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 걸었던 것은

COMMISSION2021. 1. 9. 01:35

 해당 작업물은 빅터카를 커미션으로, 신청자의 요청에 따라 리버스 소비를 금합니다. 발각 시 비공개 전환하겠습니다.

BGM

粉ミルク-Christmas song

 

    과연, 겨울이 온 것인지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바람을 다루는 능력자이기 때문일까, 세상을 지나는 바람들은 꼭 한 번씩은 빅터 하스를 거쳐 불어가는 듯 했다. 살결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온 몸을 휘감고 지나도 빅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단지 한 번 불었다 스쳐갈 뿐인 바람으론 그를 상처 입힐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이명은 삭풍(朔風)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밤이 제법 매서워진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빅터는 공장을 나서며 걷었던 옷 소매를 내렸다. 입에선 허연 입김이 마른 입술 위를 서리처럼 밟고 나왔다. 공장 앞에 우두커니 서서 바람을 타고 눈보라처럼 내리는 눈에 겹친 반달에 멍한 시선이 갔다. 함께 일하는 공장 노동자들이 서로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 받으며 쌓인 눈에 발자국을 남기고 지나갔다. 좋은 성탄절 보내세요. 누군가 빅터에게도 같은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고갯짓으로만 인사하고 뒤로 물러 공장 벽에 기댔다. 원래의 그라면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공장을 떠났겠지만, 마음 속 어딘가 말로는 약속되지 않은 일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딱히 그러자고 미리 정해둔 것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이어진 일에 대한 관성적인 믿음이었다. 내심 어딘가 멋대로 만남을 기대하는 자신이 싫어서 매일매일 새로운 변명을 누더기처럼 붙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이질적인 바람의 흐름이 느껴질 때까지 그는 기다렸다.

 

    "빅터!"

 

    멀리 북풍을 가르고 이쪽으로 날아오는 카를로스 오테로가 보였다. 그는 빅터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땅에 가뿐히 착지했다. 싸늘한 날씨 탓인지 그는 내리자마자 양손을 비비며 입김을 불었다. 빅터는 벽에 기댄 몸을 일으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입에선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지만, 오늘도 만나서 다행이라고. 그는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하, 그렇게 입고 다니니까 당연히 춥지."

    "그런가? 너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난 안 추우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하면서 빅터는 혹시나 몸을 떨지 않도록 몸을 딱딱히 굳혔다. 그에게 만큼은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간단한 사실이라도. 그래도 바람에 하염없이 펄럭이는 그 조끼가 영 신경쓰여, 그는 참지 못하고 조끼 양쪽을 잡아 여며 잠궈 줬다.

 

    "조끼라도 잠그고 말하든지."

    "어잉? …그, 그래. 고마워, 빅터."

 

   얼빠진 대답이 돌아오고 나서야 빅터는 제가 저도 모르게 그를 배려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제 감정의 잔여물이 묻은 지퍼를 홱 팽개치고 짐짓 아무것도 아닌 척 먼저 하늘로 떠올랐다. 그 탓에 반 정도 잠근 지퍼의 나머지는 본인이 스스로 올려야 했다. 그래도 그 퉁명스러운 배려가 퍽 기꺼워 카를로스는 그의 등 뒤로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바람의 길을 타고 하늘을 날았다. 빅터 하스는 낮에는 어린 노동자여도, 밤엔 학생이었기에 집으로 돌아가거나 멋대로 길을 떠돌 순 없었지만 그는 언젠가부터 이렇게 일이 끝난 후의 하늘을 함께 나는 것이 즐거워 때때로 지각도, 결석도 하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지붕 위를 날며 거대한 도시를 손 안에 담는 것이 즐겁다고 말하곤 했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었다. 혼자라면 보지 않았을 풍경도 둘이선 보게 되었기에 그는 이 도시의 어떤 낮은 아름답다는 것을, 어떤 밤은 추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야 비로소 도시는 빛을 찾고 슬럼가는 어둠을 되찾았다. 카를로스 오테로, 그가 있어야지만 빅터 하스의 세상엔 색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것도 언제나 한 순간 뿐이었다. 이 도시의 풍경 따윈 그를 속으로 혼자 밀어내고자 외면할 때나 눈에 들어왔다. 주변이 오색 찬란하게 빛나더라도, 빅터 하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카를로스 오테로 뿐이었다. 물건을 파는 잡상인의 호객소리, 어린 아이들이 울고 웃는 소리, 공장이 돌아가는 소리, 어딘가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고통받는 목소리가 들리더라도 빅터 하스의 귀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카를로스 오테로의 목소리 뿐이었다. 그의 주변에서 부는 바람은 그저 스쳐지나는 바람들과는 달랐다. 오로지 그 바람만이 그를 웃고, 울게 할 수 있었다. 오직 그 바람만이. 그를 상처 입힐 수 있었다.

