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는 키스를 타고
BELOVED/東洋組2021. 1. 19. 18:06코하쿠는 불쾌한 손길에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눈 앞에 백열등이 불안하게 껌벅였다. 내가 이런 방에 살았던가. 책 속에 많이 나온다는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하는 뻔한 클리셰였다. 잠 기운을 떨쳐내기가 유독 힘들었지만 그는 낯선 환경임을 알게 되자마자 눈을 치뜨고 제 몸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다행히 늘상 함께 다니는 네 마리 뱀은 왼팔에, 그리고 오른 다리에 잘 붙어있었다. 그 점이 일단은 조금 안심되었다. 그는 그 후에 주위를 둘러봤다. 방 안은 빛의 색만큼이나 새하얀 정사각형이었고, 있는 거라곤 제가 누워있는 침대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자 바로 보이는 벽에 뭐라고 글이 써진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제 바로 옆에 누워있는 손길의 주인을 눈치채고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제 곁에 낯선 남자가 이 좁은 침대에 함께 누워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낯설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낯설었다. 처음보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기 난처했다. 어딘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똑 닮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이 세상에서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의 색채를 억지로 바꿔놓으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새하얀 머리카락이라든지, 자는 모습이라든지 언뜻 보면 하율과는 영 딴판인 사람이었지만 다부진 체격이라든지 조선의 전통복을 입고 있다든지 꼭 다르다고만은 할 수 없는 어떤 낯익음이 있었다. 코하쿠는 하율이 아니지만 하율인 것을 제 앞에 두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갈무리했다. 제 앞에 있는 것은 어쨌든 단순히 받아들여서 하율을 꼭 닮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 익숙함 때문인지 그는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행동을 했다. 코하쿠는 자고 있는 그를 흔들어 깨웠다.
"…뭐야."
목소리도 하율과 똑같았다. 코하쿠는 상대방이 눈을 부비며 부시시 일어나자 제가 더 놀라 움츠렸다. 상대방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코하쿠의 턱을 멋대로 붙잡곤 이리저리 돌려봤다.
"제리?"
아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엔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낯설었지만 동시에 익숙하기도 했다. 십 수년 간 저를 상징했던 유명 애니메이션의 쥐 이름이었다. 코하쿠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 손에서 빠져나왔다. 상대방은 억지로 붙잡진 않았다. 그는 대신 코하쿠가 고개를 돌린 쪽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어 그를 빤히 쳐다봤다.
"너, 제리가 아니구나."
그 말은 조금 애매했다. 마치 그가 일본인이지만 일본인이 아닌 것과 같았다. 이제 그것은 쓰지 않는 이름이었다. 제리 네스터는 이제 없다고. 코하쿠는 더 눈을 피할 곳이 없어 앉은 채로 뒤로 조금 물러섰다. 이 남자가 불편했다. 제 옛 이름을 알고, 제게 얼굴을 바로 들이미는 것이 그랬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꼭 빼닮은 것이 낯설었다. 그 새파란 눈동자는 하율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짐승의 그것과 비슷한 흉흉한 빛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율의 것이었다. 그는 그 눈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겁이 나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 벽에 붙은 종이가 걸렸다. 노트에서 막 찢어낸 것 같은 종이에 매직으로 아무렇게나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그 내용은 숨 막히는 이 상황처럼 너무 터무니 없어서 비현실 같았다.
키스해야 반대편에 있는 하율과 제리가 나갈 수 있는 방!
영어로 쓰여진 그 말은 문법이며 한자며 전부 다 틀려먹은 어설픈 일본어로도 쓰여 있었다. 일부 글씨 밑에 밑줄이 쳐져있는 것도 똑같았다. 그는 얼어붙은 채 그 종이를 빤히 쳐다봤다. 그가 눈을 떼지 못하고 보자 궁금했는지 상대방도 똑같은 곳을 쳐다봤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하율과 제리…? 하율은 난데."
"하, 한자는……."
"물 하(河)에 빛날 율(燏)."
코하쿠는 그때 직감적으로 이 남자가 말하는 제리가 자신이 아님을 알았다. 그보다는 저 반대편에 그가 찾는 제리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제리는 제 옆에 있는 이 남자가 하율과 닮았듯 저와 꼭 닮았을 것이다. 제가 찾는 하율은 당연히 저와 닮은 평행우주인과 함께 저 반대편에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갈 수 있게 하려면 여기서… 그는 싫은 생각에 고개를 푹 숙였다. 낯선 사람과 한 자리에 같이 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그가 아무리 하율과 닮았다 한들 방금 처음 만난 사람과 키스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율은 코하쿠에게서 물러나더니, 침대에서 걸어 나와 하나 있는 방 문을 돌렸다. 문은 긴장감 없이 휭 열렸다.
