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살아가는 두 의사(下)
BELOVED/東洋組2021. 1. 15. 21:24사랑하는 누님(@wuon_sodapang)의 작업물.
짧은 밤은 지나고 아침은 왔다. 창 너머로 사붓하게 해가 떠올랐다. 창가가 오렌지빛으로 둘러싸일 무렵 그는 눈을 떴다. 코하쿠가 그에게 손을 뻗은 채로 어색하게 서 있었다. 빛을 등지고 다만 검게만 보이는 그 모습은 마치 동상과도 같아서, 꽤 오래 그러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평소 같았으면 흔들어 깨웠겠지만, 어제의 일 이후 과연 깨워도 되는지 고민했겠지. 먼저 눈을 뜬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할 것이라고 잠드는 순간부터 짐작해왔기에, 하율은 그 무엇도 없이 두서너 시간 만에 짧은 잠에서 벗어났다. 코하쿠는 그와 눈을 마주치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한 번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은 화낼 때가 아니었다. 시간은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세상의 모든 것은 급박하게만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서두르지는 않아도 괜찮았다.
“하율….”
코하쿠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하율이 코하쿠의 머리를 가만 쓰다듬었다.
“괜찮다.”
큰 편이지만 한 사람을 다 덮기에는 작은 손 밑에서, 코하쿠는 그것이 자신을 감싸는 보호막이라도 되는 양손 뒤에서 가만 몸을 웅크렸다. 몇 번, 울음을 진정시키는 소리가 난 뒤에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 둘은 아침 검진이 시작되기 전까지 꽤 오랜 시간 함께 있었다. 사태가 일어난 뒤로 몇 번 겪어보지 못한 순간이었다. 특별한 말이 오가지 않음에도 서로가 있으므로 행복하고 안정되는 순간들. 가끔은 침묵이 어떤 대화보다도 더 깊을 때가 있지 않은가.
분쟁을 애써 덮어 평화를 만들어 낸 하루는 짧았다. 코하쿠는 아침 검진을 나가야 했고, 하율은 일이 있었다. 그는 분명 귀중한 인력이었지만 참사 이후의 세계에서는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는 중요한 노동에 차출되기도 했고, 가끔은 정찰을 나갔으며, 좀비를 맞닥뜨리기도 했다. 특별히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이 세계는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거기다 자신의 몸이 조금 고달픈 것으로 코하쿠가 검진과 치료만을 하고 셸터에 머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 언젠가 셸터를 나갈 일이 생긴다면, 주변을 미리 보아 놓고, 대비할 기회가 있는 것은 오히려 기꺼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검진을 하는 것은 주로 코하쿠의 일이었다. 그것은 셸터 안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의사로서 자신의 몫을 하고 있다는 것을,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면,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코하쿠를 배제하지는 않을 테니까. 코하쿠가 이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힘들어하면서도 주어진 일을 꼬박꼬박 해내고는 했다. 힘든 내색을 숨기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검진을 돌았다. 그는 그것이 코하쿠의 습성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이어진 일에 관성적 믿음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렇기에 늦은 밤 어린아이가 다가와 오늘은 검진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처음 느낀 것은 당황과 걱정이었다.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향했다. 앞장서 나가던 아이는 불안한 것처럼 가끔 그를 흘끗흘끗 바라보았다. 그 눈에 담긴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그는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선생님 오셨네! 그 작은 선생님은 무슨 일 있어?”
사람들이 그를 반갑게 맞았다. 하율은 가볍게 인사해 보이고 검진을 재촉했다. 온종일 노동에 시달린 몸이니, 집중력이 떨어지기 전에 사람들을 확인해야 했다. 사람의 몸을 보는 것은 섬세한 작업이었고, 조금도 허투루 할 수 없었다.
“다른 선생님은 어디 아프신가?”
사람들이 은근히 물어왔다. 그럴 때마다 하율은 개인적인 일이라고 답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거, 뭐 이유가 있겠어? 평소에도 비리비리해서는 죽을상으로 돌아다니는데, 어디 아프던지 그냥 나오기 싫었겠지.”
누군가가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순간 주변 사람들이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싸해진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지,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왜! 딱 쓰러지기 좋기 생겼구만, 저 선생이 데리고 다녀서 그렇지. 이런 세상에서는 저렇게 하면 못 살아남는 거 몰라?”
