欲
BELOVED/東洋組2021. 1. 15. 20:44세상엔 확실히 이성으로 이해하기 힘든 난제가 있었다. 세상을 배운대로만 볼 수 있는 코하쿠에겐 더 그랬다. 제 삶을 이어가는 것조차 버거운 그에게 남을 헤아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타인의 속을 들여다보고,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음침한 속내에 괴로워지느니 차라리 외면하는 것이 좋았다. 사실 그렇게까지 남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전까진 그랬다. 그의 주변엔 남이랄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것은 제 삶에 딱 하나 생긴 소중한 타인의 모든 걸 알고 싶은 유치한 욕망(欲)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다음 날 모른 척 잊어버렸다며 능청을 떨고 싶었다. 없는 일로 만들고 싶은 괘씸한 충동이 자꾸만 들었다. 그래도 한 번 입 밖에 낸 말을 그렇게 쉽게 주워담을 순 없었다. 담기엔 이미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것에 가까웠다. 이것이 어른으로 짊어져야하는 책임 중 하나라면 그는 차라리 평생 어린아이이길 원했다. 그는 잠시 외출한 연인을 기다리며 소파 쿠션에 가만 몸을 기대었다. 이대로 자는 척 하면 시간이 저를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상상을 했다. 괜스레 속편한 쿠션이 원망스러워 그는 품 안에 안은 사각쿠션을 꾹 눌렀다. 곧 다가올 고통을 알기라도 하듯 막연한 공포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것은 명백하게 불쾌한 기분이었다. 기대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웠다. 주인의 속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등에 빙글 도는 검은 비늘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길래 내가 거절하라고 했잖아. 오히려 한 줄 뱀이 저보다 사람을 더 잘 알았다. 리리는 주인의 등을 기어올라 목전에 얼굴을 빠꼼 내밀곤 혀를 길게 내뺐다. 네가 싫다는데 어쩌겠어. 걔도 이해해 줄거야. 코하쿠는 새우 마냥 몸을 둥글게 말고 소파에 파묻힌 채 고개를 내저었다. 고집이었다. 목에 칼이 닿았는데도 어리석게 자존심을 세우는 것과 비슷했다. 목에 닿은 서늘한 혓바닥이 마치 곧 저를 차갑게 살라버릴 칼날 같다고 생각했다. 코하쿠는 손가락으로 리리의 머리를 꾹 눌러 치웠다. 역시 물어 죽여버릴걸. 퉁명스러운 불만이 뱀의 배에서 튀어나왔다. 코하쿠는 그가 오히려 저보다 세상을 잘 살아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뱀인 게 나을 것 같아……. 그들이 그런 마음에도 없는 저급한 자기비하를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그들은 벌써 십 수년을 함께 해 온 사이거늘. 하지만 동시에 그랬기에 그런 값싼 자기혐오를 그들에게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입 밖에 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과 다르게 말이 필요 없는 그들은 오히려 훨씬 노골적이고 더러운 감정을 속속들이 알아차렸다. 결국 이곳저곳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제리, 그런 말 하지 말자고 했잖아. 지금 뭐라고? 또 그러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코하쿠는 터져나오는 비난에 품에 끌어안은 쿠션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는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으므로 철문 너머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발소리가 점점 이쪽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치솟듯 빨리 뛰는 주인의 심박을 들은 것인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동시 다발적이라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듣기 힘들 정도였다. 제리… 마음은 알겠지만 힘들다고 하자. 넌 감당 못할 거고 또 혼자 울거잖아. 쟤가 그런 걸 바랄 것 같아? 그냥 말하라니까?
그런 성적 취향은 못 받아주겠다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집에 들어올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기에 누가 들어왔는진 말할 것도 없었다. 코하쿠는 천천히 쿠션에 묻은 고개를 들었다. 하얀색 쿠션에 조그만 회색 얼룩이 남은 게 보였다. 그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현관을 바라보았다. 하율은 양 손 가득 짐을 들곤 신발에서 발을 빼고 있었다. 하나는 대형마트 로고가 붙은 하얀 봉투였고, 하나는 아무것도 없는 검은 종이가방이었다. 그는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이었기에 봉투를 잠시 내려놓고 현관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신발들을 수납장에 잘 정리해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율은 한가득 사온 짐을 식탁 위에 놓고 주방에서 소파에 쿠션을 꼭 끌어안고 앉은 코하쿠를 내다보았다. 미묘하게 목소리가 평소보다 떠있는 것이 느껴졌다.
