落花流水

COMMISSION2021. 1. 15. 20:53

   나는 다 부서진 집 뒷마당에 쭈그리고 앉았다. 불안감이 치밀어 단걸음에 집까지 왔지만 모든 것이 다 무너진 후였다. 유리창은 다 박살이 나 있었고, 문짝도 흉기에 맞은 것처럼 반쯤 부서져 덜렁거렸다. 무거운 가구를 제외하고 집 안에 있는 물건들도 전부 없어졌다. 더러는 매트리스 조각을 찢어 가져가기도 하고, 커튼 천같은 것들을 잘라서 가져간 흔적도 있었다. 부모님도, 동생들도 전부 사라졌다.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거리 어느곳에나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더러는 옷으로 고향 사람들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얼굴 채로 뜯겨 누군지 알 수 없는 시체들도 많았다. 다만 누덕누덕 기워 썼던 카펫에 스며든 벌건 핏자국으로 잔인한 일이 일어났음을 막연히 추측했을 뿐이었다. 문득 벽에 걸린 가족 사진에 눈이 갔다. 손을 댄 흔적도 없이 깔끔하고 멀쩡한 물건은 그 낡은 액자 하나 뿐이었다. 나름대로 화목했다. 불우한 환경이 원망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이었다. 학업이 바쁘고, 하고 싶었던 일이 간절했지만 그럼에도 몸과 시간을 짬내어 일을 지속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기인했다. 남들이 노력하지 않아도 서 있던 환경에 '준'하려고만 하는데도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 중에도 나는 집에 있을 동생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어 결국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부지런해지기를 선택했다. 그런 생활이 나의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 그럼에도 그 바쁘고 고된 생활이, 자립해간다는 소소한 성취감이, 언제든 웃으며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 제법 기껍게 느껴졌다.

   소식을 들은 나는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의 발발은 일본이 아니었지만 정말 무서운 속도로 퍼져 일본을 덮쳐왔다. 일본 뿐 아니라, 그 나라부터 시작하여 전 세계로 뻗은 것이다. 감염자 무리가 국경을 넘어서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 유목 민족들을 초토화시켰다는 뉴스도 들었다. 처음 발발했을 때는 다들 외국의 소식으로 신문 한칸에 싣는 정도였지만 그 나라를 금방 점령하고 타국으로 빠르게 퍼지는 사태를 심각히 여겨 UN에서 공식적인 긴급 회담을 거치기도 했다. WHO는 행동 방침과 질병에 대한 안내가 담긴 공식 책자를 만들어 전세계적으로 배포했다. 휴대전화에는 하루종일 재난 메시지가 도착했고 파일로 만든 책자를 다운 받을 수 있게끔 링크를 배포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UN의 회담을 바탕으로 격리시설을 크게 만들기도 했지만 대처가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병이 발발되어 다 짓지도 못하고 실패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발한 것은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오사카였다. 그 때 감염자가 소리지르며 주변을 날뛰는 모습이 촬영되어 페이스북, 트위터 등지에 올라왔다. 순식간에 실시간 트렌드로 올라간 그 영상을 보고 나는 나보다도 걱정되는 것들이 있었다. 그 뒤로 매일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학교를 휴교하고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안내가 나왔을 즈음엔 그 누구하고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은 '아직 괜찮다' 라는 막내 동생의 눈물 가득한 말이었고, 휴교령이 내리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갔지만 이미 내가 돌아갈 곳은 무너지고 없었다.

   갈 곳을 잃었다. 꿋꿋하게 살아남겠다고 일어설 의지도 없었고, 뿔뿔이 흩어져버린 가족들을 찾으러 갈 용기도 없었다. 이 사태를 크게 바꿀 수 있는 힘도 내겐 없었다. 나는 무력해. 처음부터, 그러나 아닌 것처럼,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억지로 나를 속이고 모두를 속였을 뿐. 뒷마당에 집 뒷면을 등지고 주저앉은 나는 멍하니 맑은 하늘을 쳐다봤다. 멸망한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청청한 하늘이 왠지 야속했다. 슬픔 뿐 아니라 씁쓸함, 허탈, 무상감, 상실감 같은 것들이 물밀듯이 차올랐다. 그럼에도 울지는 않았다. 내게 울 자격이 남아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내 탓인거야. 전염병은 자연발생했지만 왠지 혼자 남겨진 내게 모두의 책임이 떠넘겨진 것 같았다. 하나씩 떠오르는 얼굴들이, 목소리가, 그 모습들이 심장을 짓눌렀다. 전화벨이 뭉개질 것처럼 납작해진 나를 억지로 세상에 연결시켰다. 핸드폰에 띄워진 이름이 마구 구겨진 나를 질타하듯이 몸을 관통하고 꽂혔다. 그래도 받아야했다. 이 멸망한 분위기가 아니라, 시릴듯 맑은 하늘에 어울리는 밝은 상대가 나를 걱정하는 것이 수화기 너머로도 전해졌다. 어디냐고 묻기에 집에 있다고 전했다. 왜인지, 잔뜩 잠겨있던 마음이 약간 가벼워졌다. 아직 남아있었다. 돌아갈 곳이.

 

   미루루 씨는 나를 억지로 일으켰다. 아니. 억지로, 라는 표현은 약간 부적절하다. 나를 어떻게든 격려하는 모습에 내가 억지로 일어난 것이다. 그는 내게 학교에 생존자들이 모여있다는 정보를 들었다고 설명하며 학교로 나를 데려갔다. 그 말대로 학교에는 이전에 없던 엄중한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우리는 잠시 기다려야했다. 누가 오진 않을지 불안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다른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건물에서 부러진 쇠막대를 든 남자가 걸어나왔다. 나는 약간 움츠렸지만 미루루 씨가 그 앞을 팔로 약간 막고 섰다. 여차하면 도망쳐야했다. 그러나 걱정과 다르게 그는 몇가지 간단한 질문을 했다. 공격 당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없다고 말했다. 일행이 더 있냐고 물었기에 우리 둘 뿐이라고 대답했다. 미루루 씨는 배낭에 약간의 먹을 것과 집에 남아있던 랜턴 등의 물건을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룹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테니 들여보내달라는 부탁까지. 굳은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바리케이트를 살짝 치워 우리를 들여주었다. 쇠막대를 꽉 쥔 손이 보였지만 나는 괜히 의식하지 않기로 했다. 의심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니까.

