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기적을 행하는 자에게

BELOVED/METROPOLIS2021. 1. 22. 20:39

구원은 없다

 

   그것은 넓은 방이었다. 남자는 그 방이 지나치게 넓다고 생각했다. 든 것도 별로 없는데, 어째서 우두머리들의 방은 이렇게 쓸모없이 넓기만 한지. 그는 이곳엔 아주 기괴하고 불쾌한 것들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토록 오고싶었던, 걷고싶었던, 갖고싶었던 꼭대기 층은 생각보다 허무했다. 그저, 대문짝만한 나무 문에 달린 금빛 손잡이를 밀고 들어가면. 좁고 길게 짙은 붉은색 카펫이 쭉 깔려 있고, 그 끝엔 다소 사치스러워보이는 넓은 책상이 있었다. 그 뒤엔 푹신한 검은 의자가, 그리고 나머지 공간엔 누구 취향인지 묻고 싶은, 버러지같은 작품들이 줄지어 놓여있었을 뿐. 문의 반대쪽 벽은 온통 유리 창문이었다. 그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그 방은 칙칙하고 재가 가라앉은 것 같은 자신의 방과는 달리 천연색으로 빛나는 듯 했다. 그는 무겁게 떨어지는 문을 반대로 밀고 붉은 카펫 위를 천천히 따라 걷는다. 이것은 다 누구의 피일까. 그래, 이것은 길이다. 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힘으로의 길. 그는 방으로 눈부시게 들어오는 햇빛을 온 몸으로 맞는다. 이것은 다 누구의 온기일까. 그래, 이것은 제 손끝에 식은 냉기다. 그는 천천히 닫혀가는 문 너머로 들리는 아름다운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다 누구의 비명일까. …그래, 이것은 죄다. 제가 지은 억겹의 족쇄. 문은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고, 그 자리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길을 걸어 온기를 맞고 소리를 들으며 검은 의자를 빙글 돌렸다. 그는 그 자리에 앉고 싶었다. 그의 삶은 줄곧 그것만을 위해 삐그덕거리며 움직였다. 그는 멍하니 의자를 내려다봤다. 생각보다,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제 삶을, 십수년을 지옥같은 늪에 던진 결과가, 보상이 이것이라면. 그는 이 허무함을 믿을 수가 없어 서둘러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기까지의 순간을 음미할 정신도 없었다. 그리고 의자에 편히 몸을 묻었을 때. 의자는 점점 돌이 되듯 굳어갔다. 아침의 따스한 햇살은 곧 져버려 그곳엔 차가운 하얀 달빛만이 들어왔다. 견디기 힘든 역겨운 냄새가 발 끝에서부터 풍겨왔다. 사방에서 고통의 신음과 공포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것은.

 

   남자의 삶은 찬란했다. 빛났다. 매력적이었다. 아름다웠다. 행복했다. 그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전세계라는 말은 그저 과장된 포장이 아니었다. 그는 빛나는 재능을 상상도 못할만큼 큰 무대에서 십 수년 간 펼쳤다. 그가 가는 곳엔 어디든 찬사와 박수갈채가 가득했다. 기자들은 그의 한마디를 얻어내려 혈안이었고, 음악 평론가들은 그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보고자 어마어마한 돈을 냈다. 그의 팬들은 그를 아주 멀리서 한 번 보기 위해 회장 밖으로 줄을 선다. 돈이 많다는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이용해먹을 구실은 없을까 기어들어온다. 아이들은 학교 음악 시간에 그의 이름을 배운다. 세상엔 그를 롤모델이라며 떠들고 다니는 삼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전부 그의 발걸음에 열광한다. 작은 음계 하나에 소리친다. 아무 의미도 없는 손짓에 홀린다.

   동시에 남자의 삶은 비참했다. 지옥같았다. 끔찍했다. 추악했다. …불행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저택에서 마음대로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는 도련님이었다. 생활은 틀에 박힌 듯 매일이 똑같았다. 그를 옭아매는 허울 뿐인 규율은 칼에 잘린 듯 그를 날카롭게 구속했다. 그는 점점 평범함이 뭔지 잊어버렸다. 아니, 잊어버렸다기 보다는 그저 스스로의 평범함을 만들고 그에 익숙해졌다. 그저 조용한 저택 가장 구석에 있는 작은 독방에 갇혀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모르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이 그의 '평범함' 이었다. 그가 가는 곳엔 어디든 바이올린 소리가 났다. 그 집의 사용인들은 독방에서 들리는 바이올린 소리에 감탄한다. 정원사는 창문 너머로 엷게 들리는 날카로운 연주 소리에 넋을 놓고 손에 든 연장을 떨어뜨린다. 매일 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가정 교사는 그의 연주를 낱낱이 지적한다. 그 옆에 서 있는 아버지는 그를 질책한다. 꾸짖는다. 고함친다. 짓밟는다. 그들은 전부 그의 행동 하나 하나를 평가한다. 짧은 말 한마디를 가로막는다. 아무도 없는 곳에 그를 혼자 가둔다.

