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벚꽃잎
COMMISSION2021. 1. 15. 20:48잿빛 하늘이었다
하루종일 지독하게 쏟아부었다
봄날을 장식하는
연분홍 꽃잎
아,
떨어졌다.
장마철도 아닌데 비가 폭우처럼 쏟아졌다. 벚꽃이 피었다며 틈날 때마다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가 함께 사진을 찍던 모습이 야속하게 온종일 내렸다. 생이 짧은 꽃이 허무하게 져버렸다. 빗소리가 시끄러워 영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말하고 싶었다. 귀도 입도 마음도 속였다. 그래도 눈만큼은 속일 수 없었는지 자꾸만 빈 옆자리로 시선이 슬금슬금 향했다. 유독 어두웠다. 유독 조용했다. 유독 허전했다. 분명히 해가 떴고, 어떤 목소리가 있고, 살아 움직이는 누군가가 있을테지만 아무도 없는 섬에 혼자 내려앉은 것처럼 외로움이 뼛속까지 시리게 스몄다. 텅 빈 곳에 혼자 있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나는 알아챈다. 텅 빈 것은 마음 뿐이란 것을.
꽃샘추위가 가자마자 기념이라도 하듯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다. 창 밖을 볼 때마다 벚꽃 나무 아래서 귀여운 포즈를 하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였다. 창 밖은 완전한 봄이었다. 다 녹은 눈과 새로 난 풋풋한 새싹, 활짝 핀 꽃들과 겨울을 이겨 낸 우직한 나무들. 그 파란 잎들 사이에 예쁘게 핀 벚꽃이 봄이 온 것을 증명했다. 교무실도 그런대로 들뜬 분위기였다. 그 파릇한 분위기에 휩쓸린 나는, 단지. 그래, 꽃 예쁘네. 하면서, 어줍잖은 3월 분위기를 냈다.
그러나 화사한 분홍빛 봄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제 막 떨어지기 시작한 벚꽃잎과 함께 비가 마구 내렸다. 무거운 빗방울을 이기지 못하고 새싹이 고개를 숙였다. 반들반들 빛나는 나뭇잎에서 빗방울이 흘렀다. 빗물에 눅눅하게 젖은 꽃잎이 느릿느릿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날씨를 원망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나는 그 건조한 감상을 바꾸지 못한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떨어져도 꽃은 꽃이고, 봄날에 어울리게 예뻤다. 오히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비가 내리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제 벚꽃이 완전히 질 무렵이 되면 꽃잎이 비처럼 내릴테니까. 80년을 산다면 봄을 80번 맞을테고, 앞으로 맞을 봄도 여럿 남았으니 이런 봄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왠지 이 바보같은 감상을 누구에게라도 전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차피 말할 사람은 딱 정해져 있었다. 사실 감상을 공유하고 싶었다기 보다는 낯선 침묵이 어색했다. 축 쳐진 분위기에 겹친 고요함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 무게를 웃음 한 번으로 날려줄 네가 없다는 불안마저 느껴졌다. 나는 창문에 멍하니 꽂은 시선을 억지로 옆으로 끌었다. 그래도 역시 이 적막에도 이유가 있었다. 나는 텅 빈 자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일어섰다.
어디로 갔다는 말도 특별히 없었는데도 나는 네가 어디에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이 평범했다. 문 앞에 서서 조금 망설였다. 그냥 생각없이 열고 조금쯤 맞자, 하기에는 비가 미친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봄 날씨 답지 않은 폭우였다. 무슨 목적 의식을 가지고 내리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치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이른바 복선과도 같은 것이라는. 고작 비일 뿐이고, 내일 그칠지도 모르고, 어쩌면 한시간 후에 뚝 그쳐버릴지도 모르지만 왠지 마음이 많이 기울었다. 그 기울임에 아무런 이유도 없진 않을 것이다. 그냥 이 답지 않은 비일상을 날려버리고 싶었을 뿐. 나는 결심이 서 문을 열었다. 발걸음에는 확신만이 실려있었다. 왠지 너는, 어디에 갔다는 말도 없었는데도 나를 곧잘 찾곤 했지. 나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사실은 나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뜻밖의 장소에서 너를 찾아냈다. 절대 이 곳이 아니라고 믿기까지 했지만 거기서 찾았다. 아름다운 꽃이 만개한 봄날, 무겁게 쏟아져내리는 비, 다 젖어 창백하게 된 풍경, 이 모든 근거들로 추론할 수 있는 합리적인 장소로 가는 '도중' 너를 찾아냈다. 아주 잠시였지만 내가 너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이 조금은 무너졌다. 그래도 나는 바라던대로 너를 찾아내서 퍽 기꺼웠고, 너를 부르려 했다.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내 말보다도 네 눈이 더 빨랐고, 눈이 마주친 순간의 위화감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밖에 나온지 단 5분도 되지 않았지만 머리며 옷이며 신발이며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바다에 푹 담갔다 꺼낸 사람처럼 폭삭 젖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나는 멍청하게 비를 맞고 그대로 서 있었다. 너를 부르지도, 너에게 다가가지도, 너를 잡지도 못한 채로. 너는 교정의 한가운데에 서서 비를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나를 보던 눈이 다시 다른 곳으로 향했다. 너는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쳐다보고 있었다. 따스한 봄날을 위해 겨울을 이겨냈지만, 악재로 인해 오래 살지도 못하고 다 젖어버린 벚꽃을. 그 눅눅한 상처의 현장을 눈에 담고 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내가 알고 있던 네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내가 생각하는 너는, 내가 기대했던 너는, 내가 바랬던 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 이름을 부를 것이고,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텐션으로 이 비극적 상황을 낙관적으로 비춰줄 것이다. 그리고선 왜 비를 맞고 있냐며 다정히 물을 것이고, 곧장 나를 데리고 돌아가야할 곳으로 돌아갔겠지. 그래, '내가' 돌아가야할 곳으로. 벚꽃을 한참 쳐다보던 너는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모양인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비가 많이 내리고 눈 앞이 물 때문에 부얘서 네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웃고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굳은 표정이라고 생각이 들다가도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네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지 조차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한가지만은, 네가 나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얼핏 기대하고 만다. 네가 이대로 나를 데리고 돌아갈 것이라고.
