다음에도 불러주세요."

   "어, 음? 뭐?"

   "시시한 일이지만 가끔은 쉬는 것 같아서 기분 좋으니까요."

 

   그는 대충 둘러댔다. 그녀가 알아채지 못하게 할 것이다. 둘 사이에 있던 갈등도, 그만의 어떤 규칙도. 그러나, 떠나지 않겠어. 당신이 그 짐을 모두 내려놓을 때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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