 

   그는 줄곧 인정 받고 싶어 했다. 누구에게 뭘 인정 받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냥 그는 그 대상이 자신을 항상 비난하는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바이올린 실력을 인정 받고 싶었다. 그것은 피아노가 치기 싫다는 단순한 객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저항이었다. 오기였다. 도전이었다. 그는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하루의 일과는 매일 같은 시간에 시작됐고, 거북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면 할 일이라곤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독방으로 향한다. 바이올린을 들고. 그리고 그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가 독방에서 나오는 것은 가정부가 그를 부르거나, 가정교사가 찾아오거나, 어머니가 자신을 부르거나,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을 때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루종일 하다 같은 시간에 잠들었다. 그의 인생은 그 단순한 하루하루의 반복이었다.

   부단한 노력 끝에 그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데 성공했다. 단지 잠깐 반짝이는 재능은 자신을 갉아먹는 노력에 폭발하여 자신의 실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그의 아버지는 이것을 일부 인정했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99%는 완성되었다' 라고. 그는 나머지 1%를 채워올 것을 요구했다. 그는 그 부족한 1%를 채우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그 어떤 곡을 어떻게 연주해도 그의 아버지는 귀신같이 모자란 한 조각을 찾아냈다. 

   불행의 시작은 갑자기 찾아왔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털어내지 못한 먼지 한 톨만큼의 결점을 견디지 못한 지독한 완벽주의자는, 자신의 아들의 손을 끌고 기적을 이루러 안타리우스로 향했다. …그리고, 기적을 이뤄냈다. 남자는 그 후 완벽해졌다. 완벽해진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의 앞에서 보인 첫번째 '완벽한 연주' 이후 그의 주변으론 사람들이 하나씩 꼬이기 시작했고, 그는 그때부터 아버지의 손이 끄는대로 질질 끌려다니며 수많은 무대에 섰다. 상을 휩쓸었다. 신문을 채우기 시작했다. 음악 서적의 대목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섰던, 세계적인 콩쿠르 대회의 맨 앞에서 자신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버지의 표정을.

   그래도 그는 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제 손으로 어떻게든 완벽을 이루고 싶었다. 그는 더이상 연습하지 않아도 완벽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연습에 할애했다. 그는 쉬지 않고 바이올린을 켰다. 증명해야만 했다. 구태여 억지로 연주를 망쳐놓지 않더라도 자신은 완벽할 수 있었음을. 하지만, 그런 그의 바람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 화재 이후 그는 잊었다 생각한 지옥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야했다. 갑작스러운 화재, 전멸과 전소, 신속한 뒷처리. 그는 아주 나중에서야 그 일이 아주 인위적이었고, 고의적이었고, 필연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 속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증오만이 남았다. 그는 그것이 누굴 향한 것인지도 몰랐다. 인정하기 싫었기에 그는 그냥 그 대상을 안타리우스라고 생각했다. 화풀이 대상이 정해지자 감정은 주체할 수 없이 커져갔고 이윽고 거대한 복수심으로 썩어갔다. 한때 천재로 칭송받으며 온 무대의 조명을 받아 빛나던 금빛 눈은 비뚤어지고 일그러진 못난 불꽃으로 타올랐다. 이곳을 무너뜨리겠다. 궤멸시키겠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세상에서 제거할 것이다. 내가 느꼈던 지옥을 똑같이 이곳에 실현시키겠다. 내 연주를 망쳐놓은 그들에게 똑똑이 보여줄 것이다. 그 참을 수 없는 열기를. 그리고 증명할 것이다. 나는 나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을. …대체 누구에게. 그는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일이 확실히 쉬운 것은 아니었다. 안타리우스는 점점 커졌으니까. 마음을 굳게 먹은 그때 그는 아직 어렸고, 그저 시키는대로 끌려다녀야하는 인형에 불과했다. 믿음이 곧 기적이 되는 이곳에서 필요한 것은 굳은 믿음 뿐이었다. 그래. 믿음. 그것이 필요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점점 능숙하게 쓰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그것에 익숙해졌다. 그는 천천히 적이 제게 안겨 준 무기를 사용해서 자신의 힘을 키워갔다. 그는 작은 짐승에서, 점점 큰 괴물이 되어갔다. 메트로폴리스에서 찾아 낸 액자는 그를 완전하게 만들었다. …기적을 가져다 준다는 그 액자의 힘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남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복수를 실현했다. 신도들에게 문자 그대로의 지옥을 보여주기도 하고, 간부들을 처참한 방식으로 살해하기도 했다. 그가 선사하는 가증스럽고 비참한 참상을 보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없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미쳐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방치하여 저들끼리 피를 내어 싸우게 하기도 했다. 그는 수많은 신도의 삶을 짓밟았고, 제멋대로 휘둘렀다. 그는 그 일련의 과정이 아주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 했다. 그것은 지난 십 수년 간의 삶을 보상받고 싶은 얄팍하고 치졸한 이기심이었다. 액자의 힘은 피를 먹으면 먹을수록 커지는 것인지, 혹은 점점 커지는 욕망과 이상을 먹어 커지는 것인지 서른 한 명을 집어삼킨 처음보다도 끔찍한 듯 했다. 그는 이것을 이기주의의 변명으로 사용했다. 더 큰 힘이 필요하다고.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타이르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암석처럼 단단한 의자, 얼어붙을듯 차가운 달빛, 역한 피의 냄새와 잔인한 소음. 그래, 이것은. 

