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한 글씨

ETC.2023. 9. 6. 21:28

   소녀는 병약했다. 그 병약한 몸으로 멀쩡히 이 지옥도를 관리할 수 있는 것은 염라 본인 보다는 야차 덕분이었다. 야차는 소녀를 포함하여 네 명의 염라를 지켜왔고 그만큼의 연륜이 쌓여 기계인형임에도 지옥도의 마귀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귀찮고 자질구레한 일들은 전부 도맡아 했고 이 산을 벗어날 수 없는 염라 대신 현실의 일들을 처리하는 것도 그것의 일이었다. 다만 최근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살아 있는 것이 멋대로 지옥도에 들어온 탓이었다. 야차는 첫눈에 소년이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 숨쉬고 있음을 알았지만 구태여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염라는 모를 것이다. 하여, 야차는 다른 마귀들처럼 평범하게 계약을 맺어 머물 것을 허락했고 염라는 반가이 여기고 그 이름을 서명했다. 원래 살갑고 천성이 부드러운 소녀는 동년의 나이로 보이는 소년을 특별히 좋아하여 따라다니고 곁에 두었다. 그래서 소녀를 돌보는 일은 자연히 소년의 일로 바뀌었다. 어차피 그런 계약이었고 소년 역시 불만은 없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지옥도에 들어왔고 언제든지 이곳을 떠날 수 있음도 알았다. 그러니 지금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 될 것이라고.

 

   "⋯⋯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말이야."

   "무슨 문제 있나?"

   "있지. 이 만화들은 대체 어쩌라는거야?"

   "염라께서는 한자를 읽지 못하신다. 요미가나(読み仮名)를 달아서 드려야 해."

   "만화를 안 읽히면 되잖아?"

   "그럴 순 없다. 어디서 들었는지 삼국지를 읽고 싶다는데 염라께서 삼국지를 글로 읽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러고보니, 우르르 쌓여있는 것들도 '만화로 쉽게 읽는 삼국지' 라는 제목의 어린이용 교육 만화였다. 센은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가볍게 슥 훑었다. 아동 만화 답게 한자는 최소화 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오랜 역사서 답게 피할 수 없는 한자들이 많이 보였다.

 

   "아니면 소설책에 있는 한자에 전부 요미가나를 달고 싶은 것인가?"

   "하면 되잖아, 하면⋯."

 

   입밖으로 볼멘소리가 샜다. 그래도 센은 순순히 펜을 들고 앉아 만화책을 펼쳤다. 빠른 속도로 읽으며 보이는 한자 위에 손수 히라가나를 한 자 한 자 적었다. 읽다가 과하게 생략되거나 각색된 내용을 발견해서 분노했다가도 인상적인 장면에는 잠시 집중해 읽기도 했다. 그 탓인지 센은 드물게 곁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놓치고 말았다.

 

   "센, 뭐해?"

   "뭐, 뭐야!"

 

   동그랗게 생긴 눈알 귀신이었다. 속눈썹이 부담스러울만큼 길어서 생긴 모습은 기괴했지만 이 지옥도에서 가장 상냥하고 온순한 축에 속하는 마귀였다. 귀신은 만화책을 흘긋 보더니 크게 반가워하며 법석을 떨었다.

 

   "삼국지잖아?"

   "너도 알아? 삼국지⋯. 염라가 읽고 싶다고 해서 한자에 요미가나를 달고 있었어."

   "물론이지. 스우에게 삼국지를 알려준 게 나인데?"

 

   너였냐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불평해도 어쩔 수 없었으나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앉아서 눈빠지게 한자나 찾고 있는 제꼴이 우스운 것도 사실이어서 원망스러운 마음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귀신은 피로해하는 센의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이쪽은 다 한 거면 내가 스우에게 가져다줄까?"

 

   그것이 도울 일은 그 정도 밖엔 없을 것 같았지만 센은 괜찮다는 말로 거절했다. 사실 부탁해도 이상할 것 없었고 일은 많고 시간은 없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왕이면 직접 가져다주고 싶었다. 직접 갖다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문득, 소년은 생각했다. 조그만 눈알이 그걸 다 옮기긴 힘들 것 같아서 거절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을 거라고. 그러나 그것이 흔하게 있는 애정의 형태는 아니었다. 소녀가 좋은 마음에 직접 얼굴을 보고 책을 건네주고 싶다고. 그렇게 순수하고 달콤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좀 더 습하고 칙칙했다. 예를 들면, 네가 만화책을 받고 기뻐했으면 좋겠다든가.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한다든가. 글씨가 알아보기 쉽게 적혔다든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빨리 가져와줬다든가. 한자 한 자도 빠짐없이 꼼꼼하게 달아주었다든가. 다음에도 또 부탁한다든가. 네가 필요하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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