   학교를 쓰고 있는 생존자 그룹은 총 다섯명이었다. 우리를 처음 들여보내준 남자가 타카하타 켄 씨. 처음의 굳어있던 표정은 우리의 합류가 확정되자 인자하게 풀어졌다. 타카하타 씨는 전업 주부였고, 여기서도 취사와 관련된 것들을 도맡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타카하타 씨 말고 남성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에 비하면 많이 젊어보였다. 타카하타 씨가 우리를 데리고 들어갈 때 건물 문 앞에서 삐딱하게 선 자세로 우리를 보더니, '저건' 뭐냐는 무례한 말로 우리를 맞이했다. 거점으로 돌아가는 중에도 끊임없이 타카하타 씨를 향해 무례한 말을 줄줄 뱉으며 불평했다. 뒤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면서도 쾅 소리 나게 문을 닫더니 그 뒤로는 우리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라는 타카하타 씨의 권유에 콧방귀를 뀌며 우리를 외면했다. 그의 이름은 시노하라 코하쿠였고, 그 뒤로도 우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뒤로 큰 불평을 늘여놓거나 하진 않았다. 그 뒤에 의자에 멀거니 앉아 계셨던 할머니가 느릿느릿 자신을 소개하셨다. 그의 이름은 하네다 야요이였고, 소개하기로는 이미 홀몸이 된지 오래인 것 같았다. 그는 전반적으로 말이 느리고 짧았다. 그의 옆에는 7살 남짓 되어보이는 남자아이가 앉아있었다. 교실에 걸려있던 달력을 찢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네다 씨가 아이에게 자신을 소개하라고 어깨를 두드렸으나 아이는 우리 쪽을 한 번 쳐다봤을 뿐 말하지 않았다. 남은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교탁 옆에 비스듬히 기대 서있는 중년 여성이 우리 쪽을 줄곧 보고 있었다. 그는 처음 보는 이방인인 우리를 인자하게 바라보았다.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오더니 그 포근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기분에 혼자 퐁당 빠졌다. 괜히 잊혀진 사람들 생각이 났다. 그는 자신을 나나미 아카네라고 소개하면서, 타카하타 씨가 우리를 데리고 온 이상 다시 내치지 않을테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 짧게 소개해야 했다. 이름, 그리고 우리가 이 학교 학생이라는 점, 현재의 상황 등에 대해서 말했다. 미루루 씨는 소개에 덧붙여 가져온 물건들을 나나미 씨에게 내밀었다. 암묵적인 분위기 사이에서 누구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나나미 씨가 이 그룹의 리더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은연 중에, 소개 받지 못한 남자아이의 이름이 나나미 하지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네다 씨와 하지메를 제외하고서는 대부분 학교 건물이나 건물 밖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가져오는 일을 맡고 있었고, 타카하타 씨는 이에 더해 취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탐사는 무조건 2인 1조였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같은 팀이 되는 것을 허락받았다. 사람들이 나간 동안 몸이 불편한 하네다 씨는 어린 하지메를 돌보는 일을 맡았다. 시노하라 씨는 보통 건물 안을 혼자 돌아다녔고, 나나미 씨와 타카하타 씨가 함께 다녔다. 그 때가 오전이었기에 우리는 곧바로 첫번째 탐사를 나가야했다. 상당히 자세한 근방의 약도는 하네다 씨의 작품이었다. 우리는 아직 탐사 하지 못했다던 방향 쪽으로 향했다. 건물이 전부 다 부서지고 무너져서 그토록 익숙한 길인데도 낯설었다. 나는 한참 지나가다, 다 떨어진 가게 간판을 보고서야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를 알아볼 수 있었다. 카페의 전면 유리창은 전부 다 깨져서 사방이 유리조각 투성이였고, 간판 자체가 유리 위에 떨어져있었다. 나는 가게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가게 안쪽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 미루루 씨에게 들어가자고 말했다. 유리 조각을 잘 피해 간판을 밟고 들어갔다. 가게 안도 만신창이인 것은 똑같았다. 의자나 테이블들은 다 엎어지거나 부러져있었고 화분들도 다 깨져 뿌리가 다 드러난 식물들이 힘없이 스러져 있었다. 진열대 유리도 다 부서져있었고, 억지로 창고 문을 뜯어 연 흔적이 남아있었다. 진열대 안에도, 창고 안에도 쓸만하거나 먹을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게 카운터 바닥에 떨어진 빵을 하나 발견했다. 다행히 봉지에 포장되어 있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다니는 길이 왠지 위험할 수 있어서, 나무의자의 부러진 다리 하나를 미루루 씨에게 쥐어주었다. 그는 이 모든 일이 낯설고 견디기 힘든 것처럼 보였지만 종종 보여주는 미소와 변하지 않는 밝은 목소리가 왠지 안심이 되었다.

   우리가 다음 향한 곳은 편의점이었다. 카페 근처의 편의점들을 생각나는대로 돌아다녔다. 이름 없는 조그만 동네 편의점은 아예 간판이 무너져 입구를 막아 들어갈 수도 없었다. 다 찌그러진 간판과 문 틈새로 안쪽을 슬쩍 살폈지만 그나마도 거의 다 비어 있는 듯 보였다. 그 다음 도착했던 편의점의 냉장고 안쪽에서 생수 몇 통을 찾아냈다. 샌드위치같은 것들이 몇 가지 남아있었지만 이미 곰팡이가 슬어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매대 안쪽 구석구석까지 꼼꼼하게 살폈지만 특별히 먹거나 쓸 수 있을 것 같은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정수기가 보여 작동을 시도해봤지만 큰 충격으로 본체가 움푹 패여 제대로 되지 않았다. 냉동 창고가 잠겨있어 약간의 희망을 걸고 가지고 왔던 의자 다리로 문고리를 부술 생각이었지만 멀리서 감염자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급하게 그 곳을 떠야했다. 미루루 씨는 이번에도 먼저 내 손목을 붙잡고 가게를 나섰고, 뒤에 따라가던 나는 눈짓으로 우리가 손잡이를 내리치는 소리를 듣고 느릿느릿 다가오는 감염자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보지 말라며, 그대로 나를 이끌고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섰고 우리는 몇 차례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또 다른 편의점을 마주했다. 내가 종종 가던 세븐일레븐이었다. 약간의 추억을 담아 다 부서진 문을 살짝 밀어 들어갔다. 온 매대를 다 뒤졌고 열려 있는 창고 안쪽까지도 살폈지만 카운터 근처의 매대 맨 안쪽에 처박혀있던 조그만 초콜릿 외에는 별 소득이 없었다. 어디든 실내는 전부 엉망이었고, 조그만 먹을거리 하나 없이 텅 빈 매대들 뿐이었다. 행동방침에 적혀있던 바에 따르면 감염자들이 목표로 삼는 것은 순전히 살아있는 사람들 뿐이었으니 아마 이 텅 빈 매대들이야 전부 살아있는 사람들의 소행이겠지.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듯이. 미루루 씨는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걸었던 것이 지쳤는지 엎어진 의자들 중 가장 괜찮아보이는 의자를 세워 잠시 앉았다. 나는 조용히 그의 옆에 낮은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았다. 벽면의 통유리가 끔찍한 모양새로 박살나 찬 바람이 사정없이 들어왔다. 짧은 머리칼이 칼바람에 마구 흩날렸다. 그 찬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도 그는 낙관적인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지금 살아남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상념이 몇가지 떠올랐다. 이유를 말할 수 없는 우울함이 다시 목구멍에서 꿈틀거렸다. 나는 나약해. 화사하게 웃는 그를 보며 웃을 수 없는 내가, 그가 살아가려고 집 안을 뒤져서까지 가방을 꾸려 오는 동안 뒷마당에 처박혀 있던 내가, 그가 나를 데리러 오게끔 만든 구질구질한 내가 싫었다. 미루루 씨는 편의점에서 찾았던 조그만 초콜릿을 뜯어 반 갈라 내게 내밀었다. 우리끼리 비밀이에요, 하고 옅게 웃는 그가, 가슴이 벅찰 정도로 사랑스러워보였다. 그와 동시에 내민 초콜릿을 받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내가, 심장이 시릴 정도로 한심해보였다.