 

    "빅터, 내일 뭐해?"

    "내일?"

    "크리스마스잖아, 내일! 난 내일 한가하거든. 그래서, 괜찮다면…."

 

    하늘에선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빅터는 카를로스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볼 때 쯤에나 저도 모르게 쭉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을 알았다. 마주친 시선이 아파서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사방은 겨울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함께 휘몰아 치는데도 어딘가 화끈거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카를로스는 저 때문에 그가 고개를 돌린 것을 알아챈 것인지, 고개를 돌려 앞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같이 보내지 않을래?"

    

    어딘가 속이 울렁였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나는 것이 멀미가 난다든지 하는 어이없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로서 말하자면, 기회가 온 것이었다. 크리스마스라고 공장이 쉴 순 없었기에 공장장은 조금 월급을 더 보태주겠다고 했지만, 사정을 설명하고 고개를 숙여 빅터는 어렵게 휴가를 받았었다. 쉬는 일이 거의 없는 빅터였기에 공장장은 휴가를 허락했다. 딱히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진작에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저 천에 하나 있을, 만에 하나 찾아올지도 모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소심하게 시간을 비운 것에 불과했다. 그는 그 정도로 겁쟁이였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두렵게 했는지 그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말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단어가 목에 걸린 듯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들은 전부 빗나간 투덜거림 뿐이었다. 카를로스가 먼저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래도 굴러온 기회를 놓칠 순 없었기에, 빅터는 제안을 수락했다. 조금 고민하는 척 하며.

 

    "내일은 공장이…"

    "엑, 크리스마스에도 일해?!"

    "…모처럼 쉬니까, 그럴까."

    "아니, 정말! 자꾸 놀릴거야?"

 

    말을 끝까지 안 들은 건 너잖아. 그는 발끝에 힘을 줘 멈추고 카를로스를 바라보았다. 이쯤 오면 그와 헤어져 반대 방향으로 가야했다. 사실, 가장 빠르게 야간 학교로 가려면 진작에 공장에서부터 다른 길로 가야했지만 그에겐 중간까진 방향이 같다며 대충 둘러댔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시간을 돌아가는데 허비하더라도 괜찮았다. 빠르게 학교로 직행해 책을 읽는 것 보다도 중요한 게 있었으니까.

    어쨌든, 내일 만난다면 구체적인 약속을 잡아야 했다. 언제 만날지, 어디서 만날지와 같은 것들. 만나고 나면 할 일은 어디서든 솟아 올랐기 때문에 만날 적의 약속만 잡아두어도 괜찮았다. 빅터는 제가 멈추자 따라서 선 카를로스에게 물었다.

 

    "그럼, 언제 만나지?"

    "너무 아침이면 네가 피곤할테니까… 점심 쯤 만나는 게 어때?"

 

    그는 아침을 의미없는 휴식으로 보낼 것이 내심 아쉬웠지만, 내색할 순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광장 시계탑 앞."

