結
COMMISSION2021. 1. 15. 20:55온 동네가 소란이었다. 황실로 이어지는 광장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밭에 물 주는 일도 마다하고 달려나온 농부, 장을 본 짐을 무겁게 들고 오는 과부와 지팡이를 짚으며 느릿느릿 걷는 노파, 미치광이 노숙자, 과거의 영광을 가슴에 단 퇴직군인과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광대, 사람들에게 신의 뜻을 설파하는 목사와 구석진 자리에서 허가받지 않은 가판대를 세운 장사꾼까지. 철없는 아이들은 장사꾼의 외침에 꾀여 과부의 손을 놓고 뛰어갔다. 광장 옆으로 이어진 탁 트인 공원에도 보기 드문 인파였다. 서로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부인들이 모여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오늘 서로를 처음 만났을 것이고, 분명 하는 일도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서로 끊임없이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묶어내는 공통된 주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나토스는 공원의 입구에 서 유독 북적이는 중앙광장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황실의 충직한 신하들은 무례한 삿대질과 함께 반역자의 후손을 행렬 밖으로 쫓아낼 것을 주장했다. 황자를 황자답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후손이였지만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구설수에 오르고 불쾌한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그 자리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자신만의-다소 불확실한- 목적이 있었고, 이제 그 마지막 절정이 코앞이었다. 그 앞에서 괜한 일로 고집을 부려 기분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고 그 이상 불쾌한 무리에 억지로 섞이는 일도 사양이었다. 그는 황자의 말에도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황실을 떠났다. 오히려 이 거리가 자신의 분수에 맞는 일이었다.
행렬이 곧 시작되어 타나토스는 흥분해서 저마다의 벅찬 감동에 차있는 사람들 사이를 약간 헤치고 들어갔다. 구태여 맨 앞으로 갈 필요는 없었고, 적당히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중간 정도면 되었다. 황실에서 화려한 행렬이 시작되었다. 국기를 등에 달고 색깔까지 맞춰 입은 말이 행렬의 양쪽 앞에 섰다.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람 역시 비슷한 색깔 옷을 입고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말의 갈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말의 꼬리에 박은채 걷는 장병들이 그 뒤를 이었다. 타나토스는 목을 약간 빼 행렬의 한참 뒤를 바라보았다.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지 않아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렇게 급하게 굴지 않아도 자연히 그가 보고싶은 사람이 곧 나타날테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목적은 단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앞으로 헤쳐나가기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보이지도 않는 곳을 노려본다 한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욕심을 거두고 단지 그 자리에 서 느릿느릿한 선두를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안그래도 느린 행렬이 더 느리게 느껴졌다. 색깔 옷을 씌운 말이 그저 신기한 아이들이 자리에서 붕붕 뛰었고 한참 뒤에서 거렁뱅이들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행렬이 시작됐을 때의 열성도 지루한 행렬에 식어 더러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무료함이 극에 달할 때 쯤 앞쪽에서 터질듯한 함성이 들렸다. 황자가 드디어 사람들의 대열에 도착한 것이다. 타나토스는 저도 모르게 바닥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황실쪽을 쳐다보았다. 이미 선두는 한참 지난 후였고 저 끝에서 아주 작게나마 그가 찾고 있던 목적이 보였다. 그는 그때부터 시선을 엔시스에게 두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황자는 황제가 될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하게 만든 것은 과거의 불명예였다. 과거의 불명예는 아마도……. 그는 약간의 상념에 사로잡혔다. 이제 이야기는 '전'을 지나 '결'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완결에 다다랐을 때 느낄 해방감을 미친듯이 좇아 여기까지 왔지만 막상 끝을 앞에 둔 그에게는 붕 뜰 듯한 허무함만이 남았다. 처음에는 '우연'에 기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싫었다. 자신의 곁을 떠난 사람들을 등에 영원히 짊어지고 살아 숨쉬는 것도 싫었다. 자신을 두고 떠난, 혹은 자신이 두고 떠난 것들이 자꾸만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럼에도 해야만 했다. 그렇게끔 만든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자신은 마지막 순간 약속했고, 그것이 억지로 그를 삶과 연결시켰다. 결심이 서자 할 일이 명확해졌다. 그는 방탕한 황자를 황자답게 만들어야했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엔시스는 도망쳤고, 또 도망쳤다. 정해진 명확한 목적지도 없이 그저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어스름한 변명 아래에. 어쩌면 우리는 닮아있을지도 모르지. 너는 살아가는 의미를 찾기 위해 도망치고,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 너를 쫓았으니까. 우리 둘 다 살아가는 일을 싫어했지만, 사실은 우리는 서로 의미없는 생에, 억지로 뜻을 부여하면서까지 살아가고 싶었던거야.