“저녁은.”
“…안 먹었는데.”
“안다. 뭐 먹고 싶냐고.”
“아, 아무거나…….”
반대로 이쪽에선 어영부영 얼버무리는 얼빠진 목소리가 나왔다. 저녁 메뉴를 묻는 것은 제법 오랜만이었다. 물어본들 항상 아무거나 해달라고 하니 더이상 묻지 않게 된 것인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는 뭐가 먹고 싶냐 물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뱀들의 목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체념한 듯 한숨 쉬는 소리만이 들렸다. 어차피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 ‘싫다’는 말은 없다는 것을. 코하쿠는 눈물 젖은 쿠션을 소파에 내버려두고 일어나 주방에 들어갔다. 풀 죽은 강아지 마냥 눈치를 살피더니 마트에서 장 봐온 것을 꺼내 정리하는 하율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응석부리듯 그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조금 후면 없어질 그 다정함이 급했다. 하율은 아는지 마는지 계란판에서 계란을 계속 꺼내며 짧게 물었다.
“왜.”
“그냥…….”
코하쿠는 그의 등에 말 없이 얼굴을 부볐다. 핀잔 하나 없이 응석을 받아주는 것이 오히려 낯설었다. 그는 조금 후에 벌어질 더 낯선 일이 두려워 저도 모르게 눈물을 삼켰다. 어차피 상관 없겠지. 넌 모를테니까. 그렇지?
…나의 도미넌트.
어쨌든 그날 밤이 코하쿠에게 악몽처럼 남을 것은 확실했다. 그에게 좋지 않게 남은 기억들은 으레 두고두고 그를 영원히 따라다닐 참혹한 저주가 되어 그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그 밤도 그럴 것이 분명했다. 이 경우엔 저주보다는 족쇄에 가까웠다. 그쪽이 훨씬 어울렸다. 어느쪽이든 결국 그를 속박하고 목 죌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했던 결심은 가늘었고 의지는 박약했다. 그래도 그 악몽을 참고 견딜 수 있게 한 까닭은 참 간단했다. 정답만 있었지 해설은 없어 난해했다. 그래도 이보다 더 간단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저 제 주인이 그러길 바라서였다. 그 이름이 하율이라서였다.
제가 그를 사랑해서였다.
그가 서브미시브를 자처한 것은 결국 그 뿐이었다. 거기에 그것이 기분 좋아서, 즐거워서, 기뻐서, 좋아서, 행복해서 라는 이유는 없었다. 일말의 호기심 조차도 없었다. 피학은 아플 뿐이고 낯선 호칭과 경어는 어색했다. 관계에 우위가 생기는 것은 거북했고 제 몸을 스스로 통제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상대방이 거칠게 굴고 저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무섭고 두려울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말로 듣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의 괴리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막연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가 저지른 죄였고 남은 것은 그 죄에 마땅한 형벌을 받는 것 뿐이었다.
코하쿠는 답지 않게 샤워를 질질 끌었다. 딱히 할 것도 없는데 멍하니 따듯한 물을 맞으며 앉아 있었다. 물이 싫다는 뱀들을 억지로 데리고 와 수건 위에 멀리 두었다. 떨어져 있으면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그냥 그것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그래도 계속 그러고 앉아있을 순 없기에 그는 느릿느릿 수도를 잠그고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었다. 머리에 물기가 있든 없든 별로 상관없었지만 같잖은 핑계를 댔다. 그것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끌고 싶은 얄팍한 마음이라는 것은 모른 척 했다. 주인 몸에 물기가 털어지자 뱀들은 하나 둘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달라붙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그렇듯 그 거친 어투는 리리였다. 그만두려면 지금 밖에 없어. 그깟 거 안 하게 해준다고 못 살게 굴면 물어 죽여 줄테니까 역시 그만 두자. 코하쿠는 바깥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말랬잖아…….”
