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인형은 수정의 꿈을 꾸는가?
BELOVED/FF142023. 11. 23. 13:16영웅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세계였다. 당시의 나는 수정공이 그를 소환하기 전 에메트셀크와 함께 1세계로 넘어갔었다. 그리고 에메트셀크가 필요한 밑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크리스타리움으로 보내져 그곳의 주민으로 일했다. 수정공은 백마법도, 흑마법도 다룰 수 있는 마도사였기에 내가 원초세계의 마법인형이라는 사실을 첫눈에 알아봤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내게 제법 친절했고 그곳의 주민으로 흔쾌히 받아들여주었다. 당시의 나는 에메트셀크의 말대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성실하게 크리스타리움의 재건을 도왔다. 당시에는 그런 이유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그의 계획엔 찬성하지 않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의 계획의 전부를 알 순 없었지만 무언가 위험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이 세계의 영웅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도⋯⋯. 술식의 집합에 불과한 내가 그의 모든 감정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어렴풋이 그가 슬퍼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슬펐다. 나를 처음 만나고 헤어지기까지의 그 모든 순간에서 그가 슬프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다만, 나는 그가 1세계에서 비로소 영웅을 직접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때 만큼은 기묘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내게 아무런 감정도 가르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는 그때 서글픔이라는 단어를 이해했다.
영웅의 이름은 시오르 티아. 태양의 추종자 남성이며 신장은 173cm,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밀색이며 눈은 금빛이다. 세계에 거의 남지 않은 전사였고 불꽃이 타오르는 도끼를 다룬다. 원초세계의 항구 도시, 림사 로민사 출신으로 종종 바다를 그리워했다. 그는 과묵해서 좀처럼 말하는 일이 없지만 아주 많은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했다.
그는 나를 퍽 다정하게 대했다. 그는 마법엔 지식이 없어 내가 마법인형이라는 점을 몰랐으나 마도사 야슈톨라를 통해 내가 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반응이 제법 궁금했으나 그는 야슈톨라에게 그게 뭐냐고 싱겁게 물을 뿐이었다. 그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어보였다.
"⋯⋯해서, 흑마법을 이리저리 엮어 창조된 존재라는 뜻이에요. 다만 저런 종류의 흑마법은 정확하겐 아는 바가 없어요. 관련 서적이 있다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요."
"그렇구나."
"당신,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요."
"그래도 제대로 들었어."
알아요. 나는 당분간 야슈톨라와 함께 라케티카 삼림에 머물렀다가 곧 크리스타리움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쯤의 나는 이미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과 관계가 깊어졌고 스스로도 그곳의 일을 돕는 것을 즐겁게 여겼다. 야슈톨라는 나의 구성하는 마법의 원리가 궁금하여 나를 잠시 데리고 있었지만 내가 크리스타리움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그대로 보내주었다. 아마도 그들은 누구 하나 빠짐 없이 나를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으로서 대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일까?
그는 아주 바쁜 사람이었고 1세계에 와서도 하루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했다. 이곳엔 해결해야할 문제가 너무 많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그가 유일했다. 그러나 한 번 정도 그와 나는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는 팬던트 거주관에서 머물렀다. 나는 그때 거주관의 관리를 돕고 있었고 오전에 객실의 세탁물들을 수거해 세탁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거주관에 한동안 머무르긴 했으나 심하게 바쁜 탓인지 거주관에 돌아오는 일이 잘 없었다. 며칠 전에 개어두고 간 이불이 손댄 흔적도 없이 그대로였던 적도 많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일이 있다고 해도 그는 객실을 아주 깨끗하게 썼고 개인적인 세탁물을 잘 꺼내두지 않아서 내가 그의 옷을 세탁한 적은 단 한 번 뿐이었다. 검은색 반장갑과 그가 즐겨 입는 하얀색 케이프였는데 바깥쪽은 이상한 점액으로 엉망이었고 안쪽은 혈흔이 묻어 냄새가 지독했다. 나는 하얗게 빛나는 그 점액이 빛 에테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어느 쪽이든 상태가 좋지 못해서 허가 없이 그의 옷을 세탁했다. 다만 그가 그것을 세탁해주길 바라진 않았던 것 같았다. 그는 일부러 내가 빨래 바구니를 들고 복도를 순회하며 세탁물을 수거하는 오전까지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고 충동적으로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시오르 티아."
"⋯안녕하십니까."
"객실에 세탁물이 있으십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혹시 며칠 전에 제가 방에 벗어 둔 옷을 세탁 하셨습니까?"