 

   기적이었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먼 옛날, 그저 시험 삼아 고혹을 쓰려고 왔을 때 봤던 그 검은 의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의자보다도 편안해보였는데. 그는 의자가 문젠지, 자신이 문젠지 알 수 없었다. 그래,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는 신경질적으로 의자를 발로 차 쓰러뜨렸다. 의자는 맥없이 굴러가더니, 바닥에 떨어지며 쿵 소리를 냈다. 그는 이내 무대 조명처럼 자신을 비추고 있는 달을 창 너머로 쳐다봤다. 그는 염원하던 목표를 이뤘다. 안타리우스는 무너졌다. 비참한 흔적만을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그 후에 남은 마지막 안타리우스 수장이었다. 이제 뭘 해야하지. 의자는 넘어뜨렸기에 그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가 든 것이라고는 바이올린 뿐이었다. 바이올린. 바이올린. 바이올린. 그는 삶의 존재를 부른다. 존재 이유를 부른다. 존재 가치를 부른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한 고민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답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것.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 완벽을 연주하는 것. 하지만 스스로 완벽을 증명한 지금. 더이상 바이올린을 연습할 이유는 없었다. 부러 무엇하겠는가. 그는 이미 완벽한 것을. 평생 가지 못할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던 정상의 자리는 생각보다 쓸쓸하고, 고요하고, …덧없었다.

   남자는 천천히 카펫을 밟으며 온 길을 돌아간다. 무거운 문짝을 느릿느릿 밀어 젖히고, 신음소리로 가득한 어두운 복도를 걷는다. 게 중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이제 와 이름 같은 게 무슨 상관이랴. 남자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내려가고, 또 내려간다.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더 내려간다. 그는 이윽고 최하층에 도착한다. 그곳엔 살아있는 생명은 보이지 않았다. 회색 쥐 한 마리 살아있지 않은 최하층의 캄캄하고 긴 통로를 지나, 그는 어떤 문 앞에 도달한다. 그는 고급스러운 붉은 문을 힘주어 활짝 열어젖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복도에 눈부신 빛이 한번에 쏟아진다. …그는 대음악당에 도착했다.

 