그럼 어떡하라고? 쟤가 사온 걸 네가 보기나 했어? 기절 하기 전에 내가 도와주는거야. 코하쿠는 더 듣기 싫다는 듯 선반에 개어 둔 옷을 꺼내 입었다. 어떤 게 누구 옷인지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니 꺼낸 것이었다. 그는 품에 맞지 않는 긴 와이셔츠를 꺼내 입었다. 목단추 정도는 열린 채 남겨두고, 밤색 니트 가디건을 그 위에 걸쳤다. 이것도 제 옷은 아니었다. 거의 제 것처럼 되긴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제 옷은 아니었다. 다 털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떨어져 차가웠다. 그는 죽죽 늘어지는 발걸음을 억지로 끌어 방문 앞으로 갔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욕실에서부터 하율의 방까지 물방울이 길을 이뤘다. 이 썩은 과자집에서 나왔을 즈음엔 말라 없어질 길이었다. 그는 문을 열기 전에 제가 남긴 물길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봤다. 무엇이 불쌍한지 알 수 없었다. 사라질 물이 불쌍한지, 졸지에 물을 맞은 바닥이 불쌍한지, 아니면……. 답을 내리기 싫은 문제에 그는 슬래시를 긋고 문 손잡이를 잡았다.
코하쿠는 느릿느릿 지옥문을 열고 틈새로 안을 살짝 쳐다봤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하율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침대 위엔 살아 생전 본 적 없는 것들이 굴러다녔다. 쭈뼛대며 문을 천천히 열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코하쿠를 바라봤다. 정갈하게 정리 된 침대 위에 즐비한 검은 구속구보다도 그 표정이 낯설었다. 입술로 떨어지는 말들은 더욱 차갑게 떨어졌다.
“어느 종(從)이 이렇게 주인을 기다리게 하지?”
그것은 합의된 약속이었고 문을 열었으니 그는 그것에 거스를 수 없었다. 코하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잘못을 빌었다. 그것은 부끄럽다거나, 마지못해서가 아니었다. 그 방에 들어간 순간부터 그는 하율의 것이었고 하율은 그를 지배하는 주(主)였다. 그것은 하룻밤의 유흥 그 이상이었다. 코하쿠는 문 앞에 얼어붙은 채 땅바닥을 보며 손을 꼼질거렸다. 그 모습이 썩 만족스러웠다. 우물쭈물 거리는 태도 라든지, 제 것 뿐인 옷차림 이라든지 마음에 드는 것이 꼭 한가지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역시 다른 것보다도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의도해서 지은 표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겁에 질려 오갈 데 없이 데룩 굴러다니는 눈동자 라든지, 파르르 떨리는 입술 같은 것은 감히 제 주인을 마주 볼 수도 없는 명백한 피지배자의 표정이었다.
하율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전부 침대 구석으로 밀어 치운 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문 근처에 선 코하쿠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짧게 명령했다.
“무릎 꿇어.”
멍청하게 문 앞에 서서 바닥을 쳐다보고 있던 그는 하율이 제게 날선 눈길을 주자 좁은 보폭으로 와다닥 달려가 넘어지듯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그가 배운 세상의 지식으론 이해하기 힘들고 해설할 수 없는 상황에 코하쿠는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시선을 바닥에 처박은 채 바들바들 떨었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그는 시트의 주름 개수를 셌다. 자꾸만 셌던 것을 잊어 하나로 돌아가기만을 반복했다. 하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쪽 뺨을 붙잡고 들었다. 밀밭의 눈동자가 그림자 아래 서늘하게 번득였다. 그 눈은 짐승의 그것과도 같이 저를 가만 내려다봤다. 마치 시선을 돌리는 것조차 용서하지 않을 것처럼 말 없이 저를 응시했다. 그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각인이라고. 서로의 관계, 서로의 우위, 서로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것과도 같았다. 그저 바라보는 것 뿐인데도 위에서 아래로 뻗은 그 시선엔 그런 힘이 있었다. 그는 무심결에 평소처럼 두려운 것에서 눈을 돌렸다. 시선이 제멋대로 옆으로 튀었다. 하율은 제게서 시선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젖은 머리칼을 콱 쥐었다. 표정이 절로 구겨지고 입에선 삼키지 못한 고통이 흘렀다.
“아…….”
“마음에 안 드는군. 한참 기다리게 하고, 말도 못 알아 듣고, 허락도 없이 내게서 눈을 돌리고.”