    "좋아! 광장도 성탄절 분위기가 물씬 나더라."

 

    밤 산책은 거기까지였다. 내일의 약속을 간단히 나누고, 카를로스는 이만 가보겠다며 저 건물 너머로 날아 사라졌다. 우두커니 혼자 하늘에 남은 빅터는 한참이고 그가 날아간 궤적을 바라보다 더 높은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날아다니니 확실히 땅 위에 서서 걸을 때보다 별도, 달도 가까워 보였다. 밤하늘을 보며 감상에 젖는 일은 거의 하지 않지만 그가 없어지고 빠르게 찾아오는 외로움이나 씁쓸함을 달랠 것은 하늘 위에 뜬 것들 뿐이었다. 그래도 다른 날과는 다르게 조금은 마음이 들떴다. 그에게 크리스마스란 그저 거리가 조금 더 소란스러워져 하늘 위가 더욱이 적막하게 느껴질 뿐인 기념일이었지만 카를로스가 함께 있다면 그의 성탄절도 거리의 캐럴처럼 즐거울 듯 했다. 다가올 내일의 해를 기다리게 된 것 역시,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 였다.

 


 

    결국 어젯밤은 잘 자지 못했다. 항상 입는 옷은 거기서 거기였는데도 괜히 썰렁한 옷장을 뒤적이기도 하고, 내일 같이 할 것을 찾기 위해 창문을 열어 밖을 바라보기도 했다. 물론 그가 학생으로서의 일과를 다 마치고 집에 들어갈 땐 이미 조명도 꺼질 늦은 시간이었기에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새벽 하늘의 색이 변하는 것을 보다 겨우 잠든 것도 금방 금방 깨버렸다. 깰 때 마다 그는 혹시나 약속에 늦진 않았을지 화들짝 놀라며 다 낡은 시계를 몇 번이고 쳐다보곤 했다. 그래서 그는 이른 아침 이후론 자리에 눕지 않고 일어나 약속 시간을 기다렸다.

    아침이 되자 온 거리에 캐럴이 크게 울렸다. 길을 꽁꽁 얼리는 눈도 크리스마스에 만큼은 축복이 되지 않던가. 딱 좋게 어제에 이어 오늘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어째서인지 내리는 눈도 어제와 같은 눈보라가 아니라 포근한 함박눈처럼 보였다. 어린 아이들이 꼭두 새벽부터 일어나 눈밭을 뛰어다니며 서로 눈을 던지고, 눈사람을 만들며 놀고 있었다. 크고 작은 장식들이 가득 달린 트리들이 종종 길가에 보이기도 했다. 장사꾼들은 이른 아침부터 밖으로 나와 가판대를 세웠다. 크리스마스… 인가. 그는 창문을 반 정도 열고 바깥을 보며 새삼스레 크리스마스를 실감했다. 크리스마스는 작년에도, 그 전 해에도 있었을테지만 그의 나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행복하고 따듯한 성탄절 따윈 기억에 없었다. 일을 하거나, 그저 방 어딘가 틀어박혀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누군가를 어린 마음에 저주한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오늘은. 그에게도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될 터였다.

 

    광장도 성탄절 분위기가 물씬 났다. 큰 시계탑 앞엔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였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꽉 묶인 장식들도 제법 화려했다. 장식들 아래엔 지나가는 행인들의 소원을 담은 쪽지들이 가득했다. 아마도 다가오는 내년을 위한 소원 쪽지이리라. 빅터는 모처럼 먼저 도착해 남는 시간을 쪽지 적는데 보낼까 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사람이 없는 광장 가장자리에 서서 카를로스를 기다렸다. 소원 따위. 바라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원을 종이 따위가 이루어줄 리가 없었다. 몇 번이고 바라고 기도했던 나날들이 헛되게 하늘은 그에게 아무것도 이루어주지 않았다. 하늘도, 별도, 종이도, 점도, 무엇도.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뿐이었다. 빅터 하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올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오는 내년을 맞이하며 소원을 적고 장식 아래 줄줄이 매다는 것을 비웃거나 바람에 날리는 소원 쪽지들을 저주하지도 않았다. 관계없는 곳에 화풀이를 하지 않고 행복한 누군가를 저주하지 않는 정도만큼은, 그도 성장했으니까.