 

   해가 지는 것이 보여 급하게 돌아갔다. 타카하타 씨가 해가 진 후에는 위험하니 절대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기에 학교로 서둘러 가야했다. 우리는 가는 길에도 감염자들을 만날까 두려워 서로 손을 꼭 붙잡고 소리없이 조용히 이동했다. 다행히 특별히 감염자를 마주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학교 정문, 닫힌 바리케이트 앞에 나무 막대를 든 나나미 씨가 있었다. 그는 바리케이트를 살짝 치워주며 우리를 토닥였다. 미루루 씨는 그에게 카페에서 찾아낸 작은 빵과 생수들을 보였지만 나나미 씨는 그에게 나와 나눠먹으라며 상냥하게 웃었다.

   거점으로 쓰고 있는 교실에 들어서자 못 보던 얼굴이 눈에 톡 들어왔다. 한 쪽 눈에 안대를 낀 검은 단발머리의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나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와 비슷해보였다. 그는 구석에 박혀 잔뜩 웅크린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타카하타 씨와 시노하라 씨가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메는 하네다 씨의 근처에서 아침에 그리던 그림을 찢으며 놀고 있었고, 미루루 씨는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작게 나나미 씨를 불렀다.

 

   "우리가 자선 사업 하는 줄 알아? 아침에 둘을 더 들인 것도 모자라서, 멋대로 상의도 없이 덜컥 데려와버리면 어쩌자는거야?"

   "시노하라, 너도 나나미 씨의 은혜를 입었으면서. 그럼 거기에 죽으라고 그냥 내버려두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나는 말이야! 절대 인정할 수 없어. 우리 먹을 것도 다 축나고 있는 중에 팔자도 좋아, 타카하타 씨?"

   "그만, 시노하라 씨."

 

   시노하라 씨는 나나미 씨의 얼굴을 보자 말을 멈췄다. 나나미 씨는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는 여자아이의 앞으로 가 쭈그려 앉았다. 눈높이를 맞춘채, 다정하게 아이를 부르며 그는 그 새까만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우리가 학교를 찾아내고, 바리케이트를 세우고 이만큼 먹을 것과 도구를 확보하는데 일조하지 않은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어. 하네다 씨가 지도를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근방 지리를 알 수 없었을거고, 시노하라 씨가 없었다면 바리케이트를 세울 수도 없었겠지. 타카하타 씨가 없었으면 버리는 음식이 훨씬 많았을거야. 히메카와 씨와 후지와라 씨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먹을 것이야 조금씩이라도 매일 늘어나고 있으니 괜찮잖아?"

 

   타카하타 씨가 무슨 말을 해도 바락바락 화를 내며 펄펄 뛰었던 시노하라 씨는 나나미 씨의 말에 콧방귀를 뀌면서도 물러났다. 그는 아이를 달래 이름을 물었고, 작은 목소리로 마구 중얼거리며 덜덜 떨던 아이는 나나미 씨의 말에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는 나나미 씨의 품에 안겨 엉엉 울기 시작했고, 우리가 그 아이의 눈물 섞인 이름을 들은 것은 한참 후였다.

 

   밤 중에 시노하라 씨와 나나미 씨는 교실 밖에서 짧은 대화를 나눴다. 만약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줬다면 미안하다는 말과, 그래도 새로 들어온 나와 미루루 씨, 그리고 호시를 잘 대해줬으면 한다는 것. 그는 타카하타 씨와 나나미 씨가 어떻게 호시를 만나게 되었는지를 짧게 설명했다. 호시가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오빠를 잃은 것, 그럼에도 오빠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는 것까지. 나는 시노하라 씨가 분명히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으나, 예상과 다르게 그는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하며 타카하타 씨와 하지메가 있는 교실로 돌아갔다. 나나미 씨는 곧장 불이 다 꺼진 우리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고, 나는 황급히 눈을 감았다. 그가 미루루 씨와 내 담요를 고쳐 덮어주었다.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호시에게 어줍잖은 동정심을 느꼈다.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잃어버린 오빠를 등에 짊어지고 그룹에서도 눈총을 받으며 상처받았을 그 아이가 안쓰러웠다. 작게 웅크린 그 모습이 무척 여리고 약해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떤 더러운 위안을 얻은 것도 사실이었다. 당장 시노하라 씨의 눈총이 나와 미루루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갔다는 사실이,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하는 희망찬 사람들 사이에 홀로 절망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보다도 더 약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됐다고 생각했다. 아니란 것을 알게 되는 것이 그렇게 오래걸리진 않았다. 명치가 잔뜩 짓눌리는 느낌이 들어 괴로웠다. 그래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호시가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죽을 힘을 다해 살아왔듯, 내게도 어쨌든 전력을 다해 살아갈 이유가 있었다. 곧 나나미 씨가 우리를 떠나 호시의 옆에 눕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어둠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것은 내 옆에 누워 새근새근 자고 있는 미루루 씨 뿐이었다. 옅은 달빛 마저 들지 않는 교실에서, 빛도 하나 비추지 않는 캄캄한 내 삶에 내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곤 그 뿐이었다. 어떻든 살아가야했다. 남아있는 것 하나 없이 무너져버렸다고 생각한 나약한 나를 일으켜 준 것이, 여기까지 스러지지 않게 지탱해준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하네다 씨가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유독 잠을 이루기 힘든 밤이었다.