네 입장을 확실히 가르쳐야겠어. 하율은 머리카락을 쥔 채 코하쿠를 일으켜 침대에 내던졌다. 예상은 했지만 맥아리 없는 몸은 딱히 힘을 주지 않더라도 손쉽게 침대 위를 굴러다녔다. 그는 밀어치운 것 중 얇은 구속구를 하나 들었다. 고민 끝에 가장 부드럽고 약한 것으로 사왔지만 그것이 코하쿠에게도 그럴진 알 수 없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바들거리는 제 것의 양 손목을 잡아채 등 뒤로 가져오곤 도구를 채웠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에 채운 검은 족쇄가 썩 어울렸다. 코하쿠는 저도 모르게 구긴 표정을 숨기려 고개를 돌렸다. 자유를 잃은 두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가만 보던 하율은 그의 머리를 침대에 거칠게 처박아 엎드리게 했다. 그래… 어떻게 할까. 반쯤 벗겨진 밤색 가디건과 올라간 와이셔츠 사이로 치부가 훤히 보였다. 그는 드러난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때렸다. 그것이 암묵적인 명령임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움찔 떨던 코하쿠는 엎드린 채로 하체를 살짝 들었다. 그는 그 자세가 사람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 자세 유지하도록.”
그래도 제게 떨어진 명령을 어길 수 없어 그는 시트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그저 시간이 자신을 해방 시켜주길 기다렸다. 벌써부터 어깨가 비틀리고 묶인 손목이 아팠다. 꼼지락 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아 그는 무심결에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운이 좋았는지 근처에 폭신한 베개가 있어 그는 그 속에 눈물을 숨겼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릴까 겁났다. 하율은 엎드린 그에게 바짝 붙어 그가 입은 자신의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물리적인 무게로 깔아 누른 것은 아니었지만 제게 깔린 묵직한 위압감은 그 이상이었다. 코하쿠는 그 허상의 무게에 짓눌려 바들바들 떨다 결국 자세를 흐트러뜨렸다. 하율은 드러난 목 주위를 잘근거리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왼손으로 엉덩이를 내리쳤다.
“코하쿠. 자세.”
이번 건 아플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끌어 안은 몸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터졌다.
“윽……!”
“다시 무너지면 다섯 대 더 얹을거다.”
그는 으름장을 놓고 목덜미를 진득하게 물고있다 제 손 끝에 감겨오는 차가운 감촉을 느꼈다. 제 손보다도 더 차가운 날 것의 짐승이었다. 저와 똑닮은 금빛 눈을 어둑한 그림자에서 빛내며 그 위협적인 독니를 처음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하. 확실히 이름이 리리였던가. 그는 차갑게 웃었다. 한낱 뱀이었지만 그가 인간과 비슷한 지능을 가지고 특히 코하쿠와는 말 없이도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뱀들이라면 이 웃음의 의미를 알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코하쿠의 목에 뱀이 감긴 손을 갖다대고 엄지와 검지에 힘을 줘 목을 짓눌렀다. 질식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충분히 숨이 모자랄 정도의 압박과 통증이었다.
“방해되는군.”
치워주면 좋겠는데, 라는 말까진 아껴두었다. 그가 십 수 년간 함께 지내왔던 뱀과 떨어지면 심하게 불안해하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약속한 것과는 별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급했는지, 아니면 제정신을 갈무리 하기 힘들었는지 가쁜 호흡 사이로 다급하게 말했다.
“떨어져… 리, 리. 루루도… 전, 부.”
옷 틈새에서 세 마리 뱀들이 삐져나와 방의 구석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그의 손에 감겨 있던 마지막 뱀도 결국은 마찬가지였다. 문득 그는 그 뱀들이 코하쿠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파서 신음하면서도 지배하는 이의 말을 가만 들을 수 밖에 없는 순종적인 태도가 바로 그랬다. 하율은 그가 목숨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그의 오랜 벗들을 제가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틀린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쏜살같이 몸을 타고 내려가 열린 문 틈으로 사라지는 뱀들을 보며 웃었다. 명백한 포식자의 냉소였다.