"이 방 문은 열리는데."
그때 두번째 싫은 예감이 들었다.
한편, 반대편도 상황은 똑같았다. 똑같았다기보단 훨씬 안 좋았다. 하율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그는 허리 쯤에 사람 하나 분의 무게를 느끼곤 뜨기 힘든 눈을 억지로 떴다. 그는 잠에서 깬 것 보다도 심한 몽롱함과 어지러움을 느꼈다. 마취에서 깨면 딱 이런 기분이라지. 그래서 그는 처음에 제 허리에 올라탄 사람이 코하쿠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음 순간에 그는 착각에서 깨어났다. 너른 바다의 깊은 심해처럼 빛나는 파란색 눈동자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빨려들어갈 정도로 아름다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저 그뿐이었다.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코하쿠를 닮은 그것은 놀랐는지 조금 고개를 뒤로 물렀지만 떨어지지 않고 하율과 마주봤다. 아니,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도발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안녕, 하율(河燏)."
"자는 사람 위에 올라타는 건 어느 나라 예의지?"
"우리가 예의 차릴 사이니? 나라고 아무한테나 그러는 건 아니야. 그냥 이 상황을 즐기는 게 어때?"
난 그 아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제리는 그렇게 말하며 요망하게 웃었다. 확실히, 언뜻 보면 착각할 정도로 비슷하게 생기긴 했다. 한쪽만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에,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몸에 기어다니는 검은 뱀들. 다른 것이 있다면 시큰거릴 정도로 파랗게 타오르는 눈, 그리고 땋은 머리가 반대쪽이라는 것 뿐이었다. 와이셔츠 위에 스웨터를 입고 있었으니, 옷 외에 그 둘을 겉모습으로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이 전부인 것 같았다.
"이름도 모르는 사이인데."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가? 어차피 너도 내 이름 알고 있잖아?"
"…네 이름도 코하쿠인가?"
"코하쿠(琥珀)?"
상투를 풀던 손이 멈췄다. 제 이름은 제리였지 코하쿠가 아니었다. 일본에서나 입는 옷을 입고 있던데,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꾼건가? 절로 표정이 구겨졌다. 나를 똑 닮은 사람이 제 이름을 버리고 같잖은 이름을 붙이다니. 그는 풀린 머리를 뒤로 넘겨주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콱 쥐곤 아래로 잡아당겼다. 능구렁이 같은 성격은 영 딴판인 것 같은데 제법 손길이 억센 것을 보아 성질도 더러운 모양이었다. 절로 고개가 뒤로 젖혀지자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파란색 눈이 보였다. 그 표정은 아까의 미소를 잃고 짜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내 이름은 제리야. 제리 네스터(Jerry Nester). 그딴 하찮은 이름이 아니라고."
"성질이 어지간히 더럽군 그래. 놓고 얘기하지."
"싫은데? 너, 지금 상황을 알고나 있는거야?"
상황은 무슨 상황. 제리는 하율의 눈앞에 찢어진 종이를 턱 들이밀었다. 연습장을 막 뜯은 것처럼 어설프게 찢어진 종이 위에 두꺼운 글씨로 반대편 방에 써진 글과 같은 글이 영어, 그리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쓰여 있었다. 언뜻 보면 한글 같기도 했는데 형태가 너무 이상해서 확신할 수 없었다.
"…반대편에 코하쿠가 있는건가?"
"하… 그 같잖은 짜가의 이름이 코하쿠라면 맞아."
하율은 눈을 매섭게 치켜 뜨고 제 머리카락을 휘두르고 있는 제리의 손을 쳐냈다. 감히 그를 더러 가짜라고 칭하는 것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그는 역으로 제리의 어깨를 거세게 눌러 침대 반대쪽에 눕혔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제리는 예상치 못한 기습에 눈을 크게 떴다가도 곧 얄밉게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요망하게 웃는 입술에선 코하쿠와 똑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뭐야. 할 마음 만만이잖아."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만."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열린 방 문으로 더운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제리는 다른 곳을 보는 하율을 아래로 당겨 이마를 맞대고 혀를 내밀어 상대방의 입술 위를 핥았다. 다음에 나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얄궂은 키스였다.