 

   그 다음 날이 되어 다시 탐사를 떠나야 했다. 호시가 합류하여 우리는 완전한 2인 1조가 되었고 시노하라 씨도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호시의 요청에 따라 시노하라 씨 조는 하루 더 학교 안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는 여전히 표정이 좋지 못했지만 나나미 씨의 눈짓에 곧 표정을 풀고 호시를 따라갔다. 우리는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기로 했고, 가는 길은 하네다 씨의 도움을 받았다. 사실 학교 학생이었던 우리가 이 곳 지리에 가장 능하긴 하겠지만 지금은 하네다 씨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네다 씨는 먼 지방에서 여기까지 겨우 도망쳐왔고, 그 과정에서 이 주변 지리의 특이사항들을 잘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는 약도를 보면서 하네다 씨가 격자 표시를 하는 곳을 피해 먼 길을 돌았다. 가던 길에 주변 폐허와 어울리지 않는 멀끔한 5층 건물을 발견해 들어갔다. 사실 타카하타 씨가 이런 류의 건물은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겉이 깨끗해보여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층마다 두 개의 방이 있었고, 1층은 계단과 쓰러진 자전거들 뿐이었다. 자전거는 다 녹이 슬어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미루루 씨와 나는 자전거들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아침인데도 건물 안 불이 다 정전되어 손전등이 필요했다. 어젯밤 호시가 과학실에서 발견한 손전등으로 앞을 비추며 조심조심 나아갔다. 201호와 202호는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301호는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슬쩍 안쪽을 비췄지만 쓸만한 것은 전부 가져간 것 같았다. 302호는 2층과 마찬가지로 잠겨 있었고 4층의 401호 역시 잠겨 있었다. 나는 마찬가지로 굳게 잠겨 있는 402호 앞에서 맥이 빠져 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우유 광고지들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상담은, 이 번호로. 지금 이 번호로 전화를 걸면 누군가가 받을까.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5층으로 올라간 미루루 씨가 위층에서 나를 불렀다.

 

   "치호 씨! 여기 열린 문이 있어요!"

 

   그 희망찬 외침에 나는 없던 힘을 내어 후다닥 5층으로 올라갔다. 과연, 말대로 502호의 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나는 안쪽을 손전등으로 슬쩍 비췄고, 약간 어수선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깔끔해보였다. 우리는 약간의 기대를 걸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집주인이 급하게 나간 것인지 실내에는 가지고 갈만한 것들이 무척 많았다. 냉장고에도 다 먹지 못한 것들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전기가 나간지 오래 되어서 상한 것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큰 페트병 가득한 물,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과자들과 초콜릿 같은 간식, 컵라면과 소금, 설탕과 같은 조미료들 등 평범한 가정집에서 유통기한이 긴 음식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가방 가득 먹을거리를 채웠다. 이불과 담요 같은 것들도 있었지만 학교에 이미 학생들이 버리고 간 담요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내버려두었다. 미루루 씨는 수납장들을 덜그럭 거리며 열었고, 곧 구급상자를 찾아냈다. 상자 안에는 연고, 붕대, 파스와 같이 여러가지 쓸만한 것들이 많았다. 미루루 씨는 파스들을 제외하고 꼭 필요한 연고, 진통제와 같은 것들을 골라 챙겼다. 옆에서 멍하니 미루루 씨가 하던 일을 쳐다보던 나는 문득.

 

   "아, 피난가방이 있지 않을까요?"

 

   미루루 씨는 아스피린을 챙기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좋은 생각이라며 박수를 짝 치더니 더 찾아보자며 열지 않은 서랍들을 전부 열었다. 열던 도중에 먼지폭탄을 맞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벌레가 튀어나오고 쥐가 기어다녀 곤혹을 치렀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내심 기뻤다.

   재난이 많은 일본 가정집 답게 우리는 큰 옷장 구석에 박혀 있던 피난가방을 찾아냈다. 꽤 큰 가족이었는지 시중에 파는 캐리어 형식의 피난가방이 두 개나 있었다. 그 옆에 있는 검은 가방까지.미루루 씨는 가방을 열었다. 음료수 몇 병과 레토르트 식품과 인스턴트, 크래커, 통조림 등의 비상식들이 들어있었다. 한쪽에는 우리가 아까 챙긴 의약품들이 종류별로 준비되어 있었다. 상비약, 붕대, 거즈, 반창고, 가위, 소독약 등이 그것이었다. 의류도 많았다. 손난로도 있었고, 손전등과 휴대용라디오도 있었지만 라디오는 이제 쓸모가 없었으니 옆에 버렸다. 보통은 예비전지가 같이 들어있는데 중간에 뺀 것인지 전지는 들어있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는 호루라기, 컴퍼스와 칼 같이 공구들이 빼곡히 들어있었다. 그 옆에는 약간의 현금, 가족들의 신분증명서와 통장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이것은 필요 없으니 라디오 옆에 버렸다. 검은 가방 안에는 여분의 비상 식량, 테이프, 랩과 포대, 휴지, 타월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귀중품들과 라디오, 그리고 담요와 같이 이미 충분한 의류들을 뺀 빈 자리에 아까 챙긴 페트병들을 마저 담았다. 가방이 무거워 다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가방이 생각보다 무거워 미루루 씨의 가방 빈 자리에 구석구석 채워넣었다. 가방을 메고 있던 미루루 씨에게 검은 가방을 맡기고 나는 캐리어 두 개를 같이 끌기로 했다. 먹을 것 하나가 아쉬운 지금 놓고가기엔 너무 아까운 것들 뿐이었다. 우리는 일어나고 열지 못한 장롱 등이 눈에 걸렸지만 지금 더 들고갈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그만두었다. 미루루 씨는 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좋은 것들을 다 놓칠 뻔 했다며 웃었다. 나는 그 말에, 또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어 짐이 무거운줄도 모르고 마주 웃었다.

 

   다행히 나오는 길까지 무사했다. 우리는 있는대로 빨리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했고, 그 와중에도 캐리어 끌리는 소리가 불안했던 나는 결국 양 손에 캐리어를 들고 걸었다. 가방 반 이상을 차지한 페트병들이 무척 무거웠지만 그 자리에서 드르륵 소리를 내느니 팔이 빠지는 편이 나았다. 우리는 곧장 학교로 다시 돌아갔고, 학교 바깥에서 수도를 계속 살피던 호시와 시노하라 씨가 우리를 보고 문을 열어주었다. 시노하라 씨가 내 캐리어를 받아주었고, 호시가 미루루 씨의 검은 가방을 받아주었다. 미루루 씨는 여기까지의 길이 무척 지쳤던 모양인지 바리케이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주저앉았다. 무척 고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으나 해가 지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나는 미루루 씨를 남겨두고 다시 나왔다. 호시가 무척 불안한 눈으로 혼자 떠나는 나를 쳐다보았지만 이 앞에 있는 가게만 보고 오겠다는 말로 나는 자리를 떴다. 어쨌든 나는 열심히 하고 싶었다. 하루하루의 탐사는 내게 생존 이상의 의미였다. 비관에 차있던 나를 일으켜 여기까지 데려오고, 격려하며 앞으로 나아가게 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 상냥한 미소를 더 이상 져버릴 순 없었다.