"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실이기도 했고 그것이 내가 이곳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켕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제 옷은 세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실례했군요. 죄송합니다. 옷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세탁이 필요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닙니다. 귀찮은 일을 대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에겐 말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탁물에 대한 것을 타인에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안쪽에 묻은 혈흔 때문입니까?"
"네, 뭐⋯⋯. 괜찮으시다면 제가 세탁실까지 들어드릴까요?"
그는 말을 조금 흐리면서 화제를 돌렸다. 나는 확실히 빨래 바구니보다도 작은 몸집이었지만 그걸 들어 옮길 힘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에게 부탁한다면 그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빨래 바구니를 들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다면, 세탁실까지 부탁드립니다. 이 층의 세탁물만 수거하면 됩니다."
그는 조용히 바구니를 들고 나를 따라 거주관 복도를 순회했다. 그와 나는 말이 없었고, 나는 객실 손님들이 내놓은 세탁물들을 모아 바구니에 넣었다. 그는 그저 바구니를 들고 내 뒤를 따라 올 뿐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나누면 좋을지 한참 고민했던 것 같다. 그를 향한 이상한 호기심과 관심이 끓었지만 어떻게 해소해야할지는 몰랐다. 나는 그저 그가 스스로 자기 얘길 해줬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다.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이야기라도 좋으니 아무 얘기라도 그가 꺼내줬으면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 편이었고 대화를 원한다면 내가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을 알았다. 그러나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하면 좋단 말인가? 나는 그에 대해선 거의 알지 못했다. 그저 소문으로만 알았을 뿐이다. 그는 1세계를 널리 돌아다니며 각지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녔다. 크리스타리움에 돌아오는 것은 수정공을 만나러 갈 때나 드물게 거주관에 와서 쉴 때 뿐이었다. 나는 성견의 방에는 들어갈 일이 없었고 중용의 공예관이나 시장에 있는 게 전부였으니 그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정보는 그의 더러워진 옷 뿐이었다.
"자꾸 물어봐서 죄송합니다만. 그 옷엔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는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생각해보면 내키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화제로 돌릴 수도 있었을텐데 그는 요령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침에 나가려고 하는 도중 구역질이 나서⋯ 뜻하지 않게 구토하게 되었는데 아마 체내에 에테르가 조금 쌓여서 그런 모양입니다."
"에테르가 쌓였다고요?"
"예⋯⋯ 바깥에서 조금."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사실 모를 순 없었다. 나는 에메트셀크를 통해서 수정공의 계획과 영웅이 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었다. 그 결과가 어떨 것인지도 그가 알려주었다. 그리고 에메트셀크가 예측했던 대로 영웅의 몸은 갖은 에테르가 뒤엉켜 끔찍한 상태였다. 대죄식자의 에테르를 영웅의 몸에 청산했으니 그의 몸 속은 서로 다른 생물이 키메라처럼 엉겨붙은 상태였다. 그 상태로 걸어다닐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는 그만치 강한 사람이었다.
나는 언젠가 그를 쓰러트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마도 에메트셀크의 계획은 실패할 것이고, 언젠가 내게 말해준 것처럼 순환의 바다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에메트셀크가 강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마도사고 세계를 뒤흔들고 뒤바꿀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계획이 허황된 꿈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마 그는 영웅을 쓰러트리지 못할 것이다. 뒤틀리고 허약해진 상태의 그라도 차마 죽이지 못할 것을 알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그를 해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결말이 어떻게 되든 그는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리석을만큼 다정하고 상냥하기 그지없는 그가 누군가를 원망할 순 없을 거라고. 알고 있기에 마음이 아팠다.
세탁실까지 가는 길이 그리 짧게 느껴진 적이 있었을까? 그는 세탁실 앞에 도착하여 수건과 옷이 산더미처럼 쌓인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그는 아마 오늘도 어딘가로 갈 예정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호기심을 끊지 못하고 그에게 묻고 말았다.
"오늘은 어디로 가십니까?"
"콜루시아 섬에서 저를 찾는 것 같아 거기로 갈까 합니다."
"그렇습니까. 또 대죄식자 토벌인가요?"
그는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에 놀랐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네⋯ 뭐,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에게 평범하게 말을 건넬 수 있었던 건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내겐 점성술과 같은 예지 능력은 탑재되어 있지 않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아마 다음에 당신을 만나는 곳은 불바다 같은 재앙 속이리라. 나는 충동적으로 그의 손을 잡고 가벼운 위로를 건넸다.
"오늘은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는 생뚱맞은 인사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