하율은 부러 물건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한층 싸늘해진 표정이 매서웠다. 탁, 하는 소리에 그가 상황을 파악한 듯 입을 다물었다. 제때를 모르고 함부로 입을 놀린 자의 눈에서는 공포감마저 돌았다.
“코하쿠가 잠시 자리를 채우지 못한 것은 맞으나, 그것은 저와 그 사이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하루 2회 검진을 제공하기로 했고, 그 검진은 제가 대신 채웠습니다마는, 더 문제가 될 게 있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층 차갑게 굳은 분위기 속에서 그는 검진을 서둘러 해나갔다. 집중력 때문이라고 스스로 말했지만, 걱정이 그의 손을 재촉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검진이 끝나고, 간단한 주의사항을 말하고 나서야 그는 돌아 나왔다. 모든 일을 끝마치겠다는 다급함이 사라진 곳을 고뇌가 대신 채웠다. 그는 검진을 쉽게 빠지지 않았다. 피곤과 스트레스를 온전히 감당하더라도 결국은 그 걸음이 사람들을 향했다. 왜 빠졌는지 물어야 할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모른척한다고 지난밤의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고민 끝에 길게만 느껴졌던 복도의 끝이 다가왔다. 하지만 문 뒤에 있는 것은 그가 대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코하쿠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주변을 뱀들이 불안한 듯 돌아다녔다. 수많은 생각이 사라지고 다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쓰러진 사람을 맞닥뜨리는 것은 의사로서 수백 번 접한 일이었는데도 모든 것이 어려웠다. 특별함이 그의 눈을 가리고, 소중함이 그의 손을 무겁게 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코하쿠의 몸을 바로 눕혔다. 가슴팍이 불안하게 오르내리고 있었지만, 그가 잡은 손과 목은 시체처럼 싸늘했다. 그는 이러한 증상을 잘 알았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좀비한테 물린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좀비가 되었고, 여기까지 왔으면 시간이,
그는 조심스럽게 겉옷을 걷어냈다. 희망을 바란 것이 무색하게, 그의 팔은 시체처럼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푸른 핏줄들이 거미줄처럼 여린 팔목 위로 올라와 꿈틀거렸다. 꺼져 갈 듯한 생명과는 전혀 대비되는 핏줄의 힘찬 움직임이 어지러웠다. 더운 여름에도 한사코 긴 옷을 벗지 않으려 들었던 코하쿠의 모습이 계속 겹쳤다. 언제부터?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머릿속의 시계가 터질 것처럼 급박하게 돌아갔다. 하율은 한 번 더 코하쿠의 손을 들어보았다. 손은 힘없이 늘어졌다. 세상 모든 것들이 흐릿하게 보였다가, 회색빛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것들이 가짜 같았다. 아니면 차라리 고약한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꿈은 자기가 가장 불안해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감각들이 주인을 속이고 제멋대로 튀었다. 암흑 속이거나, 차라리 물속 같았다. 절망은 현실적 무게가 있는 것처럼 묵직하게 그를 누르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성은 그를 향해 똑바로 외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코하쿠는 곧 좀비가 될 것이고 어디서도 찾아보지 못하게 되리라. 더는 이름을 불러도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저 밖을 떠도는, 한때는 누군가의 연인이거나 가족이었지만 단순히 괴물이 되어버린 좀비들과 같아지겠지. 사랑도, 기쁨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생명을 해하기 위해서만 달려들 테다. 그러고 나면……. 그는 고개를 흔들며 그 생각을 애써 털어 버리려 했다. 그러나 생각은 타르처럼 진득하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코하쿠는 결국 죽을 것이다. 다른 좀비들과 함께 길거리에 쌓인 시체 더미가 되리라. 그렇게나 소중하고 특별했는데, 그 특별함도, 소중함도 그를 총과 칼에서 지켜주지는 않으리라. 그렇게 되면, 좀비로 떠나보내고 그 몸조차 죽어 쓰러지면, 나는?