방해꾼이 사라지자 하율은 종이 가방에서 루브리컨트를 꺼냈다. 목을 죄는 손길이 사라지자 코하쿠의 머리는 지탱하는 힘 없이 그대로 침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순간 폐에 산소가 가득 들어오자 오히려 숨 막혔다. 밭은 숨을 뱉으며 코하쿠는 파르르 떨었다. 이젠 정말 혼자였다. 자신이 뱀 없이 혼자 이곳에 갇혀있다고 생각하자 참기 힘든 두려움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수치심 이전에 그는 견디기 힘든 공포와 통증을 오롯이 혼자 견뎌야했다. 십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몸에서 한 번도 떼어내지 않았던 뱀들이 한꺼번에 사라지자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젠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더럽고, 치사하고, 유치하고, 괴롭고, 혐오스럽고, 나약한 감정을 알아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하율도 그 점을 넘겨 짐작 했지만, 그가 스스로 입 밖에 낸 것이니 별 말 않고 손에 진득한 젤을 가득 묻혔다. 처음이니 필시 아플 것이고, 그 아픔은 지금 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리고 구태여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그를 괴롭힐 방법은 차고 넘쳤다. 예를 들면 바로 이렇게.
“똑바로 하라고 했을텐데. 주인 말이 말 같지 않나?”
딱히 문제 될 건 없었지만 그는 괜스레 손을 적시며 쏘아붙였다. 그 말에 바짝 긴장해 하체를 높이 들고 있는 모습이 못 견디게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심장 아래에서부터 무섭게 끓어오르는 욕망(欲)을 느꼈다. 새하얀 도화지를 가만 두지 못해 먹칠을 하는 사람처럼 그는 제 앞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가여운 아랫것을 멋대로 더럽히고 싶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한 것 같은 저 몸에 제 흔적을 가득 남기고 싶었다. 될 수 있다면 저만이 볼 수 있는 곳에 이 기이한 관계를 상징하는 낙인을 달고 싶었다. 목이 쉬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눈물이 말라 더 울지 못할 때까지 울리고 싶었다. 제 아래 무릎 꿇고 굴종하는 순종적인 반려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그는 붉게 열이 오른 체벌의 흔적을 차가운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는 열 위에 얹은 냉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움츠리던 코하쿠는 결국 다시 무너졌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쓰린 체벌에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꽉 물었다. 무엇을 참는지 안간힘을 쓰는 얼굴을 보고 하율은 인상을 구기며 명령을 어긴 건방진 종에게 걸맞는 벌을 내렸다.
“소리.”
“흐으… 윽.”
그는 기어코 눈에서 뚝 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저 눈물이 보고 싶었다. 고통에 푹 젖은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하율은 어느새 제 손에도 벌겋게 열이 오른 것을 보고 다시 명령했다.
“똑바로 서.”
코하쿠는 후들거리는 몸을 기어코 다시 일으켰다. 생각하는 것 따윈 이미 그만뒀다. 이 밤이 지나고 해가 자신을 구원하기를 간절히 빌 뿐이었다. 점점 전신의 감각이 무뎌지는 게 느껴졌다. 그저 맞은 곳에서 지독하게 아리고 쓰린 통증이 느껴졌다. 하율은 코하쿠가 비틀비틀 다시 자세를 잡자 망설임없이 진득한 젤이 흐르는 검지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아, 흑……!”
예고 없이 넣어서인지, 아니면 아파서인지, 손에 묻은 젤 때문인지, 이질감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쾌락 때문인지 상대방이 숨을 멈추고 긴장으로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노골적인 압박감이 그랬다.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딱히 그만 둘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 상황을 좀 더 즐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가 못 견딜 정도로 거세게 몰아붙여서 무너뜨리고 싶은 지독한 욕망이 더 컸다. 그는 손가락을 더 깊게 밀어넣으며 짧게 말했다.
“힘 빼.”
