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가격

BELOVED/ETC.2021. 1. 26. 23:02

   당장 한 마디 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 안하네? 검은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그를 더러 그의 정령이 말했다. 그는 대답 않고 묵묵히 지평선을 죽, 응시했다. 머잖아 그의 정령이 그를 몇 번 불렀기에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 했지만. 그는 짧게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하죠?"
   "무슨 말이라니. 3천만 골드래! 여기 사람들에게 비추면 엄청 값진 돈 아냐? 남한테 빌릴 정도면."
   "뭐, 3천만… 그렇겠죠. 대부호의 딸이랑 결혼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나보죠."
   "그럼 너네가 말하는 '결혼'이라는건 사람을 사는거야? 사람마다 가격이 틀리나?"
   "아뇨… 지참금이라는건 어떤 행사에 참여할 때 내는 돈이라는 뜻이에요."
   "하지만 결혼은 저 남자가 하는거 아냐? 바사니온지 배사니온지 하는 저 남자. 행사의 주인공이 돈을 내나?"

   맞은 편 방향으로 불어온 바람이 그의 머리를 시원하게 날렸다. 3천만 골드라. 이 대륙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긴, 나도 아직까지도 완전히 잘 모르니까. 하지만 전생에서도 '지참금'이라는 개념은 있었다. 아주 먼, 그보다도 더 먼 옛날부터 관습적으로 존재해왔지.

   "어디서든 결혼에 지참금이란건 존재했어요. 구경오는 사람들도 축의금 형태로 내야하고, 참가하는 사람은 그야 말로 지참금으로 내는거죠."
   "너네가 말하는 결혼은 사랑하는 남녀 혹은 남남이든 녀녀든 어쨌든… 사랑의 한 결실 아니야? 내가 잘못 배웠나?"
   "과거에서부터 이어져오던 관습인데, 옛날에 '결혼'이니 '사랑'이니 했던건… 사실은 정치와 돈과 뭐 그런 비슷한… 것들의 도구 랄까, 그런거였어요. 내가 지위를 얻고 싶거든, 저 귀족의 딸과 결혼을 해서 사위가 된 후 그 지위를 얻는다… 뭐, 그런거죠. 결혼은 권력 획득의 수단이었어요.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결혼과 연애가 사랑의 어떤 한 형태가 된지는 얼마 안 됐어요. 그러니까 지참금 같은게 필요했던거죠."
   "뭐, 뭐? 정치랑, 아. 모르겠다. 아무튼 말이야. 그럼 네 말대로 저 남자는 그 예쁜 엘프 여자를 사는거야?"

   포셔를 말하는건가. 그는 스치듯 노란 머리의 아름다운 여자를 떠올렸다. 여기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곁눈질로 우연히 만났던 사람. 당시에 서로 면식이 없고 해야할 일이 바로 앞에 있었기에 더 볼 새도 없이 그대로 떠났지만, 그 후로 아주 먼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는 다시 그녀를 제대로 만날 수 있었다.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있었는지,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그는 이어서 이멘 마하의 루카스를 떠올렸다. 그녀를 만나게 해준 장본인인가, 하지만… 그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역시 그렇게 달갑지는 않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왜 '그러겠노라'하고 대답했는지. 아직 나는 조금, 비겁한가.

   "그가 생각하기에 그만한 돈을 준비해서 그녀에게 돌아가는게 좋다고 생각하는거에요. 지금의 아까같은 거렁뱅이 상태로 돌아가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니까."
   "헤에, 그렇구나. 너도 그렇게 생각해?"
   "저는……."

   그는 잠시 대답을 멈췄다. 멈춘 대답과 함께, 그의 발길도 잠시 멈춰 그는 구름 위에 서 떠있었다. 다시 출발하려고 무릎을 굽히는 것 같더니, 이내 도로 핀채 그는 그대로 구름에 앉아 등에 지고 있던 활을 손에 쥐었다.