순간 닥친 생각에 하율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살아야 했다. 적절히 수면을 취해야 했고, 가능하다면 식사를 최대한 많이 해야 했으며, 바깥을 탐색하고 필요한 물건을 얻어야 했다. 나중에 셸터를 떠나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그래. 살기 위해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종말 이후 그에게 언제나 가장 중요한 명제였지만, 그는 이 명제에 최초로 의문을 가졌다. 굳이 살아야 하나? 혼자서,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남는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는 이 질문들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이러한 질문들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은 코하쿠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살아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아니. 그가 없었더라면 하율 또한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이 변해버렸다고 해도, 함께 있는 시간은 괜찮았으니까. 더 나은 내일을 생각할 때 항상 존재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는 두 사람의 목숨을 쥐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다가올 혼자라는 개념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거웠다. 의사로서,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쉽게 견뎌내겠는가. 잠시나마 의지했던 동료가 죽고, 혹은 저를 죽이려 들고, 약한 자는 가차 없이 버려지고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이 순간을 어떻게 버티겠는가. 연기는 진실이 된다. 코하쿠를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은 양 버텼지만, 최소한 그가 옆에 있는 동안에는 정말로 괜찮았다. 이제 그 모든 게 끝났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오직 마지막을 준비할 짧은 나날뿐이었다.
그 이후로도 하율은 무너지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검진을 돌았고, 검진을 도는 사이에 밖으로 나갔다. 새로운 공간을 찾고 그 안에 물건들을 갖다놓으면서도 한 사람분의 일을 해냈다. 잠은 한숨도 자지 않았다. 가파른 숨을 쉬는 코하쿠를 보면 도저히 그 옆에서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인간의 몸이 견딜 수 있는 행군이 아니었음에도, 하율은 멀쩡하게, 아니. 오히려 꽤나 잘 모든 것들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미래를 포기한 자의 힘이었다. 미래를 대비하고, 삶을 살아갈 에너지를, 하율은 아낌없이 지금에 쏟았다. 기름을 부은 불처럼, 찬란하고 파르라니 떨리는 불꽃이었다.
코하쿠는 꼬박 이틀을 앓고서야 눈을 떴다.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리고, 몇 번을 깜박이던 눈동자가 또렷해지고, 몸을 일으키는 과정이 느릿했다. 그런 코하쿠를 하율이 꼭 안아왔다. 평소보다 힘이 들어간 포옹에 말리려는 듯 팔을 들어 올리던 코하쿠가 멈칫했다. 걸렸구나, 걸리고 말았어. 그가 필사적으로 숨겨 온 일이 허사가 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갓 깨어난 데다 죽어가는 뇌에는 힘겨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가만 손을 들어 하율을 마주 안았다. 그것은 포옹에서 답지 않은 절박함이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 괜찮아.”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말을 꺼낸 코하쿠도, 그것을 듣는 하율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은 진실을 가리기 위해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나 버리고 가지 마.”
하율이 코하쿠를 안은 팔에서 힘을 빼지 않고 중얼거렸다.
“어찌 이런 걸로 널 버리겠나. 그럴 일 없다.”
순식간에 위로하는 자도, 받는 자도 바뀌었다. 하율은 나지막하게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어쩌면 다시 저 눈동자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저 목소리를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각오했던 뒤였기에 지금 이 순간이 마냥 기꺼웠다.
코하쿠가 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하율은 무엇이 미안한 것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괜찮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 어떤 것도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어떠한 거짓은 필요했다. 밤은 종말 이후 그 어떤 날보다도 서글펐고, 가장 고통스러웠으며 동시에 행복했다.
밤은 금방이라도 지나가 버릴 양 굴었다. 소중한 시간은 손에서 모래알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스쳐 지나갔다. 코하쿠는 막 깨어나 비틀거리는 몸으로라도 검진을 나가겠다고 고집부렸다. 어차피 치료는 자기가 하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냐는 투였다.
“안 된다.”
“그렇지만….”
코하쿠는 말을 차마 끝내지 못하고 바닥을 보았다. 저도 억지라는 것은 알았다. 다만, 제가 쓸모없어지는 게 두려웠다. 하율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저를 버리지 않겠다고 했으나, 이런 시대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짐을 데리고 살아나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제가 하율의 짐이 될 수도 있었다. 발목을 붙잡고 하율 또한 죽어버리게 할 수도 있었다. 그건, 안 돼. 코하쿠가 다시 고개를 똑바로 들고 하율을 바라보았다.