   가게 안에는 내 기대와 달리 남아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뒤지고 뒤져서 긁어간 흔적이 역력했다. 그래도 나는 굳게 잠겨있는 안쪽 창고에 약간의 희망을 걸었다. 다 부서진 의자의 쇠막대를 들어 문고리를 힘껏 내리쳤다. 쨍한 소리가 크게 났지만 얼른 부술 작정으로 나는 있는 힘을 쥐어짜 문을 때렸고 네 번째 타격에 문고리가 강제로 덜그럭 거리며 떨어졌다. 나는 그 옆에 온통 찌그러진 쇠막대를 내려두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창고 안까진 뒤지지 못한건지 남아있는 것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상한 원재료들 뿐이었고,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약간의 조미료들과 통조림들 뿐이었다. 비워서 들고 왔던 미루루 씨의 가방에 통조림들을 담았다. 주머니들에 조미료를 넣자 그래도 가방이 가득찼다. 나는 또 다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잠시 사로잡혔다. 쓸모를 증명한 것 같았다. 시노하라 씨도 없던 가방까지 끌고 돌아온 우리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 졌었다. 이제 미루루 씨와 내가 괜한 눈치를 받을 일도 없어졌고 우리를 믿고 받아들여준 나나미 씨와 타카하타 씨에게 보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내심 보람찼다. 나는 무거운 줄도 모르고 가방을 얼른 멨다. 이제 얼른 돌아가야했다. 더 돌아다녀도 손에 들 자리도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갈 필요는 없었다. 나는 구석에 있는 물까지 손에 챙겨들고 발걸음을 뗐다. 그 순간 열린 문으로 검은 인영이 보였다. 나는 일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맥박이 잠시 멈췄다가, 눈을 뒤집고 이쪽을 향해 느릿느릿 다가오는 감염자를 확인하고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상대의 발걸음,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다 들렸다. 쉴 새 없이 뛰는 내 심장소리가 그 위를 덮었다. 머릿 속에서 남들에겐 들릴리 없는 경보가 울렸다. 도와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다가오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아니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라도 싶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그 위에 도망치라는 말만 미친듯이 맴돌았다. 땅바닥에 붙어 움직이지 않는 발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눈은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나를 향해 걸어오는 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옷도 똑바로 걸치지 못한 상태였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눈을 까뒤집고 두 팔을 의미없이 앞으로 뻗은채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비틀 걸었다. 앞으로 가야할 발이 저도 모르게 뒤로 향했다. 많은 것들이 생각났다. 그새 흐릿해진 동생들의 얼굴, 부모님, 이제까지 노력했던 것들, 어제 만났는데도 금방 정이 들어버린 사람들. 마지막으로 떠올린 단 한 사람, 그리고 상대가 의자에 걸려 넘어지는 소리에 나는 꿈에서 깼다. 그 순간 나는, 어떤 용기가 솟아올라서, 재빠르게 땅바닥에 내가 버렸던 다 찌그러진 쇠막대를 다시 쥐었다. 반드시 살아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멈춘 세계에서 나만이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방해되는 페트병을 옆에 내던지고 상대의 반대편으로 달렸다. 책상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발 밑을 보고 달렸다. 문은 하나였지만, 그래도 나는 상대보다 훨씬 빨랐다. 무거운 짐을 들고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탁 트인 도로로 나가면, 이 곳을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희망에 반짝이는 마지막 의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리고 의자를 넘는 순간, 나는 왼팔을 붙잡혔다. 예상치 못한 습격에 그대로 넘어졌다. 의자 위로 넘어져 쇠에 부딪힌 갈비뼈가 아팠다. 뼈가 시릴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왼 손목을 꿰 뚫은 잇자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고, 상대는 그대로 왼손을 뜯어갈 것처럼 이로 문 채 팔을 놔주지 않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반대편에 들고 있었던 쇠막대로 상대의 관자놀이를 후려쳤고, 감염자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책상 위로 쓰러지면서 책상이 그의 위로 같이 넘어졌다. 나는 상처를 살펴볼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바로 거리로 도망쳤다.

 

   돌아가는 길은 무겁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었다. 사실은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발걸음은 느릿느릿 학교를 향했다. 가서는 안 됐다. 이제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나는 폐를 끼칠 것이고, 그 곳에 남기고 온 사람을 위해서라도 가서는 안되었다. 5분만에 돌아갈 수 있는 거리를 빙빙 돌아 10분을 끌었다. 이렇게 무방비로 돌아다녀선 안되는데도 그렇게 했다. 학교로 가는 길이 무거운 것은 가방 때문은 아니었다. 넘어질 때 부딪혔던 갈비뼈가 아팠다. 다행히 왼손이 뜯길 정도로 다치진 않았지만, 옷을 뚫고 시퍼런 잇자국이 남았다. 나는 어떻게 상처를 숨길까 하다 가방을 앞으로 메고, 가방이 무거운 것처럼 팔로 가방을 받치기로 했다. 돌아갈 곳이 없어졌는데도 상처를 숨길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나는 비겁해. 어떻게 사람들을 대해야할지 몰랐다. 아무렇지 못할 일이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못할 일은 아니었다. 나는 줄곧 아무렇지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괜찮았다. 그런 척 했다. 그 동안의 생활은 항상 아무렇지 못했다. 남들에게 날 때부터 주어져있던 생활에 대한 박탈감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괜찮은 척 했다. 어렵지만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내 주변에는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고 싶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안이 됐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왠지 그제야 눈물이 눈을 비집고 나왔다. 아파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눈물 닦을 생각도 않고 멍하니 자리에 멈췄다. 꾹꾹 눌러 넣어두었던 무력감이 목구멍 안쪽에서 꿈틀거렸다. 내게 이미 드리워 진 결말의 그림자가 두렵기도 했다. 그 결말 속에 남겨질 사람이 자꾸만 떠올랐다. 날 도와주고, 격려하고, 일으켜주고, 함께 해주고, 괜찮게 만들어 준 그 사람이 미친듯이 어른거렸다. 지금도 문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 사람이 당장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나의 부재로 당신이 다시는 웃지 못하게 되는 일이 두려웠다. 내게 죽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죽음이 두려웠다. 당신이 혼자가 되는 일이.

