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BELOVED/FF142023. 9. 27. 18:51눈을 떴다. 천장이 매우 높았다. 백열등이 쨍하니 눈을 비췄지만 전혀 눈부시지 않았다. 나는 왜인지 눈을 뜬 그 순간부터 눈이 부시다든가 백열등이라든가 천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뿐 아니라 천장이 '다른 천장'에 비해 높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즉 나는 보통의 천장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기억엔 없었다. 내겐 이것이 첫 번째 천장이요, 이전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 천장이 다른 천장보다는 높다고 확실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옆엔 3미터가 족히 넘는 고깔 모양의 무언가가 촉수를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괴하다는 건 대체 무엇인가? 기괴하다는 말의 정의는 둘째요 그것이 이상하게 생겼다고 생각한 이유도 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세상에 있는 많은 생명체들이 저렇게 생겼다고 한다면 기괴하고 이상할 건 없지 않은가.
한동안은 모든 것이 그런 식이었다. 나는 끝없는 기시감 속에서 허덕였고 그때마다 어째서 본 적도 없는 것을 알고 배우지도 않은 것을 행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이전의 내가 그다지 박식하지 않았듯이 나는 별다른 정답을 찾진 못했다. 그 정도 생각하고 나면 문득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전의 나란 대체 뭐지? 나는 내가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분명하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밖에 나가 끝없이 몰아치는 모래 바람을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끝도 없을 것처럼 펼쳐진 넓은 사막에 매일 다른 모래를 실은 바람이 일어났다. 폭풍 너머로 가끔 흐릿한 인영이 일렁였다. 무엇인진 끝끝내 알 수 없었다. 마치 내가 나에 대해 아무것도 정답을 찾지 못한 것과도 같았다.
사색은 2주 간 이어졌다. 왜 2주냐 함은, 꼭 14일 째가 되었을 때 그가 내게 와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려줬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이곳에서 통용되는 그만의 식별 번호가 있긴 했지만 그것이 그의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딱히 이름에 집착하진 않았다. 그는 이름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 뿐이라고 말했다.
"개와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이는 건 인간 뿐이야. 개가 이름을 필요로 할 거라고 생각해?"
"아마⋯ 그렇지 않겠죠."
"명명이란 곧 나와 다른 존재를 내게 귀속시키는 행위야.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귀속되는 걸 참지 못하거든. 그리고 우리에겐 이름이 딱히 필요 없어. 우린 서로를 부르지 않으니까."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이름은 타자와 다른 나를 인지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름이라는 것은 본래 이름의 주인보다는 그 밖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내 이름을 부르는 일은 잘 없지 않은가. 무릇 당신도 우리를 부를테니 나는 이름이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우리들에겐 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하는지 이곳에서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B1DG8S다. 좋을대로 불러."
"그렇다면⋯ S는 어떻습니까?"
"마음대로 해."
그러고선 S는 내게 아주 이상한 질문을 했다.
"네 이름은 뭐지?"
이름?
그러고보니, 나는 내 이름을 알지 못했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움직이며 언어를 말할 수 있었고 사고 할 수 있었지만 내 이름을 알지는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누구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까지 소통한 존재는 S가 유일했고 그는 나를 딱히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잠시 버벅였다. 사실 나는 내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내 이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누군가의 탈을 쓰고 누군가의 불완전한 기억을 덧씌워진 채 누군가의 두 다리로 서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곧 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제가 기억하는 이름은 단 하나입니다. ⋯만, 그 이름을 제가 쓸 수 있을까요?"
"안 될 건 없지."
"예⋯."
난 얼간이처럼 대답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하루 뒤 나는 많은 사람들을 소개받았다. 나중에 알기를 그 중 대부분이 살아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처럼 아침이 되면 일어나고 점심이 되면 식사를 하며 저녁이 되면 술을 마시고 잠에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웃고 화내며 때로는 슬퍼하고 다치면 고통스러워 했다. 만약 사람과 사람이 아닌 존재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고 해도 우리에겐 딱히 이렇다 할 결격 사유가 없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7일 간 나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적어도 내가 덧쓰고 있는 이 기억의 주인인 시오르 티아라는 사람은 이곳에 남은 많은 사람들과 일전에 알던 사이였다. 그들과 시오르 티아는 친밀한 사이였고 대학을 함께 다니며 추억을 쌓았다고 했다. 그들 중 몇몇은 내게 과거의 일들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자 그만두었다. 그 뒤로 우리는 옛날 일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지 않게 됐다. 그들에게는 어느 정도 과거에 대한 기억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먼저 묻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퍽 불편해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내 탓인 줄을 알았다. 나는 그것이 미안해서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일이 없었다.
나는 그들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지만 S와는 종종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는 내게 많은 것을 물어 왔는데 대부분은 오늘은 무엇을 했고 무슨 생각을 했냐는 시시한 질문이었다. 확실히 나는 최근 잡스러운 상념이 많아졌다. 나는 가급적 자세하고 상세하게 대답했다.
"생각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는데?"
"그냥⋯ 특별히 정답이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일들에 대한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일전에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고요."
"연구실 구역에 잘못 들어온 탓에 널 만든 부품이 망가져서 기억의 대부분이 유실됐어."
"그건 저번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 그리고 인간은 항상 맥락의 공백을 채우려고 하지. 너의 기억에 생긴 거대한 구멍을 채우려고 한다는 거야."
듣고보니 그럴 듯한 설명이긴 했다. 그의 말은 내게 강렬하게 꽂혔다. 모든 면에서 그랬다. 그는 일단 나를 인간이라고 칭했다. 그는 가끔 우리를 인간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그는 입버릇처럼 우리에게 인간이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가끔, 그는 그도 모르게 우리를 인간이니 사람이니 하는 말로 표현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괜히 캐묻거나 늘어지진 않았다. 그는 귀찮고 사소한 말다툼을 싫어했고 나 역시 딱히 말싸움에 재주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내게 건전한 토론을 기대한다고 하지만 말주변이 없고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내가 그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켜주진 못했다. 그는 언변이 뛰어났고 또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나 근거를 들어 설명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자주 설득되었다. 지금도 꼭 그렇다. 나의 기억에 처음부터 있었던 거대한 공란을, 나는 무언가로 채우고 싶어 했던 욕구를 느꼈던 것이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언어를 통해 듣자 꼭 사실처럼 느껴졌다.
이곳의 일에 익숙해지고 약간의 권태가 찾아올 쯤의 일이었다. 사실, 내겐 권태라는 느낌은 잘 없었고 정확히 말하자면 버려지는 시간을 채울 만한 일이 필요했다. 나는 딱히 생산성 있는 하루에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남는 시간에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쯤 될 때까지 나는 S의 그 한 마디를 잊지 못했다. 나는 인간이요, 그리고 그렇기에 사고하며 기억의 빈 곳을 채우려 들고 있다고. 나는 스스로가 약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내가 모른 척 했던 사람들을 찾아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