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고리

COMMISSION2023. 4. 17. 14:35

   그것의 존재를 알게 된 날은 끔찍했다.

   불로불사의 전설은 실재했다. 그것은 좀처럼 세월을 타지 않고 또 일반적으로는, 죽음과도 연이 없었다. 그것은 동족의 피를 마시거나 원래 동류였던 이들의 피를 닥치는대로 마시면 강해진다. 전설과 다른 점은 그것이 낮을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날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그날은 금환식이어서 태양의 중심이 사라졌었다. 달이 태양을 가리고 남은 금색 고리가, 땅에 들이닥친 재앙을 모르는 체 하듯 은은하게 빛났더랬다. 재해는 예고 없이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였을까? 불가사의한 힘에 압도 당했던걸까? 눈앞이 불타는 공포에 몸이 얼어버렸던걸까. 아니면, ⋯.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그것은 나의 일상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그 사실만이 충분했다. 의도적으로 그것에 대한 증오심만을 남겨두었다. 괜한 의문이나 호기심이 불쑥 고개를 들이 밀어도 애써 모르는 척 했다. 그 녀석들은 쳐죽일 존재일 뿐이라고, 세월을 담은 복수의 대상으로만 여겨야했다. 그래서 날마다 금서를 찾아보고 쓸데없는 옛날 이야기들을 들춰보는 것에는 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는 그럴 듯한 변명을 붙였다.

   그것의 이름은, 진마였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열 한 명의 뱀파이어.

 

   그것의 존재는 공공연하게 드러나 있진 않았다. 마치 암흑가의 마피아와 같은 존재였다. 겉으론 드러나지 않지만 어둠의 안쪽에 분명히 존재한다. 각색을 거쳐 상상력을 담은 모습으로 미디어에 존재하고 마치 허상이나 전설처럼 기록되고 소비된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에야 그런 만화나 영화 따윌 재밌게 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영화에서처럼 근사한 코스튬을 입지도 않고 마늘이니 십자가니 하는 것에 약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설화는 언제나 현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판타지고 전설은 단지 재밌어서 오랜 역사를 생존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극이 허무맹랑하지만은 않은 것처럼 숱한 흡혈귀 작품들이 전부 다 허상은 아니었다.

   가장 전형적인 특징은 첫째로,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반 정도는 사실이다. 뱀파이어가 되는 순간부터 그들은 세월의 흐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응당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숨을 쉬고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괴물이나 다름없는 뱀파이어가 어쨌든 살아 존재하는 생명이라는 반증이었다. 어쨌든 그들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똑같이 괴물이 될 필요가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들은 괴물이다. 인간의 힘을 초월한 존재였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시간의 업을 벗고 혐오와 멸시의 존재가 된 값이었다. 똑같이 괴물이 되어서까지 죽음을 선고하는 이들을 우리는 헌터라 칭했다.

   둘째로 뱀파이어들은 흔히 창백한 피부에 아름답고 몸 어딘가에 붉은 루비가 박혀있다고들 묘사가 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날때부터 흡혈귀였던 존재는 없기 때문에 날 때부터 그런 피부였다거나 흡혈귀가 되는 순간부터 피부색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그 순간부터 생기를 잃은 밀랍 인형 같은 모습이 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니 하얀 피부라는 표현은 잘못됐고 오히려 하얗게 질려버렸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리고 빨간색 눈이니 하는 것은 순전히 망상이다. 그들은 그냥 원래 가지고 있던 눈색의 뱀파이어가 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태양 아래 약해진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태양 아래 약해진다. 아무것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약화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은 이미 인간을 초월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낮이라는 사실이 그들을 심각하게 위협하진 않는다. 그들은 한낮의 도중이라고 하더라도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강했고, 진마라면 뱀파이어 헌터들과 낮에도 호각을 겨룬다.