 

   내가 비겁하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구멍난 양심을 여러가지 못난 변명으로 기워냈다. 다시 떠날 것이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아주 짧은 머무름이더라도 괜찮았다. 나는 눈물 자국을 있는대로 지워내고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목소리가 괜찮은지 확인했던 것이었다. 계획대로 가방을 앞으로 멨고 가방 밑을 팔로 받쳤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내가 돌아가자 바리케이트 뒤에는 여전히 미루루 씨가 서성이고 있었다. 그 옆에 있었던 호시와 시노하라 씨는 건물 안으로 돌아갔다고 그가 전해주었다. 미루루 씨는 나를 보자마자 문을 열어주었고, 가방을 받아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별로 무겁지 않다며 거절했다. 가방 아래 받친 왼팔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다행히 미루루 씨는 별 의심없이 웃어주었다. 볼 적마다 마음을 흔들었던 그 웃음이 왠지 심장을 콱콱 찌르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줄곧 우울해있던 것 같다.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지만 이번엔 잘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산 때 우리의 소득은 모두를 놀래켰다. 불평 투성이였던 시노하라 씨도 입이 귀에 걸리게 좋아했고, 과묵했던 하네다 씨도 처음 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억지로 웃어보이는 일에 성공했다. 이제 내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었지만, 미루루 씨에게는 무척, 무척이나 유용하게 쓰이게 될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웃을 수 있었다. 그 날 저녁은 어제보다도 풍족했다. 내가 가게에서 가져온 통조림들로 타카하타 씨가 무척 맛있는 저녁을 만들어주었다. 사실은 입맛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내가 공연히 그 자리에서 기운이 없으면 미루루 씨도 식사를 소홀히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다 먹을 수 있었다. 왠지 잠에 들기엔 마음이 무거웠지만 내가 괜히 기분이 좋지 않은 티를 냈다가는 미루루 씨도 신경 쓸 것이 뻔했기에 얼른 자리를 펴고 누웠다. 다행히 내 노력으로 내가 괜찮게 보이는데 성공한 듯 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내가 우울하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은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알아챈 것도 그 사람이었다. 식사 후에 젖었다는 핑계를 대고 옷을 갈아 입었다. 쓰지 않는 교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몰래 주머니에 챙겼던 큰 드레싱 밴드로 상처를 가렸다. 물린 자국이 흉하게 남았을 뿐 손목을 쓰는데 당장 큰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자꾸만 상처 안쪽이 콱콱 찔리는 느낌이 났지만 참아냈다. 억지로 웃고,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고 잠에 드는 일 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나 나는 미루루 씨가 새벽이 다 가도록 뒤척이는 나를 조용히 끌고 학교 옥상으로 데려가는 것을 보고 내 노력이 물거품이 됐음을 짐작했다. 말로는 잠이 안 온다지만 줄곧 신경쓰고 있었던 것이다. 낮까진 기분이 좋아보였는데 갑자기 울적해보이니 더 걱정스러웠겠지. 그 마음이 너무 고와서, 그리고 씁쓸해서 괜시리 없던 눈물이 다시 치솟았다. 우리는 옆에 나란히 앉았고, 추울까봐 가져왔던 큰 담요를 어깨에 함께 둘렀다. 세계는 더 망할 수 없을 정도로 멸망했지만 우주까지 멸망한 것은 아니었는지 밤하늘은 여전히 예뻤다. 오히려 훨씬 찬란해졌다. 방해만 됐던 바쁜 불빛들이 사라졌기 때문이겠지. 까만 도화지 위에 마구 흩뿌려진 모래알처럼. 규칙성도 없고 크기도 다 제각각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서로를 더 아름답게 꾸몄다. 난간과 가까이 앉아있던 것이 아니었기에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천장이 전부였다. 미루루 씨가 바로 옆에 앉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우리, 끝까지 살아남아요. 치호 씨의 동생분들도, 부모님도, 그리고 제 가족들도 분명 어딘가에 저희처럼 그룹을 만들어서 지내고 있을거에요."

   "…네, 그랬으면."

   "그랬으면이 아니라, 그럴거에요. 다시 만나게 되면 치호 씨의 부모님한테 인사드릴거에요. 동생분들 한테도요! 제 가족들한테도 치호 씨를 소개할거에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잠시 고개를 떼고 내 눈을 바로 마주보며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집에 주저앉은 저를 다시 일으켜준 사람이라고요."

 

   미루루 씨는 말을 멈추고 내 입술에 입맞췄다. 그대로 얼어버린 나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짧게 자른 머리가 흔들거렸다. 나를 바라보는 두 눈이 달빛에 반짝였다. 다정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남았다. 달빛을 받은 입술이 반들거렸다. 가로등이 전부 나가 보이는 것 하나 없는 세상에 남은 유일한 빛이 그를 비추고 있었다. 마구 반짝이는 야경과, 머리 위를 살랑 지나간 바람, 보들보들한 담요의 따스함과 서로의 향기, 맞닿은 두 사람.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로맨스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우울함이 지독하게 시렸다. 그래도 두근거렸다.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손목을 쑤시던 고통을 까맣게 잊을 정도로 그 모습이, 그 목소리가, 그 분위기가, 그 모든 장면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나는 미루루 씨의 양 볼을 붙잡고 그 입술에 다시 입맞췄다. 그 키스에 전하지 못할 말들을 많이 담았다. 내가 당신을 만났던 기쁨과 나눴던 추억, 세계가 멸망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많은 것들에 대한 애도와 여기까지 나와 함께 해주었던 고마움, 말할 수 없는 비밀과 자책, 후회, 우울, 한탄, 미안함, 그리고 아직은 이른 작별인사. 할 말이 넘치도록 많아 그 입맞춤은 길었다. 벅찰 정도로 길었지만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말을 나누기에는 하룻밤은 너무 짧았다.

 

   내 비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날 우리는 상가 사이의 작은 옷가게에서 약간의 옷가지와 서랍에 남아있는 간식거리를 얻었고, 지도를 보며 다른 곳을 들쑤셨지만 별다른 수확을 얻을 수는 없었다. 금방 지쳐버린 우리는 더 돌아다녀도 별 소득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 오후에 일찍 돌아갔다. 나로서는 그 일이 당장은 잘 되었다.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더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 훨씬 편했다. 거점에 하네다 씨와 하지메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인지 교실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지친 탓에 약간 빈틈을 보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손목이 욱씬거리다가 탈듯이 뜨거워져서 무심결에 소매를 걷고 말았던 것이다. 정신이 멍해서 내가 소매를 걷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피곤했다. 미루루 씨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 손목을 낚아챘다. 나는 아차 싶어 얼른 손목을 도로 뺏었지만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미루루 씨가 절망 섞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변명이라도 해야했지만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떨어진 시선은 내 발치에만 머물렀다. 무거운 마음에 차마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가 나를 원망할거라고 생각했다. 공격 받았다는 사실을, 이제 떠날 작정이었다는 걸 숨겨서. 나는 무슨 말이 떨어져도 받아들일 생각으로 바닥에 처박은 눈을 부릅 떴다. 비겁한 것은 처음부터 나였기 때문에 울 수는 없었다. 다행히 눈물을 참는 것은 내가 곧잘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르게 미루루 씨는 우리가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구급 상자를 내 앞에 가져왔다. 그가 꺼낸 것은 소독약과 거즈, 테이프였다. 미루루 씨는 내 손목을 다시 붙잡고 아무렇게나 붙여준 드레싱 밴드를 떼어냈다. 그리고 파랗게 멍이 든 손목에 거즈에 묻힌 소독약을 발라주었다. 나는 벙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팔을 빼지도 못한 채 미루루 씨를 쳐다보았다. 생각지 못한 다정함에 자꾸만 눈가가 뜨거워졌다. 온통 울지 않는데 집중하니 손목에 느껴지는 쓰린 고통도 참을만 했다. 그는 하네다 씨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며 소독약이 묻은 거즈를 휴지에 싸서 주머니에 넣고 깨끗한 새 거즈를 몇겹 상처 위에 덮어주었다. 그 거즈가 테이프로 고정될 때까지도 나는 멍하니 그가 나를 치료해주는 것을 보기만 했다. 미루루 씨는 소매를 다시 내려주며 내게 말했다.