    다행히 오래 기다리진 않았다. 빅터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카를로스의 뒷모습을 단번에 찾아냈다. 그를 기다리고 있어서 였을까? 아니면…. 빅터는 소리를 내서 그를 부르려 했으나, 바로 그 순간 카를로스는 홱 뒤돌아 그와 눈을 마주쳤다. 맑게 웃는 얼굴은 어제도 오늘도 여전했다. 어째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단번에 찾아낸거지? 그는 여전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빨리 왔구나, 빅터! 오래 기다렸어?"

 

    빅터는 대답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실제로 오래 기다렸다고 해도 그는 한 번도 내색한 적 없었다. 무더위에 땀이 주륵 흘러도, 추위에 귀까지 새빨갛게 얼어도 그는 본인도 이제 막 온 참이라고 대답했다. 발이 빠른 카를로스가 약속 시간을 어긴 적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그는 항상 빅터보다도 늦게 도착했다.

 

    "우선… 뭐 할까? 저쪽 시장가 구경거리도 꽤 많고 제법 재밌어 보이던데. 가볼래?"

    "재미 없으면 돌아간다? 가자."

    "아니, 아무리 그래도 돌아가는건 잠깐잠깐, 어딘지 알고 가는거야?!"

 

    시장이야 당연히 알지. 빅터는 앞서 걸었다. 발에 바람을 실으면 더 빨리 걸을 수 있었지만, 그는 부러 땅에 발을 붙이고 걸었다. 그것은 카를로스도 마찬가지였다.

 

    말대로, 시장은 평소보다도 붐볐고 소란스러웠다. 그 소란이 평소엔 괜스레 짜증이 났지만 오늘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사람이 붐볐기에 빅터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라는 핑계로 카를로스를 붙잡고 걸을 수 있었고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핑계로 그 목소리를 더 크게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가득한 노점상을 지나며 간단히 점심을 때우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식당에 가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이대로 걸으며 눈에 들어오는 대로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며 걷는 것도 좋아보였다. 작은 닭튀김이나 꼬치를 사 먹기도 하고, 따듯하게 구운 고구마를 반씩 나눠 호 불며 먹었다. 그런가 하면, 지붕 위에 앉아 온 몸이 시리도록 차가운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사먹기도 했다.

 

    "어우, 이 시려!"

    "그러길래 이 겨울에 아이스크림은 추울거라고 했잖아?"

    "하지만 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이 제일 맛있잖아!"

 

    어딜 가나 어린 아이들이나 연인들, 혹은 무리 지은 사람들이 벤치를 차지하고 있어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앉을 자리를 찾는 것도 곤혹이었겠지만 그들에겐 그다지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땅 위에 설 자리가 없다면 하늘 위에 서면 되니까. 하늘은 새와 거대한 기계들만의 전유물이었기에 그 속을 침투해 마음껏 헤집을 때마다 그들은 이 너른 하늘을 지배하는 것 같은 만족감을 느꼈다. 그곳에선 누군가와 부딪힐 일도, 말 다툼을 하거나 간섭 받을 일도 없었다. 누군가와 앞다투어 경쟁할 필요도. 찬 바람조차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럴 땐 결단코 빼앗기지 않을, 언제든 그들만을 위해 열려있는 명당을 맡아놓은 기분이 들었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면 넓은 길가도 좁아보였고, 아직 어린 저들보다도 훨씬 큰 어른들도 작게만 보였다. 손바닥 안에 세상을 쥔 것 같은 기분도 그들만이 아는 짜릿한 쾌감 중 하나였다.