   그렇다 한들, 밤보단 낫긴 하다. 그들 역시 세상에 드러나고 싶어하지 않는 존재들이니까. 결국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극소수의 괴물이고 동족끼리도 의지하지 않는다. 영원한 세월을 홀로 살아가는 고독한 이들이 세상의 관심을 받고 싶을 리가 없지. 몇 년 전에는 매스컴에 당당하게 자기가 흡혈귀라며 공중파 방송을 타는 미치광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현실을 쉽사리 믿지 않기 때문에 그를 웃음거리로 삼았다. 쏟아지는 조롱과 멸시를 견디지 못하고 그는 3개월 후 자살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은 그 모습을 숨기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낸다. 그리고 그들을 암암리에 사냥하는 헌터들도 똑같이 존재를 숨기고 일상을 보낸다. 그야 얼굴이 알려져서 좋을 건 없었다. 그들은 천적이고 서로가 사냥감이기 때문에 존재가 알려지면 매우 불리해진다.

   

   헌터가 된 것도 벌써 5년이 넘었다. 끌려가는 남동생의 뒷모습과 ⋯ 를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던 그날로부터 벌써 해가 몇 번이나 바뀐 것이다. 그들의 존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치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어둠을 찾아 헤매는 것 같았다. 당연했다. 햇빛이 비추는 따스한 양지에서는 어둠이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고 나서야 그들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한 번 발을 들인 이상 다시 바깥으로 나갈 순 없었다. 그곳은 그런 약속이었고, 그런 세계였다. 처음에는 시덥잖은 마약을 나르는 드러그 소년이 시작이었다. 그러나 똑같아 보이는 마약도 몇 백 개고 나르면 범상치 않은 것들을 쉽게 찾아내게 된다. 비가 미친듯이 쏟아지던 그날에 마침내 '그것'을 찾아냈다. 분말이나 알약이 아니라 정체 불명의 팩에 담긴 붉은 액상. 그것을 하나 몰래 빼돌리고 암시장에서 도망쳤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약의 이름은 사이키델릭문이라고 한단다. 죽을 만큼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궁지에 몰린 그때에 될대로 되라며 마셨다. 그것은 인간이 뱀파이어를 이기기 위한 기적의 약 따위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자 손엔 누구 것인지도 모를 심장이 있었다. 막 뽑아내 쥔 것처럼 여전히 숨을 쉬듯 박동쳤다. ⋯고 믿었다. 이미 죽은 심장이니 살아 움직일 리가 없었다. 그러니 필시 그것이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졌던 건, 내 손에 죽음을 쥐었을 때 느낀 역설적인 생동감이겠지. 약을 되찾으려고 쫓아온 추격자들 무리는 괴멸되어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리고 흐릿하고 탁한 망상 속에서 내가 한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서야 알았다. 헌터란 마찬가지로 죽음이 박탈 된 괴물이 되는 것이라는 걸.

 

   헌터로 인정받는 것은 단 한 번의 초월로 충분했다. 그 약은 쉽사리 얻을 수 없는 것이었고 평범한 마약상은 존재조차 모른다. 그 소동이 잠재워질 때까지 몸을 숨겼다가 한참 후에 다시 암시장에 나타났다. 사냥꾼 끼리는 서로를 알아보는 능력이라도 생기는지 그제서야 '그들'이 보였다. 한 번 그곳에 발을 들이자 추적은 쉬워졌다. 헌터 끼리는 어느정도의 적당한 거리감을 전제로 한 유대감이라도 있는지 그들은 퍽 나에게 잘 대해주었다. 홀로 살아가는 암시장 들개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를 세상에서 소외시킨 자들의 얄팍한 동질감을. 동병상련이라고 해도 좋다. 어쨌든 우리는 세계의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니었으니까.