그의 상념은 과거를 거쳐 미래로 향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의문이 남았다. 여기까지 오는 일이 벅차서 그 뒤의 일을 생각해두지 않았다. 멍에처럼 남은 불명예를 거두어내고 정말로 족쇄없는 자유가 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고싶은 일을 뒤늦게 찾아내어 몰두해도 될 것이고, 다시 가문을 일으켜세울 계획을 짤 수도 있을 것이다. 장사를 할 수도 있고, 학자가 될 수도 있다. 농사를 지어도 괜찮고 성직자가 되어도 좋다. 자신에 대한 선입견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멀리 떠나 새출발을 해도 괜찮을 것이고, 손에 잡히는 일들을 해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대로 너와 함께. 어느새 엔시스는 타나토스가 있는 곳까지 도달해있었고, 주변이 시끄러운 함성으로 가득찼다. 그 속에서 멍하니 입을 다물고 멍청하게 서있는 것은 타나토스 뿐이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주친 시선은 곧 반대쪽을 향했고, 그 자리에 남은 공허에 타나토스는 저도 모르게 옆 사람을 억지로 헤치고 몇 발자국 행렬을 따라 이동했다. 그제야 타나토스가 자신이 미칠듯 갈망했던 목적이 어느새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다.
행렬은 황실부터 시작하여 중앙 광장에 있는 커다란 분수대까지 이어졌다. 광장에 며칠 전에 설치된 빛나는 단상에서 행렬은 멈췄고, 중간에 서 있던 엔시스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이전의 천방지축같은 모습은 오간데 없었다. 그는 예를 갖추어 절하고, 옷가지를 단정하게 다듬은 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본적 없는 진중한 태도에 약간 놀란듯 보였다. 황제는 자신이 쓰고 있던 왕관을 벗어 이제 곧 황제가 될 엔시스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엔시스는 다시 한 번 절하고 뒤돌아 군중들을 넓게 바라보았다. 반듯하고 꼿꼿하게 선 눈에는 확신이 가득차 있었고, 인자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타나토스는 한 번 사람들 무리를 빠져나왔다가 멀리 돌아 중앙 분수대 쪽으로 이동해 또 다시 중간 라인에 섰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못할 일은 아니었다. 엔시스가 뒤 돌자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어린 아이들도, 미치광이들조차 입을 꾹 다문채 개미 하나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광장에 엄숙한 목소리로 황자가 황제가 되었다는 선언이 울려퍼졌고, 일시에 함성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나라가 떠날듯이 너나 할 것 없이 소리치며 그들은 새로운 그들의 '황제'를 반가이 맞이했다. 엔시스는 엄숙한 선언 뒤 고개를 바짝 든 상태로 군중들을 넓게 쳐다보았다. 찾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는 이내 단상과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타나토스를 발견했다. 눈이 다시 한 번 맞닿았다. 그들은 서로가 맞닿았다고 믿었다. 엔시스는 그에게 일순간 어린 웃음을 지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범하게 웃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웃음이 철없이 어리게 보였던 것은 타나토스 뿐이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이내 죽은듯 멈췄던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환호소리의 힘을 업은 심장박동은 그칠줄 모르고 치솟아갔다. 아무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소음 속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타나토스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앞에 있는 사람들이 거슬렸다. 당장이라도 좋으니, 저 단상 위로 올라가 그를 마주보고 싶었다. 철없는 웃음은 곧 사라졌고, 시선도 곧 멀어졌다. 그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은 타나토스 뿐이었다. 그는 그제야 어떤 것을 깨닫고 만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도 보이는 것은 그 하나 뿐이었다. 그 두 눈에 담고 싶은 것도, 두 손으로 섬기고 싶은 것도, 온 몸을 바쳐 함께 하고 싶은 것도, 괜찮다면 이 심장을 내다 버리고 싶은 것도 그 하나 뿐이었다. 잿빛으로 바랜 허무한 삶에 색을 다시 입혀준 것도 그였다. 당신을 섬기는 시간이 편안하고 쉽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어. 그를 모르는 새에 원망한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버렸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어줍잖은 동정심으로 자신을 생각없이 살려준 것이, 미치도록 짜증나고 자존심 상하기도 했다.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지금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노력 한 번 하지 않고도 손에 쥐고 있음에도 사는 의미를 못 찾겠다며 방황하는 당신이 한때는, 아니 지금도 조금은, 미웠다. 그렇지만 이미 한 차례 나락으로 떨어진 삶을 겨우 위로 끌어올려준 것도, 바로 당신이었기에.