 

    "역시 벤치 보단 이곳이 좋지?"

    "뭐… 확실히. 여긴 한적하니까."

 

    그는 그 이유에 카를로스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쏙 빼고 얼버무렸다.

 

    "하핫! 그런 것도 있지만, 나는. 이렇게 지붕 위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즐거워. 원래도 그랬지만…"

 

    네가 있어서 더 즐거운 것 같아.

 

    빅터는 멈칫 굳은 채 지붕 아래를 쳐다보는 카를로스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어딘가에서 읽다 버린 싸구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온통 잿빛으로 멈춘 세계 속에 살아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그들 뿐인 것 같았다. 어디선가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맞은 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멋스럽게 감은 레게 머리를 흔들었다. 너른 세계를 보는 그 눈은 맑게 반짝였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콘을 타고 손까지 기어 내려왔지만, 그 기분 나쁜 찝찝함도 잊고 빅터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카를로스가 뭐라고 더 중얼였지만, 머릿속은 오로지 자신이 있어 더욱이 좋다는 말 뿐이었다. 바보처럼 솔직한 그가 건넨 그 말에 빅터가 기대하는 그런 감정은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랬다. 아마도 카를로스는 이제껏 홀로 이 풍경들을 봐왔기에 누군가 곁에 있는 것에 익숙치 않은 것을 즐거운 기분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걸 빅터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목 아래서 들끓던 날 것의 감정이, 아주 조금의 자극만 있으면 터져 나올 것처럼 목을 타고 기어이 혓바닥 위를 무겁게 눌렀다. 얼간이처럼 입술을 마구 들썩였다. 그 스스로는 몰랐겠지만 얼굴이 터질듯 달아올라 있었다. 아, 그래. 그는 그제서야 그 술렁거림의 이유를 찾아냈다. 아니,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서도 인정하지 않으려 외면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는 어디가 고장난 기계처럼 삐그덕 거리면서도 확실하게 그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왜? 저기 스트릿 공연 중이야, 빅터! 같이 춤 추고 오지 않을래?!"

    "뭐, 뭐?"

 

    잠깐, 난 춤 같은 건…! 말리는 것도 이미 늦어 그는 이미 카를로스에게 붙잡힌 채로 끌려 땅으로 내려갔다. 둥글게 모인 인파의 한가운데에서 계절감을 잊은 듯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라디오로 크게 힙합을 틀고 춤을 추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도, 어린 아이들도 아무런 장치도 없는 스테이지에서 노래와 아무 상관 없이 즐겁게 춤을 췄다. 카를로스는 못 참겠다는 듯 인파 사이를 뚫고 무대로 뛰어들어 신나게 춤추기 시작했다. 중간에 사람들 사이에 막혀 튕겨 난 빅터는 별 수 없이 물러나 옆의 건물 지붕에 올라갔다.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없는 게 퍽 아쉬웠지만 맨 앞에서 구경했다간 저를 끌어들일 것이 뻔해 이쪽이 좀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혼자가 되어서야 얼굴이 화끈거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다 먹지도 못하고 녹은 아이스크림도, 진정시킬 길 없이 요동치는 심장도. 그는 그때 인정했다. 멀리서도 그가 오는 것을 느끼고, 하늘을 날때도 그의 모습만이 보이고,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를 가장 빨리 찾을 수 있는 이유를.

 


 

    공연은 한참이고 이어져 이른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다. 여름이라면 아직 해가 밝았겠지만, 동지가 지난 무렵이니 이른 시간에도 해가 져 가로등이 길을 밝혔다. 그리고, 꺼질 줄 모르고 빛나는 리본 달린 노란 전구들도. 지치지도 않는지 카를로스는 함께 춤을 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모인 사람들이 완전히 해산되었을 때 빅터는 지붕에서 내려가 카를로스에게 다가갔다. 줄곧 외면했던 사실을 인정하자 행동 하나에, 단어 하나에 서로 다른 가짜 이유를 갖다붙이지 않아도 되어서 더이상 머릿속이 복잡하지도, 혼란스럽지도 않았다.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웃는 법도 알게 되었는지 그는 옅지만 확실하게 웃고 있었다.