   그 놈의 이름은 히이라기 케이라는 듯 했다. 사실은 이미 닥치는대로 정보를 모았었다. 때로는 설득하고, 때로는 협박하여 알려진 것들을 긁어모았다. 알게 되면 알게 될 수록 기묘한 호기심이 치솟았다. 적을 깊게 들여다볼수록 희한하게도 그 존재를 이해하고 싶은 갈망이 생겼다. 그놈은 내 이름도 얼굴도 모를 것을 분명 아는데도 그랬다. 아니, 알기에 그랬다. 너만이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해서 화가 나는 날엔 그만큼이나 만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몇 년이고 썩은 채로 들끓기만 했던 증오는 그런식으로 곧 지독한 욕망으로 바뀌고 그 욕망은 또 다시 폭력적인 형태의 분노로 뒤섞였다. 네 이름은 뭐지? 어떤 경위로 흡혈귀가 된 거야? 무엇을 위해 살고 있지? 남동생을 데려간 목적이 뭐야. 다른 인간들도 그런 식으로 끌고 갔던건가? 그날은, 그날은 어째서.

 

   나를 그런 눈으로 본 거지?

 

   능력이 강한 뱀파이어라면 어떻게 토벌할지 걱정했는데 불안이 적중하여 세상에 단 열 한 명 있다는 진마 중 한 명이란다. 무릇 뱀파이어들은 인간의 피를 마시겠답시고 매스컴의 뒷편에서 크고 작은 말썽을 일으키는데 특이하게도 그런 적은 특별히 없다고 한다. 듣기로는, 그 놈은 인간의 피를 좀처럼 마시지 않는다던가⋯ 그러면 같은 뱀파이어의 피를 마신건가? 하지만 특별히 다른 뱀파이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다고 한다. 다른 진마들과의 접촉도 없고 적대 의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는단다.

 

   "그럼 그 새끼의 목적은 뭡니까?"

   "뱀파이어들은 힘만 센 게 아니다. 그들은 사람을 현혹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현⋯ 뭐라고요?"

   "왜, 많지 않은가. 뱀파이어들은 매우 매력적으로 생겼다는 이야기들. 그 이야기가 그냥 망상이 아닌거지."

 

   뱀파이어들은 실제로 상당히 아름답다. 뭔 개소리지? 차마 그렇게 말할 순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 시점에도 뱀파이어는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딱히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조각가들이 대리석상을 아름답게 여긴다는, 그런건가? 개인의 미적 감각을 흉볼 생각은 없었지만 빈말로라도 그들은 아름답지 않았다. 혐오감에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말했지 않은가. 그들의 하얀 피부는 병든 환자같은 창백함에 가깝고 원래의 모습을 크게 잃지도 않는다고. 그러나 불현듯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날 보았던 어떤

 

   "겉모습이 아름답다는 게 아니다."

 

   회상은 다행히 거기서 끊어졌다.

 

   "그들은 사람을 세뇌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전설이나 설화 따위엔 매혹이나 아름다움으로 표현한거지."

   "세뇌⋯ 말입니까."

   "그래. 그놈은 딱히 사냥을 하진 않아. 다만 길들이지."

 

   길들인다?

 

   "그놈은 가끔 마을로 내려와서 마음에 드는 인간이 눈에 띄면 데리고 간다. 그리고 세뇌시키고 평생을 제 애완동물로 삼는다고 하지."

   "뭐라고요? 이런, 썅! 그게 사실입니까? 그럼⋯"

   "그래. 끌려 간 사람은 지금 이미 멀쩡한 인간이 아닐거다."

 