   "글쎄요. 분명 지금같은 상태로는 무리겠죠. 집에 가서 한숨 잔 후에, 세수 좀 한 후에 옷도 괜찮은 옷으로 갈아입고… 그를 도와준 친구한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죠. 물론 소식을 전해준 저한테도 감사인사 정도는 해야할거고요."
   "돈은?"
   "대륙에까지 소문이 다 날 정도로 부자였던 아버지를 둔 그녀에게 3천만 골드가 과연 필요할까요? 그녀는 저처럼 자유롭게 떠나고 싶다고 했어요. '자유'에 '돈'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에요."
   "하지만 넌 동시에 추구하고 있잖아?"
   "그래서 힘들잖아요."
   "흐음."

   그는 한동안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잠시 잡생각에 잡힌 것처럼, 그는 한 손을 턱 밑에 대고 뜬 눈으로 고민했다. 그가 장시간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은 곧 그런 의미였다.

   "그녀는 그를 고작 3천만 골드로 생각하지 않아요."
   "근데 넌 왜 지금 이러고 있어? 돈까지 빌리러 다니고."
   "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까요."
   "왜?"
   "제 역할은 이 넓은 대륙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에요."
   "네가 언제 그랬어?"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 사람'에게 부여받은 역할이 그래요. 부여받은건지 떠맡은건지 제가 자발적으로 가져온건진 모르겠지만……."

   그랬나? 옅게 보이는 그의 정령이, 머리를 북북 그어댔다. 내 주인이 언제 그랬지? 실로 그랬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가 믿고 따르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가 혐오해 마지않는 사람일수도 있다. 그들은 실로 그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해주었다. 그것은, 그가 그녀 만큼이나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들어오는 의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책임져야할 어떤 사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그는 그저 그렇게 오래전에 받아들였다. 우온을 다시 만났을 때부터. 그것은 순전히 그의 호의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한 의뢰가 그 사람에게서 끝나는 일은 거의 없어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니까…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을 옮겨가다보면 의뢰가 길어지기도 하고, 중간에 완전히 다른 의뢰로 바뀌기도 하고 그렇죠. 그런 과정에서 의도가 많이 바뀌기도 해요. 지금도 그렇죠… 술에 물을 탔는지 알아보러 갔다가 한 남녀의 사랑을 이뤄주러 돈을 빌리고 다니니. 이런적 많았으니까 기억날거 아니에요?"
   "그렇지? 많은 일이 있었지."
   "선택권이 없어요. '거절' 하겠다…라는. 의뢰를 가려받을 입장이 아니에요. 내 역할이 이렇기에 이런 일을 하는거니까."
   "그래서?"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부탁하는 이상의 일을 하진 않아요. 제 의견을 물었다면 말해줬겠지만 '돈을 빌려다 달라' 라고 말한다면 빌려다 줄 뿐. 그 이상의 일은 하지 않아요. 그건… 우리들 사이의 규칙이기도 하고."
   "규칙도 있어? 너네 일하는거에?"
   "문서론 없죠. 그냥 그러자, 하고 언젠가부터 그렇게 되어버린거지."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의 정령을 화살통 끈 사이에 끼우고, 다시 멈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알비 던전으로. 돈을 빌리러, 인가. 부탁하는 일을 가려 받거나 거절하진 않지만, 부탁한 일 이상의 일은 하지 않는다. 그 말이 정말 딱 맞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구름을 타고 가면 되기에 특별히 배를 타진 않아도 될 것 같았지만, 그는 구태여 구름에서 내려 평범하게 배를 타고 갔다. 그는 그런식으로 항상 사람들 사이에 끼었다. 누군가 부탁하진 않았지만, 짐을 옮기는 일이 힘들어 보이기에 상자를 들어 같이 옮겨주기도 하고, 항해가 지루하다며 엄마를 보채는 아이를 위해 악기를 꺼내 불어주기도 했다. 플루트가 바다 위를 떠다니는 소리를 가만 들으며 그의 정령은 생각했다. 뭐야, 별로 그렇지도 않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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