코하쿠는 밍기적거리며 침대에서 나왔다. 왜 이렇게 굼뜨냐는 직설을 듣긴 했지만 그렇다고 축축 처지는 발걸음이 빨라지진 않았다. 문이 열렸다는 그 사실이 증명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한껏 우울한 표정을 짓고 상대방의 눈치를 슬쩍 슬쩍 살피며 그의 곁으로 따라갔다. 따라갔다고 해도 몇 걸음 가지 않았으며 약간 떨어져서 섰다. 그는 종이를 다시 읽더니 물었다.
"그래서. 키스 할거야?"
"……."
난 하고 싶은데. 그는 덧붙여 덤덤하게 밝혔다.
"미운 백조 같은 녀석이긴 해도 천 년 만 년 거기 가둬놓고 싶진 않거든. 뭐, 키스 같은 건 늘상 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 성깔에 너랑 한다고 해도 별로 신경쓰지도 않을 것 같고. 코하쿠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열려 있는 문이 확실히 증명하는 것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하율은 우물쭈물하는 코하쿠를 가만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착각한 것이 무안할 정도로 그가 알고 있는 제리와는 영 딴판이었다. 결정하지 못해 머뭇거리는 것도, 조심스럽고 얌전한 것도,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사람을 구분짓는 것은 역시 겉모습이나 이름 같은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단 좀 더 본질적인 뭔가가 중요했다. 그들을 그들이게 만드는 것들. 싫진 않았지만, 그래도 익숙한 그 녀석이 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분명 저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건너편 방에 함께 있을 그 남자가 저와 같다면 이 모든 것을 사랑한 것이겠지. 가능하다면 결심이 설 때까지 기다려주고 싶었지만 이쪽도 걱정되고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율은 한숨을 한 번, 그리고 앞서 나가기를 두 번 하여 시선을 바닥에 처박고 있는 코하쿠의 한쪽 뺨을 감싸 고개를 들게 했다. 살이 맞닿는 거리에서 그는 새처럼 가볍게 키스했다.
"멋대로 해서 미안. 그런데, 어쨌든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나중에 저 너머에 내가 물어보면 억지로 당했다고 해."
그는 긴장감 없는 키스 후에 달래듯 코하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곤 종이를 어딘가에 휙 던져놓곤 먼저 문 밖으로 나갔다. 코하쿠는 그가 저를 등지자마자 늘어진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찝찝한 배덕감이 천과 닿은 입술에서 느껴졌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키스 따위를 해서라기보단, 저만한 결단력이 없는 자신에 대한 실망에 가까웠다. 코하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하율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꼭 맞춰 준비한 것처럼 문 밖으로 나가자 어두운 일자 통로가 쭉 펼쳐졌고, 멀지 않은 반대편 벽에 방문이 하나 나있었다. 종이에 써져있는 게 정말이었는지 문은 열린 채였고, 그 속에서 나오는 강한 백열등의 빛이 바깥 통로까지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코하쿠가 다 도착하기도 전에 하율은 제리를 부르며 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코하쿠도 그 속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확인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모른 척 할 순 없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단 오히려 보고싶은 쪽에 가까웠다. 이 불안이 실제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그 안에 뒤엉켜 있는 하율과 제리는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나았을 진실이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지금'은' 그랬다.
"코하쿠?"
"그 이름이 아니라니까? 몇 번 말해야 알겠어, 자기야."
"너 보고 한 말일리가 없지 않나? 이 뱀 치우고 여기서 비켜."
"제리… 지금 뭐 하는거야."
"넌 빠져!"
제리는 이세계의 하율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더니 뒤따라 온 코하쿠를 보더니 슬쩍 미소지었다. 그는 상대방에게 들이밀고 있던 구렁이를 옆으로 내팽겨치곤 하율에게 찰딱 달라붙었다. 그는 하율에게 끈적하게 달라붙어 고름이 풀린 두루마기 사이로 손을 넣고 놀리듯 혀를 쏙 내밀었다.
"행동이 느리네, 코하쿠. 얜 이미 내가 먹었어."
하율은 결국 참지 못하고 제리를 거세게 밀어 떨어뜨렸다. 밀려난 제리는 그대로 침대에서 떨어져 바닥을 데굴 굴렀다. 씨발, 저게 진짜! 곱상한 얼굴과 안 어울리는 거친 욕이 튀어나왔다. 말하는 것을 보니 이미 서로 한 대 씩은 주고받은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도 그랬다. 그들은 제리의 키스 직후에 엎치락 뒤치락 싸우며 침대를 굴러다녔다. 코하쿠는 이 모든 혼란 뒤에 가만 서 있다 작게 중얼거렸다.
"하율… 그 옷은 뭐야."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오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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