 

   "줄곧 우울해보여서 걱정했어요. 말해줬으면 좋았을텐데."

   "미루루 씨…, 그치만 이건."

   "치호 씨가 감염됐다고 해도 저는 치호 씨를 떠나지 않을거에요. 분명 이겨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메뉴얼에는 몇 시간 내로 감염자가 된다고 하는데 치호 씨가 공격 당한지 하루나 지났잖아요."

 

   미루루 씨는 흔적을 없애려는건지 얼른 상자를 정리해서 가방 안에 넣었다. 바깥에 하네다 씨가 있을지 걱정되었던 모양인지 창 틈새로 빈 복도를 몇 번 두리번 거리더니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다.

 

   "제가 걱정되어서 우울했다면 더는 우울해하지 말아요. 치호 씨는 끝까지 저와 함께 할거에요. 그리고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수많은 만약이 머리에 스쳤다. 앞으로 나올 말들이 두려워 나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채로 미루루 씨를 바라보았다.

 

   "저는 절대 치호 씨를 원망하지 않을거에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어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맑고 깨끗한 웃음이었다.

 

   나는 용케 그 다음 날까지 악착같이 버텨내었다. 어쩌면 나는 감염되지 않는 체질인게 아닐까, 하는 헛된 기대를 품을 정도로 나는 통상적인 시간 보다도 훨씬 오래 감염을 버텨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다. 고통스러울 뿐인 시간이 끈질기게도 오래 간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시간 단위로 상태가 악화되는 내 옆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는 미루루 씨를 볼 때마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도 나는 끔찍한 결말이 점점 나를 삼켜가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당장 1분 뒤에 의식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무한한 불안이 자꾸만 나를 덮쳐왔다. 내게 위안이 되는 것은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미루루 씨 뿐이었다.

   그 날 밤을 간절히 기다렸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약한 내게는 점점 전신을 콱콱 쑤셔오는 고통과 그룹 사람들에게 누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내 손으로 미루루 씨를 상처 입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은 견뎌내기 힘든 일들이었다. 끝내고 싶었다. 이 모든 악몽들을. 나는 나나미 씨의 코트 주머니에 권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나미 씨가 이전에 경찰이었다는 것은, 하지메에게 들어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것이었다. 실탄 하나 정도는 써도 괜찮을 것이다. 괜찮지 않더라도 그러고 싶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확실하게 끝낼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모두가 잠든 어두운 밤에 나나미 씨의 권총을 훔쳤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끌고 다른 교실로 들어갔다. 어디로 들어갔는지 기억이 약간 흐릿했다. 단지 얼른 해버리고 싶은 마음에 우리가 잠을 자는 교실들을 지나 제일 먼저 보이는 교실에 들어갔다는 것만이 기억났다. 나는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가 교탁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어디를 쏠지는 내 선택이었다. 관자놀이, 목, 심장과도 같은. 왼쪽 가슴에 총구를 댄 나는 억지로 기억을 끌어냈다. 어쩌면 삶을 끝내는 의미있는 순간을 즐기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아주 어릴적부터 생각나는대로 회상하던 나는 결국 총을 든 손을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내 모든 기억의 종착점에 있는 미루루 씨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다. 끝까지 이기적으로 구는 내가 한심했지만 결국 그 길로 교실을 다시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나나미 씨를 마주하고 말았다. 그는 비틀비틀 걸어나오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알아차렸다. 내가 권총을 훔쳤다는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저… 며칠 전에 물렸어요. 미루루 씨를 놔두고 혼자 가게에 갔다가요. 이제 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 권총을 몰래 가져갔어요. 죄송합니다."

   "…후지와라 씨."

   "저, 저기! 나나미 씨, 더, 더도 말고 내일. 내일 모두가 떠났을 때 죽을게요. 미루루 씨는 그때 학교에서 쉬고 있었어요. 공격 받은 것은 저 혼자니까 제가 없더라도 미루루 씨를 돌봐주셨으면 해요. 이기적인 부탁인거 알지만 미루루 씨는 아무 상관 없어요."

 

   그는 애틋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후지와라 씨, 나는 이미 남편을 잃었어. 남편이 하지메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그만 총을 쏴버렸지. 그 총은 그 뒤로 쓰지 않았어. 미루루 씨에게 제대로 인사하는게 좋을거야. 후지와라 씨가 오늘 그대로 죽었다면 미루루 씨는 계속 후지와라 씨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후회하면서 살테니까."

 

   나나미 씨는 나를 한 번 다정히 안아주었다. 나를 토닥이는 손길에 결국 이제까지 꾹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지만, 괜한 시선을 끌 수도 있으니 소리를 꾹 죽여야했다. 그는 나를 말리고 싶어하는 것처럼 내 이름을 불렀지만, 결국 내게서 권총을 가져가진 않았다. 나는 또, 그가 정말로 강인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나나미 씨는 나를 배려해 하지메에게 교실에서 떨어진 먼 곳에 하네다 씨와 함께 가라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지메는 하네다 씨를 졸라 본관과 멀리 떨어진 별관에 갔다. 호시와 시노하라 씨도 이제는 학교 밖으로 탐사를 나가니 본관에는 오로지 나와 미루루 씨만 남은 채였다. 나나미 씨는 마지막으로 타카하타 씨를 데리고 탐사를 나섰다. 특이하게 늘 하던 다녀올게, 가 아니라 안녕, 이었다. 미루루 씨는 그 의미를 알아챈 것인지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한시가 급해 모두가 나가자마자 미루루 씨에게 얼른 총을 쥐어주었다. 여유로운 대화가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정말이지 더는 버티기 힘겨웠다.

 

   "미루루 씨가 직접 해줬으면 좋겠어요."