   그는 내 은사였다. 암흑가로 돌아온 나를 가장 먼저 거둬 준 사람이었다. 그는 딱히 바라는 것도 없이 내게 제가 쓰던 총 따윌 건네주었다. 사실 총 쏘는 법은 알고 있었지만 나를 가르치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는 말에 그냥 모르는 척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처음 헌터가 된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고 내가 케이에 대한 것을 묻자 숨기는 것 없이 아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곧장 떠나려는 나를 배웅했다. 배웅길에 그는 내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탄환을 주며 말했다. 나를 죽여줄 수 있겠느냐고. 그는 이미 헌터가 된 지 30년이 넘었고 그 세월 동안 마신 사이키델릭문이 그를 이미 뱀파이어로 만든지 오래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그는 인간으로서 죽고 싶으니, 떠나기 전에 죽여달라고 청했다. 그에게 총구를 겨눈 것은 그간의 얄팍한 감사함 때문이었다. 언젠가 맞게 될 나의 최후를 미리 엿 본 것 같았다. ⋯나의 최후엔 누가 있을까. 그날 이후로 오로지 그 놈만을 쫓아 살아왔다. 인생의 끝엔 분명 너 뿐이겠지. 그러니 응당 나의 마지막엔 네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잘 것 없는 헌터의 유일한 동족혐오였다.

 


 

   그놈은 언젠가 큰 산불이 나 타버린 숲의 입구에 살고 있었다. 살고 있는 집은 딱히 크지도 않았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조금 낡고 어둑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평범하게 사람이 살 순 있을 같은 집이었다.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된 인생을 매듭짓기엔 딱 좋은 정도의 음침함이었다. 문은 잠겨 있지도 않았고 그냥 평범하게 밀자 열렸다.

 

   "뭐야, 설마 없는 건 아니겠⋯"

 

   혼잣말은 거기서 끊겼다. 정말로 맥 빠지고 예상치 못한 재회였다.

 

   "소우타!" 

 

   마당의 한 켠에 소우타가 있었다. 소우타는 잔디밭에 웅크려 앉은 채 별 의미도 없이 핀 꽃을 꺾고 있었다. 생기 없는 텅 빈 눈으로 도처에 핀 꽃들을 이미 한 웅큼 뽑아 손에 쥔 상태였다. 소우타는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소우타, 뭐하는거야! 날 못 알아보겠어?"

 

   팔을 붙잡아 매자 무서운 힘으로 손을 팩 뿌리쳤다. 그리곤 일어나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걸음걸이는 느릿하고 비틀거렸지만 확실하게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마치 돌아갈 곳이 정해진 것처럼. 발걸음이 멈춘 그 끝엔 히이라기 케이가 서 있었다. 새카만 머리에 빛이 없는 검은 눈동자. 잡으면 부러질 것처럼 얄쌍한 몸은 대리석보다도 창백했다. 첫인상은 참, 그랬다.

 

   "⋯살아있는 시체같군."

   "그게 재회의 소감인가요?"

   "⋯너, 날 기억하고 있는거냐?"

 

   그 눈엔 묘한 힘이 있었다. 사람을 끌어당기고 사로잡을 것만 같은 기묘한 힘이었다. 그 눈은 잠시 나를 향했다가, ⋯곧 소우타에게 떨어졌다. 그 시선 한 줌이 아쉬워서 나는 기어이 그에게 묻고 말았다. 날 기억하느냐고. 나는 아마 어떤 대답을 기대했던 것 같다. 마치 그것을 아는 것처럼 히이라기 케이는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나요. 하지만 이 아이와 똑 닮았잖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강아지를 귀여워하듯 소우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우타는 그의 손에 얼굴을 부비며 제 손에 가득 든 이름 모를 들꽃들을 케이에게 내밀었다. 이게 말로 들었던 세뇌인가.

 

   "주인님⋯"

 

   생각도 하기 전에 총탄을 날린 것은 분노 때문일까. 그것에 남동생이 희롱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한 정당한 분노라는 이유를 붙였다. 그래야 총을 쏜 그 순간에 그놈의 시선이 잠깐이라도 이쪽을 향한 것에 대한 기쁨을 감출 수 있으니까. 이유가 어쨌든 그 총알은 싸구려 협박이나 겁박보다도 확실한 선언이었다. 그것은 첫째로 억지로 끌려 간 남동생을 구하는 일이고, 둘째로⋯ 이 진마와의 관계를 명명하는 일이었다. 히이라기 케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제 다리에 달라붙어 뺨을 부비는 소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귓가에 창백한 입술을 대고 속삭였더랬다.