“하율.”
“듣고 있다.”
“만약에……. 내가 완전히 변하게 되면, 그냥 버리고 가.”
“안 된다.”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코하쿠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쓸모없을 텐데.”
“쓸모는 누가 정하지?”
하율은 높아지는 언성에 자기도 흠칫 놀랐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대화의 시간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 혼자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 같은 거 데리고 다니다가 네가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잖아.”
평소였으면 제 태도에 먼저 조용해졌을 코하쿠가 물러서지 않은 것이다.
“코하쿠, 너.”
“나는 그거 못 봐. 네가 나 때문에 죽으면 난… 죽어서도 날 저주할 거야. 그래도 좋아?”
“네가 죽었는데 혼자 살아 무엇하라고!”
높은 목소리가 오가고, 침묵이 찾아왔다. 서로의 발언에 놀라고, 서로의 감정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라도 해 보기 위한 시간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한참의 대치 끝에 먼저 백기를 든 것처럼 군 것은 하율이었다.
“코하쿠.”
“내가 죽으면 버리고 갈 거라고 말해. 혼자서라도 살 거라고 약속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듯 애써 똑바로 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하율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자신이 말한 대로 이루어졌음에도 예상외의 반응에 놀란 코하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하율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대신, 그렇게 될 때까지는 나와 함께 있어.”
“그거야…….”
당연하지. 코하쿠는 하려던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채로 어물거렸다.
“그럼, 지금 떠나지. 짐은 전부 다 챙겼다.”
“…어, 뭐?”
연달아 두 번이나 놀란 코하쿠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떠난다고 하면 쉽게 보내주지 않을 거다. 그럴 바에는 지금 나가는 게 나아.”
하율은 비극이 일어날 만약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코하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셸터에서 도망쳤다. 깊고 고요한 밤이었다.
하율이 찾은 거처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미리 준비해놓은 것이 많았기에 두 사람은 종말의 순간에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고, 하율은 코하쿠의 곁을 최대한 떠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얼마 없었다. 셸터를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아침, 코하쿠는 직감적으로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온몸이 죽은 것처럼 삐걱거렸고, 제 옆의 소중한 연인에게서는 인간의 냄새가 느껴졌다. 머리를 멍하게 채우는 안개에 굴복하고 싶었고, 이를 박아넣고 싶었다. 그는 흐릿하게 주변이 겨우 보이는 눈을 들었다.
“거기 있어?”
그는 조금 느리게 코하쿠의 말에 답했다.
“여기 있다.”
“…약속했잖아. 이제 가.”
하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코하쿠는 계속해서 말했다. 뱀들이 불안해하며 주변을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나……. 혼자 있게 해줘. 네가 잠시만 나가 있으면… 내가 알아서 여기를 나갈 테니까, 그러면 다시 와.”
코하쿠의 눈에 하율의 몸이 움직이는 것이 겨우 잡혔다. 아, 떠나려나 보다. 하지만 하율은 오히려 제게 다가왔다.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코하쿠는 이를 박아넣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안 돼, 이러다가는 제가 하율을 공격할지도 몰라.
“가, 제발 가!”
그것은 말이라기보다는 흐느낌이었다. 말끝에서 눈물이 배어 나왔다.
“미안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그가 전혀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 하율은 제가 준비한 것을 꺼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자조가 그를 흔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코하쿠의 입에 제가 준비한 입마개를 맞췄다. 순간 의문이 떠올랐던 코하쿠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그것은 이내 절망이 되었고, 하율은 애써 모른 척했다.
“이러지 마. 하율, 하지 마.”
코하쿠의 팔이 하율의 몸을 마구 밀쳐댔다. 그러나 그는 미안하다며 입마개를 완전히 채웠다. 철컥, 하고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는 좀비가 되어도 괜찮다. 이 상황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는 가벼운 몸을 쉽게 들어 올렸다.
“아니야. 안 돼…….”