   "아, 안돼요. 제가 어제 치호 씨는 분명 이겨낼 수 있을거라고 했잖아요. 조금만 더 참으면 분명 나을 수 있을거에요, 그러니까…"

   "미루루 씨. 저는 제 손으로 미루루 씨를 상처입히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은 정말 이기적이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미루루 씨에게 총을 쥐어주면서 나를 죽이라고 말하는 내가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러웠다. 그렇지만 나는 차분히 미루루 씨를 설득했다. 설득이라고 해야할지, 유언이라고 해야할지, 마지막 인사라고 해야할지. 숨이 벅찼지만 그래도 나는 하고 싶은 말들을 전부 쏟아냈다. 당신을 만난 일은 내 모든 고통을 없애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도 견디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고. 미루루 씨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귀도 먹먹하고 눈도 흐려서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제가 죽더라도 미루루 씨는 살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약속해주세요. 끝까지 살아남겠다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야할 말이 분명히 있었다. 그 말만은 잊지 않았다.

 

   "사랑해요.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마지막으로 만나는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나는 미루루 씨에게 한 번 더 입맞추었다. 미루루 씨가 내 옷깃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 다정한 손을 잡고 떨어뜨렸다. 따뜻한 손이 멀어졌다. 나는 더 움직이기도 힘든 몸을 억지로 붙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왜 그랬을까. 그래도 죽는 순간까지 그가 보고싶었던 모양인지 나는 느릿느릿 기어가는 속도로 미루루 씨의 교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한기가 훅 끼쳐왔다. 죽기엔 딱인 장소였다. 나이가 많이 들어 이제 어른이라고 느꼈지만 그래도 길지는 않았다. 스무살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 삶이 항상 행복에 가득찼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무엇보다도 당신을 만났던 일만큼은 다시 태어나서도 후회하지 않을만큼 기뻤다. 화사하게 웃는 미루루 씨가 떠올랐다. 그래도 머릿속이 온통 흐려서 똑바로 보이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미루루 씨를 똑바로 담을 수 없다는 사실만이 사무치도록 아쉬웠다. 그래도 괜찮아. 똑바로 보여도, 흐릿하게 보여도, 설령 눈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당신을 사랑할테니까. 

 

   심장이 멎는 소리가 났다.

 

   치호 씨가 문을 열고 나간 후 주저앉은 나는 퍼뜩 정신이라도 차린 것처럼 벌떡 일어나 치호 씨를 쫓아갔다. 지금이라면 말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붙잡고 애원하면 마음을 바꿔줄지도 몰랐다. 흐릿한 미소에 넋이 나가버린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새 치호 씨가 사라져 복도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미칠듯이 뛰었다. 그래도 아직 총소리가 나지 않았으니 괜찮았다. 나는 우리가 쓰는 교실을 지나 복도를 달리면서 열려있는 문을 찾아다녔지만 그 층에 있는 교실이나 방에는 치호 씨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멍하니 그 자리에 다시 얼어붙었다. 마치 내 눈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도 나는 마음을 다잡고 생각했다. 치호 씨라면 어디로 갔을지 고민했다. 퍼뜩 떠오르는 일이 있어 나는 중앙 계단 쪽으로 뛰어갔다. 계단을 두 칸씩 내려가며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나는 우리 교실로 달려갔다. 한 번만 더, 마지막으로, 하다못해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우리 교실이 복도 끝 멀리에 보였다. 숨이 찰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생각했던 대로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치호 씨…!"

 

   내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동시에 총 소리가 났다. 치호 씨는 뒤로 천천히 쓰러졌고 힘이 풀린 손에서 권총이 튀어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울부짖으며 교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싸늘한 냉기가 온 몸을 휘감았다. 나는 바닥에 누워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치호 씨를 붙잡고 이름을 마구 불렀다. 한 번만이라도 더 대답해주길 바랬다. 그래도 그가 다시 다정히 대답해주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 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추운 교실에 앉아서 치호 씨와 함께 며칠을 보냈다. 시체에서 썩은 내가 나고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러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타카하타 씨가 음식을 갖다주고 나나미 씨가 나를 찾아왔지만 그래도 나가지 않았다. 차라리 나도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권총 안에 있던 실탄은 한 개 뿐이었다. 이틀이 지난 후에 나나미 씨가 나를 다시 찾아왔다. 손에는 내 가방이 들려있었다. 그는 내게 여러가지 일을 말해주었다. 심심한 위로와 다정한 포옹. 그리고 어렵사리 그는 내게 나의 추방을 결정했다며 내 가방을 내밀었다. 나는 왜인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들이 원망스럽진 않았다. 당연히 짊어져야 할 일이었다. 이 곳을 떠나게 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있고싶다면 며칠 더 이 곳에 머무르고 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곤 그는 다시 나를 안아주었다. 그 포옹이 그래도 나는 고마웠다. 나나미 씨가 가져온 내 가방에는 살아남는데 꼭 필요했던 물건들이 알차게 들어있었다. 물건마다 나나미 씨가 밤새 사용법을 메모한 흔적이 가득했다. 맨 앞쪽 주머니에는 치호 씨가 늘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이 예쁘게 접혀있었다. 그 위에 치호 씨가 밝게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더는 울지 않겠다고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다시 눈물이 눈가를 비집고 나왔다.

 

   한참을 더 울고 나서야 결심이 섰다.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했다. 나는 나나미 씨가 가져다 준 내 담요를 치호 씨 위에 덮어주었다. 나나미 씨와 타카하타 씨가 내가 나가는 길을 배웅해주었다. 타카하타 씨는 식량이 떨어지면 언제든 와도 좋다며 손을 흔들어주었고, 나나미 씨는 꼭 약속을 지켜달라며 나를 마지막으로 안아주었다.

 

   "히메카와 씨, 미안해. 그리고 후지와라 씨에게도. 후지와라 씨가 내게 부탁했거든."

   "…저를 잘 부탁한다는, 그런 부탁이지요?"

   "응. 그래도 나는…"

   "괜찮아요. 나나미 씨는 이 그룹 전체를 짊어지고 계시잖아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인걸요. 치호 씨도 이해할거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치호 씨의 부탁을 지킬게요."

   "후지와라 씨가 히메카와 씨에게도 부탁을 했어?"

   "네. 꼭 끝까지 살아남아 달라는, 그런 부탁이요."

 

   나는 미안함이 가득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나나미 씨를 향해 웃어보였다. 나나미 씨를 원망하진 않았다. 분명 치호 씨도 그랬을 테니까. 그 말로 나는 꾸벅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등에는 가방을 지고, 왼손에는 약도를 든 채로. 한 가지 잊어버린 일이 있어서 나는 잠시 바리케이트 앞에서 멈춰섰다. 나도 내가 한 말을 지켜야했다. 치호 씨와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나는 나나미 씨에게 받은 치호 씨의 손수건을 왼쪽 손목에 예쁘게 묶었다. 앞으로의 일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분명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상냥한 당신과 함께. 하늘이 구름 하나 없이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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