   대음악당. 중앙엔 오케스트라가 전부 설 수 있을만큼 넓고 긴 반원 형태의 무대가 있다. 그 무대의 중앙에는, 지휘자가 서는 자리가 있고. 그리고 이 무대의 앞, 뒤, 양 옆, 양쪽 대각선 위까지 붉은색 객석으로 가득 차 있다. 천장은 아주 높고, 눈부신 조명이 가득 메워져 있으며 무대의 앞쪽으로는 빛을 받아 반짝 빛나는 긴 유리 장식이 마치 떨어지는 빗줄기처럼 천장부터, 바닥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는 줄곧 어둠 속에 오래 있었기에 갑작스러운 눈부심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보니, 이런 빛을 받은지도 꽤 된 것 같았다. 언제가 마지막 이었을까. …이제와선 쓸모없는 회상에 불과했다. 그는 뚜벅 뚜벅, 핏빛 발자국 소리를 내며 천천히 곡선형 무대로 나아갔다. 당연히 오케스트라는 없었다. 그에게 오케스트라는 그저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줄곧 홀로 독무대를 서왔으니, 마지막 무대에서도 딱히 다른 사람은 필요 없었다. 지휘자도. 관객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그곳에선 그 자신이 단 하나 있는 관객이었다. 가장 빛나는 눈으로, 온 신경을 집중하여 자신을 바라볼 단 하나의. 그는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숨을 깊게 들이쉰다. 그의 손으로 연주하는 바이올린은 이제 아름다운 선율도, 찬란한 구원도 아니었다. 그저 지독히 잔인하고 참담한 악마의 저주일 뿐. 그는 무대의 가장 중앙에 선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들고, 마지막 연주를 시작한다. 그는 이제껏 두려워하고 있었다. 단 한 순간의 실수를. 수 십번, 수 백번 연습하고도 단 한번도 무대에서 연주해 본 적 없는 곡이 있었다. 그는 그 곡을 아주 좋아했지만, …동시에 아주 증오했다. 대음악당 안에 날카로운 바이올린 소리가 울린다. 그는 천천히 이 대음악당의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 눈으로, 그 입술로, 그 손길로. 지배자의 선율은 마치 누군가를 질책하듯, 책망하듯, 꾸짖듯 한없이 거칠게 관객을 휘어잡고, 휘두르고, 흔들고, 찢고, 찌르고, 베어냈다. 그것은 고해였다. 말로는 도저히 다할 수 없는 무거운 생의 무게를, 신이 부디 알아주길 간절히 바라는 처절한 부르짖음이었다. 이윽고 절정에 달한 바이올린 소리는 마치 누군가를 찾듯이, 누군가의 흔적을 찾듯이, 누군가의 이름을 찾듯이 간절하게 울렸다. 그를 찾으러 올 사람은 없는 걸 알면서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는 걸 알면서도, 그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가 자길 구해주러 올 때까지 그 부름을 계속 하고 싶었지만 모든 악보에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은 연주 하는 한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그의 연주는 일순 조용해졌다가, 이내 서서히 그 막을 내리려는듯 느리게 이어졌다. 그는 마지막이 옴을 느꼈다. 이것은 마지막이었다. 그가 살아 숨쉬는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는 마지막 한 음 직전, 알 수 없는 애틋함을 느끼고 연주가 끝나자 활을 움직이는 손을 멈췄다. 그는 정중하게 무대식 인사를 했다. 그 스스로에게. 그 연주는 완벽했다. 그 연주에는 그 어떤 불순물도, 실수도, 오류도 없었다. 이제, 이제야. 비로소 이제야 완벽해졌거늘. 그 누구에게도 들려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계단식 무대의 2층에 걸터 앉았다. 이 넓은 홀을 공연도 없이 전세 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여기엔 아무도 오지 않겠지만, 먼 훗날 누군가 이 공간을 찾는다면… 그땐 보게 되겠지. 그는 바이올린을 애정이 담긴 눈길로 쳐다봤다. 바이올린. 바이올린. 바이올린. 그는 제 삶의 이름을 다시 부른다. 그는 잠시 멍하니 앞을 쳐다보았다. 넓은 관객석엔 누구도 없었다. 마지막 연주가 어땠는지 묻고 싶었는데, 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연주를 지켜본 유일한 관객에게 물었다. 자신의 마지막 연주는 어땠는지. 그는 스스로 대답한다. 완벽했노라고. 그는 그 대답에 만족한 채, 낮게 웃는다. 웃음이 젖어들자 그는 외투 안주머니를 뒤져 투명한 봉투를 꺼냈다. 고운 하얀 가루가 담긴 봉투를. 그는 바이올린을 무릎 위에 얹은 채, 가루를 손바닥에 넓게 폈다. 정량보다 많았다. 많은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제가 가진 모든 가루를 다 가져왔다. 그는 그 끝에 남는 것은 덧없는 환상 뿐일 것임을 알려주었던 어떤 의사를 떠올렸다. …이름이 뭐더라. 그저 나뭇잎을 담은 것 같은 녹빛 눈만이 기억났다. 그게 이런 의미였던가. 그는 피식 웃고는, 입을 벌려 가루를 한번에 다 털어넣었다. 아, 또다. 이 지독한 재앙. 열기는 순식간에 시작됐다. 발끝부터 시작된 불꽃은 점점 발의 혈관을 태우고, 아킬레스 건을 지나 다리를 타고 허리를 두르다 심장을 파내는 것 같았다. 그 불길은 견딜 수 없을만큼 뜨거워 그는 아무도 없는 음악당에서 비참하게 비명을 질렀다. 그래, 만약 지옥불이라는 말이 있다면. 여기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것은 지옥이다. 나락이다.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어둠의 구렁텅이였다. 그는 습관처럼 되뇌인다. 이것은 환각이다. 그저 나를 속이려 드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바람이자 소망이었다. 이것이 지독한 현실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외치는 처절한 기도였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닿지 않았다. 스스로 기적을 행하는 죽음의 사도에게 내려 줄 자비로운 구원은 없기 때문에.

 

   대음악당은 고요했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섬세한 유리장식들이 옅게 흔들렸다. 수백 개가 넘는 관객석은 텅 비어 있었다. 그 많던 조명은 다 꺼진 채, 단 하나의 스포트라이트만이 무대 중앙을 비추고 있었다. 

 

   반원모양으로 되어있는 무대의 중앙에는, 불에 그을린 바이올린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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