말을 듣기라도 하는 것인지 조금은 힘이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쉬기 힘든 숨을 억지로 뱉으며 침대 위를 고통스럽게 허덕였다. 뭔갈 붙잡기라도 하고 싶은데 등 뒤로 묶인 팔이 이제는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팠다. 눈에선 생리적인 눈물이 자꾸만 쏟아졌다. 입에선 막을 수 없이 고통에 찬 신음이 자꾸만 터졌다. 그 사이로 사전에 약속했던 말이 자꾸 섞여 나오려 했다. 하율은 힘이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두번째 손가락을 밀어넣어 멋대로 속을 들쑤셨다. 엉덩이골 사이로 손에 묻은 윤활젤이 흐른 모습이 심히 음란했다. 손가락을 움직일 적 마다 찔걱이는 소리가 달뜬 신음 위에 겹쳤다. 가여운 종은 마침내 제 본분을 잊고 울며 헐떡였다. 그때 코하쿠는 그가 바랐던대로 완전히 무너졌다.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코하쿠는 그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하율은 섹스가 끝나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원래의 그로 돌아왔다. 원래의 그, 라는 표현은 약간 부적절했다. 아침의 하율도, 오후의 하율도, 밤의 하율도 결국은 그였으니. 오히려 이전보다 좀 더 상냥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시간이 늦고 어느정도 만족한 뒤에 오랜 속박을 풀었다. 그때서야 코하쿠는 제가 악몽보다도 더 심한 현실에서 깨어났음을 알았다. 그는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로 쓰러졌고, 오래 구속되었던 팔은 되찾은 자유가 어색한지 멋대로 삐걱였다. 하율은 그의 이름을 몇 번 부르더니, 다정한 손길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흔들어 깨웠다. 코하쿠는 어렵사리 눈을 떴지만 눈을 뜬들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너무도 지쳤고 온 몸이 저리고 아팠다. 어깨는 마비된 것 마냥 감각을 잃고 팔은 멋대로 중력에 휘둘렸다. 손목엔 구속구가 남긴 벌건 자국이, 수 십 번 맞은 엉덩이엔 새빨간 손자국이 흉하게 남았다. 다리라고 멀쩡히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몸을 일으켜 앉는 것조차 괴로워 코하쿠는 그저 제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기운 없이 뺨을 부벼댔다. 그 손길에서야 그는 제가 알던 하율이 곁에 있음을 알았다. 하율은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대로 안아 올렸다. 아무리 지쳐도 뒷정리는 해야했다. 코하쿠는 저를 쉬게 두지 않는 그가 원망스러웠지만 밤새 목이 쉬도록 울어 더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저 가만히 하율의 가슴에 얼굴을 톡 기댔다. 무어라 말하기에도 지친 밤이었다. 그는 하율이 저를 다 씻길 때까지 꺼져가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고 멍하니 초점 잃은 시선을 아무데나 뒀다. 눈만 기능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몸을 이루는 모든 것이 제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 그저 물이 닿는 모든 곳이 미치도록 아렸다. 하율은 속에 남은 정사의 흔적을 긁어내며 그의 이름을 몇 번 불렀다.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지만 그는 지나간 밤과 다르게 너그럽게 용서했다.
샤워가 끝나자 하율은 그가 가장 편하게 느낄 하얀색 후드티를 입히고, 그 위에 그가 가장 좋아하던 제 가디건을 걸쳐주었다. 그가 서 있길 힘들어 해 욕실에서 방까지 안아 옮기고 머리까지 정성껏 말려준 후에 어수선한 하율의 침대 대신 그의 방 침대에 눕혔다. 기다렸다는 듯 네 마리의 뱀들이 빠르게 기어 옷 사이로 사라졌다. 그마저도 아픈지 그는 쉰 목소리로 신음했다. 작은 날짐승의 금빛 눈과 마주친 하율은 알아 들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에게 짧게 사과했다.
“아깐 미안했다.”
주인을 닮은 뱀은 신경질적으로 캬악 거리더니 그대로 옷 안으로 사라졌다. 하율은 누워서 쏟아지는 졸음에 눈을 느릿느릿 껌벅이는 코하쿠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췄다. 그는 숨이 닿는 거리에서 그의 흐리멍텅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괜찮나? 난 좋았다만,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아서. 네가 힘들다면 언제든…”
“……괜찮… 아.”
그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끄집어 대답했다. 그만둬도 괜찮단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럼 온 밤을 눈물로 새우며 제 몸을 버린 것이 한순간에 헛되게 될 게 뻔했다. 그만둔다는 선택지가 있었다는 걸 그는 모른 척 하고 싶었다. 그런 선택진 처음부터 없었다. 모든 것은 저 놀란 듯한 표정 뒤에 확실하게 올 옅은 미소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했다.
“…기분 좋, 았… 어.”
“…그래, 다행이군. 외출하고 올테니 푹 쉬어라.”
가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더 나오지 못했다. 코하쿠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모든 걸 체념한 채 눈을 감았다. 무슨 말을 하기엔 오늘 밤은 너무도 고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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