"Plus ultra."
그리고 내 기대가 깨질 때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는 나를 그대로 지나쳤고, 단지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거센 빗소리가 끊임없이 들렸고 네가 그다지 크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 말은 왜인지 제대로 들렸다. 들리다 못해 나를 관통하고 지났다. 심장을 뚫는듯한 아릿함이 아주 잠깐 스쳤다. 처참할 정도로 아름다운 봄꽃들과 재앙같은 빗줄기, 몸에 달라붙은 옷의 감촉과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 멍청히 굳어버린 나, 그리고 떠나는 너.
"나는 이미 너보다 먼 곳으로. 너와 나는 이미 먼 곳으로, 쇼타."
바보같이 넋놓고 비를 맞고 있던 내가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너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제야 나는 깨닫고 만다. 마음을 흔들었던 것은 장대비가 아니라 너였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도 너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지독한 감기만이 내게 남았다. 그 날을 마치 환상처럼, 꿈처럼 여기고 싶은 충동을 박살내기라도 하듯이. 마치 증거처럼 남은 독감에도 나는 학교에 나왔다. 쉬려면 쉴 수 있었다. 쉬는게 당연히 더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눈 감고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생각보다도 미련한 사람이라는 것을 절절히 깨닫고 만다. 학교에 있으면 너에 대한 단서 하나라도 더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미련한 생각이 무거운 몸을 억지로라도 끌고 학교에 오게 한 것이다. 경찰이 네 책상을 마구 뒤져가기 전에 네가 남기고 간 모든 것을 혼자 뒤적였다. 상자, 파일, 서랍, 사소한 메모와 달력까지도 전부 다. 그래도 별로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핑계가 필요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정당하고 타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래야 너를 탓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래야 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래야 너를 믿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익히 알듯이 세상은 잔인한 모양이라, 그 간절함 마저도 머잖아 내버려졌다. 아침 뉴스 헤드라인을 화려하게 장식한 너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남들 앞에서 하루를 보내는 일은 견딜 수 없이 힘든 일이었다. 내통자였다는 사실이, 프레젠트 마이크, 프로히어로인, 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지만 그래도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이제 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만큼은.
그래도 나는 미련 많은 사람답게 그 후로도 여러가지를 찾아보았다. 너를 직접 찾아내려는 시도는 그만두었고, 그보다는 네가 남긴 흔적들을 아주 미약한 단서로 삼아 거꾸로 너를 쫓아가고자 했다. 그게 생각만큼 잘 되지는 않았다. 실패를 거듭하고, 좌절하고, 식사를 거르고, 밤잠을 설치고, 주변 사람들의 만류를 들으면서도 나는 그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덕분에 해야할 일이 헉 소리 날 정도로 쌓였다. 아마 네가 보면 기겁했겠지. 아니… 이젠 그것도 아닌가. 지긋한 두통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우주도 멸망시킬 것 같았던 봄비도 그쳤다. 며칠 더 지독하게 이어진 덕분에 벚꽃잎은 진작에 전부 다 떨어져있었다. 눅눅하게 젖어 무거워진 후라 바람에 날려가지도 않고 바닥에 눌러붙어 보기 흉했다. 멍하니 나무를 쳐다보다 우연히 나무에 겨우 붙어 달랑거리는 잎을 발견했다. 조그만 잿빛 벚꽃잎이 마음을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행여나 꽃잎이 떨어질까 두려워 얼른 고개를 돌렸다. 너와 나를 이어주는 마지막 희망마저도 뜯겨 떨어지는 것은 더는 사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