 

   "우리의 시간을 방해하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리곤 허리춤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얄쌍한 과도 정도의 크기였는데 서슬퍼런 날이 옅게 드는 햇빛을 튕겨냈다. 설마, 소우타에게 칼을 대려는건가? 손은 생각보다도 빠르게 총구를 겨눴지만 이후에 이어진 행동이 너무나 기괴해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흡혈귀는 비죽 웃더니 순식간에 칼로 제 혀를 갈라냈다. 길게 내 뺀 혀에 난 상처에서 핏물이 넘쳤다. 그리고 넘쳐 흐른 피가 채 입술 밖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가엾은 남동생은 그에게 입을 맞췄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으려는 것처럼 애걸하게 매달려서 그 입술을 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도 소우타에게 응하는 것처럼 그 양 뺨을 마주 잡고 가쁜 숨 사이로 입술을 밀어 넣었다. 피가 넘쳐 흐르는 더러운 혀로 소우타의 입술을 핥고 입속을 헤집었더랬다. 그리고 마주 잡은 손에 은밀하게 제 피가 뚝 뚝 떨어지는 작은 칼을 쥐어주었더랬다. 인간은 뱀파이어의 피를 마시면 흡혈귀가 되어버린다. 이미 저런 식으로 몇 번이고 피를 받아냈던 걸까. 그렇다면 이미

   내가 바랐던 소망은 이미 오래 전에 부서져버린 듯 했다. 소우타를 그 혐오스러운 족속에게서 구해내고 평범한 행복을 돌려주는 것, 방아쇠를 당긴 것은 치밀어 오른 부아 때문이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미 나의 모든 것을 앗아 간 흡혈귀가, 하나 남은 가족을 더럽히려 드는 모습을 차마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었다. 총알이 나간 소리보다도 빠르게 이쪽을 돌아 본 것은 소우타였다. 소우타는 케이를 옆으로 밀치고, 칼을 들고 덤벼들었다. 초점 없는 눈을 부릅 뜨고 미친 사람처럼 팔을 마구 휘두르며 나를 향해 돌진해 왔다. 소우타는 위협적인 체격도 아니었고 싸움을 잘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그래. 소우타는 뱀파이어였다. 그러니 예전처럼 평범한 몸놀림은 아닐 것이다. 소우타가 받아 내 온 피는 다른 것도 아니고 진마의 피였다. 그러니 분명히 평범한 뱀파이어와는 차원이 다르리라. 한 차례 칼부림을 피해 뒤로 물러서고, 가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약병을 꺼낸다. 다음 순간에 목을 뒤로 빼며 손으로는 약병을 따고, 그대로 발로 상대방을 차서 날린다. 일련의 동작은 슬로우비디오처럼, 그리고 약속된 연극처럼 딱딱 들어맞았다. 그리고 상대가 떨어진 작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약을 한 번에 들이킨다.

   약효는 빠르게 돌았다. 발끝이 불타듯 뜨거웠다. 그리고 불길은 서서히 다리를 타고, 허리를 지나 가슴을 뜨겁게 지폈다. 단전에서 초자연적인 힘이 솟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정신이 희미하게 꺼져갔다. 물론 이 몸은 전신이 흉터 투성이가 될 정도로 많이 싸워왔고 설령 눈을 감고 있더라도 기척을 느끼고 반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멀쩡한 정신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움직일 순 없게 됐다. 내가 패고 있는 것이 돌인지 나무인지 원수인지 사랑하는 남동생인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게 차라리 기껍게 느껴지긴 했다. 얄궂은 운명이었다. 소우타는 이미 뱀파이어가 됐고, 나는 그들을 사냥해 연명하는 헌터였다. 나를 기억하는 것도 아니었다. 충직하게 따르는 것은 그토록 증오했던 진마였다. 그러니 생각을 해서 무엇할까. 행동에 망설임이 생기기만 할 뿐인 나만의 핸디캡에 불과했다. 목이 타듯이 뜨거웠다. 뱀파이어의 피를 마시면 목이 탈 듯이 뜨겁다는데 그 말이 딱 맞는 듯 했다. 그래, 이게 너무나도 끔찍했다. 뱀파이어를 사냥하기 위해 내 자신이 뱀파이어가 되어가는, 이상한 모순의 굴레. 그것이 화가 나서 유리병을 집어 던졌다.