 

    "빅터!"

    "아주 신나게 추던데.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좀 생각하지 그래?"

 

    아, 그건… 말은 그렇게 했어도, 웃으며 얼버무리는 카를로스가 밉거나 하진 않았다. 카를로스는 땀 흘리며 라디오와 전선을 정리하는 공연진을 도와 뒷정리를 함께하고 서서 기다리는 빅터에게 돌아왔다. 그는 지친 기색 없이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말했다.

 

    "아까 크리스 형한테 들었는데, 시계탑 앞 트리에 소원을 적어서 매달 수 있대! 거기 가보자, 빅터!"

 

    어느새 통성명까지 마친건가? 빅터는 점심에 그를 기다리며 봤던 광장 트리를 떠올렸다. 소원을 쓸 생각은 없었지만, 카를로스가 하고 싶다는 걸 거절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가자며 돌아섰고, 이제는 먼저 앞서 걷지 않았다. 그들은 나란히 걸어 시계탑이 있는 광장으로 돌아갔다.

 

    광장은 시장가 보다도 훨씬 밝았다. 가로등도 더 많을 뿐더러 길가에 걸린 전구나 주변 노점 상인들이 켜놓은 등불이 많은 탓이었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누군가 감아둔 것인지 점심 땐 없던 오색 전구들이 줄줄이 걸려 더욱 화려했다. 장신구 아래 걸린 종이들도 훨씬 많아져 바람을 타고 제각각의 방향으로 날리는 것이 장관이었다. 카를로스는 파란색 종이를 집어 보이지 않게 손으로 가리고, 몸을 숙여 마커로 한 자 한 자 정성껏 뭔갈 적었다. 소원을 적는건가? 새삼스럽게 빅터는 그 종이에 무슨 소원을 적었을지 궁금했지만 구태여 훔쳐보거나 묻지 않았다. 나중에 몰래 열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예의도 아닐 뿐더러 이렇게 많은 파란색 종이 쪽지 중 그의 것을 콕 집어 찾아낼 자신도 없었다.

 

    "빅터, 넌 안 적어? 소원!"

 

    낮에 생각한 것이 하루 반나절 만에 바뀐 것도 아니었기에 사실 그는 소원을 적을 생각은 없었지만, 카를로스의 권유를 거절하고 싶진 않아 머뭇거리며 트리 옆에 설치된 간이 테이블로 다가갔다. 종이도 오색깔로 준비되어 있었고, 마커도 검은색 뿐 아니라 파란색, 빨간색 마커도 있었다. 그 사이 말라서 나오지 않게 된 마커도 있었지만… 그는 검은색 마커와 초록색 종이를 골라 카를로스의 옆에 섰다. 소원. 소원을 종이가 이루어줄 리가 없어. 그럼 누구에게 무슨 소원을 빌면 좋은걸까. 걱정거리? 건강? 돈? 사랑? 소원 따위. 그는 마커 뚜껑을 열고, 망설임 없이 종이에 또박또박 적었다. 손으로 가리지도 않았고, 몸을 숙여 남들이 보지 못하게 하지도 않았다. 몰래 적을 필요도, 못 보게 가릴 필요도 없었다.

    그는 종이를 쪽지 모양으로 접어, 공중으로 날아 가장 위에 걸린 별에 쪽지를 거는 카를로스의 곁으로 갔다. 나란히 실에 묶어 별에 건 쪽지가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 가장 위에서 날렸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고 웃곤 그대로 하늘로 올라 광장에서 사라졌다.

 

    서로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적은 쪽지를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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