즉위식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행렬은 금방 다시 사라졌지만 단상을 치우고, 와글와글 모였던 사람들이 다 해산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타나토스는 한산해진 공원 벤치에 앉았다. 분수 주변에 사람들이 조금 있었고, 언제 그랬냐는듯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부인들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인사도 나누지 않고 지나갔고, 불법으로 설치되었던 가판대도 다 철수된 후였다. 아이들은 과부의 손을 붙잡고, 과부는 장을 본 짐들을 들고 돌아가버렸다. 거렁뱅이들은 다시금 죽은듯 엎드려 손을 내밀었고, 광대는 묘기용 외발 자전거를 끌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또 다시 농사일, 수공업, 세금과 같은 평범한 화제 뿐이었다. 타나토스는 일어나 황실로 돌아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아니,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엔시스는 집무실에 있었다. 그는 많이 성숙했지만 성미에 맞지 않는 느릿느릿하고 지루한 행렬은 그를 지치게 했다. 의자에 앉 아서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그 자리에 타나토스가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정적이 잠깐 이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고 싶은, 해야할 말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라도 먼저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약속은 지켰다. 이제 엔시스는 타나토스를 보내야했다. 각오한 일이었다. 그것이 미련없을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약속했었고, 이제는 지킬 때였다. 그 모든 결정에는 뒷 일에 대한 고민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타나토스의 쪽이었다.
"황제 폐하. 즉위를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끝이군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제, 내가 뭘 해야할까."
"글쎄, 그건 네 자유지. 아님, 부자유는 어때?"
엔시스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나 의미가 담겨있던 웃음은 아니었다. 단지 약간 지쳤을 뿐이었다. 몸이 지쳤고, 이제 마음도 지칠 차례였다. 그에 앞서 자신을 방어할 웃음이 필요했다. 타나토스는 그 말에 마주 웃었다. 호탕하지도, 얌전하지도, 비겁하지도, 야비하지도, 장난스럽지도 않은, 딱 그의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는 상대를 향한 조소가, 자신을 향한 자조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긴, …나한테는 구속이 어울려. 동시에 익숙하지. 네가 말하는 부자유는 뭐지?"
"네 눈 앞에 있잖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를 바라보고 있었지."
엔시스는 고개를 약간 앞으로 기울였다. 아니, 그보다는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였다. 상대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함이었다. 타나토스는 천천히 걸어 상대의 앞으로 이동했다. 이제 마악, 미칠듯 그를 억죄어 왔던 족쇄가 풀렸다. 이제야, 라고 믿었다. 분명히 '이제야' 풀린 것이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게끔,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게끔, 사실은 단 한번도 그를 매어두지 않았던 족쇄가. 이제도록 그를 괴롭게하다 그가 황제가 된 지금, 풀렸다. 상대가 자신을 본다. 아래에서 위로, 그 답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상대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이 심장에 그대로 꽂혔다.
"나를 원하나?"
엔시스는 다시 웃었다. 잔인한 웃음이었다. 그가 단상에서 수많은 그의 만백성 중 단 한 사람에게 보냈던 어린 웃음이었다. 타나토스는 일순간 멍해졌다. 정답은 이미 한가지였고 바꿀 생각도, 무를 생각도 없었다. 그는 항상 그의 선택을 믿었기 때문에 후회가 될법한 일도 아니었다. 단지, 나는. 당신이 그것을 허락하길 바랄 뿐.
"그럴리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 그냥. 바라보고 싶은거지. 너는 재미있으니까…, 그래. 내가 뭘 하면 되는지 알려줘."
엔시스는 타나토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젠 변명할 여지 없이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그는 타나토스에게 명령했다.
"내 곁에 있어."
우리의 이야기는 한 차례 이미 끝났다. 즉위식에서 당신이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고 선언한 그 순간, 우리가 이어온 관계도 그 때 이미 끝난거야. 나는 자유를 되찾았고, 당신은 이제 한 나라의 황제가 되었지. 이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까……. 처음 당신을 만난 것은 내 선택이 아니었어. 그건 내게 주어진 과업이었고 나를 남기고 간 사람들을 위한 속죄와도 같은 일이었지. 그렇지만 이 집무실에 다시 돌아온 일은 내 '선택'이야. 이 지긋지긋했던 당신과의 관계를,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 역시 후회하지 않을 나의 선택이고. 타나토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제야 모든 것이 끝났다.
"명하시는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