코하쿠의 말은 작아져서 거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다른 부분들을 그르륵거리는 숨소리가 대신했다. 하율은 그의 팔다리를 침대 위에 묶었다. 차마 그의 눈동자가 흐려지는 것까지는 볼 수 없었다. 아마도 자신은 크게 잘못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달리 무슨 수가 있겠는가. 세상은 최악과 차악들로 가득했고, 이것마저 원하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코하쿠는 제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제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뱀들이 주인의 몸을 나와 돌아다니다 가만히 머리맡을 지켰다. 그제야 하율은 뱀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였을까. 하율은 쓴웃음을 지었다. 새삼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더 오래 함께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만 있었다면……. 사라진 뱀은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그의 뱀들은 언제나 코하쿠에게 충실했으니, 그 이외에 떠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어떤 비극이 일어나든지 시간만이 무심하게 흘렀다. 하율은 규칙적으로 밖에 나갔고, 음식과 생필품을 구해 돌아갔다. 이따금 다른 생존자들을 만난다면 필요한 물건을 바꿔오거나, 사람을 치료해주고 다른 것을 받아오기도 했다. 다만, 집 안에서는 달랐다.
코하쿠는 어느 순간 완전한 좀비로 바뀌어있었다. 하율이 눈에 보이면 잡아먹기 위해 몸부림을 쳤고, 간혹 조용할 때도 숨소리 이외에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율은 애써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그가 좋아하던 음식을 입에 넣어 주었고, 대답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하루가 끝날 때 하루 동안 겪은 것들을 말했다.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것을 생각해 이불을 덮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 쓴 것은 뱀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뱀들은 하율을 적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공격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들은 하율의 마음을 이해한 것인지, 혹은 이렇게라도 코하쿠를 더 보고 싶었는지 그가 코하쿠를 묶었음에도 조용했다. 다만 한시도 코하쿠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고, 때때로 머리맡에서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럴 때면 그것들이 형체 없는 죽음을 붙잡아두려고 하는 무언가 같았다. 뱀들은 더 이상 코하쿠의 옷 사이에 숨어 있지 않았고, 그에게 접촉하지도 않았지만, 그것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코하쿠를 생각했다. 어쩌면 기나긴 애도의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하율은 생각했다.
다만, 그가 하는 것은 애도가 아니었다. 보낼 수 없었고, 잊을 수도 없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 마음과,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들이 어지럽게 공존했다. 코하쿠는 아직 옆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더는 살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움직이고 숨을 쉬는데, 어떻게 죽었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무너져가고 있었다. 나가는 날보다 코하쿠의 옆에 있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가 하는 말들은 점차 감정적이거나 무의미해졌고, 가끔은 고해 같았다.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진 날도 그의 일상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세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코하쿠 또한 그러하였지만, 다만 내면에서 어떤 것이 한순간 끊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바뀐 기분을 알아차린 것인지 뱀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만 그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선뜻했다. 하율은 조심스럽게 입마개를 풀었다. 여태까지 자기를 속박하던 것이 사라지자 한동안 조용하던 코하쿠가 으르렁거렸다. 당장에라도 그의 목을 물어뜯을 듯했지만, 하율은 한 손으로 그를 묶어두었던 가죽끈을 푸는 것에만 집중했다. 몸이 자유로워지자마자 코하쿠는 그를 물어뜯으려 덤벼들었다. 생리적인 고통에 그의 손끝이 떨렸지만, 하율은 조금도 그를 밀어내지 않고 자유로운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물어뜯는 코하쿠를 다독였다.
“미안하다. 내가 빌 것이 용서밖에 없구나.”
그의 말은 누군가에게 전하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허공으로 보내는 듯한 속삭임이었다. 하율의 손이 가만히 코하쿠의 머리에 가닿았다. 이상하게도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용서하기에 내가 너무 많은 죄를 지었지. 그동안 외로웠을 텐데….”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코하쿠를 꽉 안아 왔다. 그는 다만 하율의 살점과 핏방울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를 물어뜯을 따름이었다. 그는 총을 겨냥했다. 총구가 코하쿠의 뒤통수에 닿았다. 최종적으로 자신을 향할 총구에도, 하율의 마음은 평안하기만 했다.
“다만, 네가 그래도 아직 내게 기꺼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하율은 잠시 숨을 골랐다. 단 한 번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다음 생 모두 네게 죄를 참회하기 위해 쓸 수 있게 해다오.”
탕,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성이 사라진 자리를 섬뜩한 고요가 채웠다. 툭, 두 사람의 시체는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서로를 꼭 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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