   소우타는 분명 여타 뱀파이어보다 뛰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진마의 피를 마셨지만 진마에는 조금도 미치지 못했다. 특히 약을 먹고 난 헌터에게 진마가 아닌 뱀파이어는 사냥감, 그 이상이 아니니까. 어떻게 팼는지는 기억이 희미했다. 말했지 않는가.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마지막 순간에 그 심장에 손을 찔러 넣어 붙잡고 터트렸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느낀 살아있던 심장의 박동은 징그럽고 끔찍했다. 그것이 사랑하는 가족의 것이라면 더욱이 그랬다. 뿌옇게 흐려진 의식에서도 그 감촉만이 너무나 생생해서, 팔을 관통한 칼날을 기쁘게 여겼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남는 손으론 팔에 박힌 칼을 더 깊게 찔러넣었다. 칼은 완전히 팔을 뚫고 박혀서, 터진 심장을 쥔 팔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아파서일까. 아니면, 괴로워서일까. 심장을 빼앗긴 소우타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제 매듭을 지어야했다. 분명 나는 히이라기 케이를 만나기 위해 살아왔다. 평범한 삶을 집어던지고 비일상으로 들어가 위험에 몸을 담그고 폭력으로 점철된 끔찍한 생을 선택했다. 그것에 나는 소우타라는 이름을 붙였다. 남동생을 구하고 다시 데려오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그것으로 나의 행복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나의 은사는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이미 소우타는 인간이 아닐 것이라고. 굳이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알았다. 차라리 찾지 않는 것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것이 죽음보다 나은 행복이라면 나타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거야. 하지만 나는 구태여 이곳에 왔고, 히이라기 케이 앞에 섰다. 이제 나에게 그럴 듯한 핑계는 사라졌다. 그러니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내가 넋을 빼앗기고 말았던 이유는, 내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남동생 때문이 아니라

 

   "아주 박살을 내버렸군요. 남동생과 딴판이네."

   "왜. 닮았다며? 나로는 안 되나?"

 

   히이라기 케이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날처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워서. 나는 또 다시 넋을 빼앗겼다. 눈 한 번 깜빡이지도 못하는 내게 다가온 케이는 소름끼치리만큼 차가운 손으로 터진 심장이 들린 내 손을 잡고, 그대로 올려 피가 줄줄 흐르는 손가락에 입맞췄다. 그가 피로 점철된 내 손가락을 핥고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조금 오래 걸렸다. 그리고 단숨에 내 팔에 박힌 단검을 뽑아냈다.

 

   될 리가 있나요. 당신은 이미 더럽혀진 몸인데.

 

   그렇게 속살거리곤, 내 심장에 그 칼을 꽂아넣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이것은 약 때문인가? 이 모든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잔디밭에 쓰러져 있다는 걸 알기 까진 조금 오래 걸렸다. 희미한 시선 끝에 잠든 남동생이 걸렸다. 소우타는 그날처럼, 정체불명의 흡혈귀 손에 끌려가고 있었다. 다만 그때처럼 소리치면서 내 이름을 부르진 않았다. 그저 늘어진 인형처럼 바닥을 질질 끌렀다. 그 순간에 나는 알 수 없는 희열에 차서 고개를 들었던 것 같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보고 싶었다. 옅게 비치는 태양빛 아래의 아름다운 뱀파이어를. 그날 고리가 되어버린 태양은 마치 광채처럼 히이라기 케이를 비췄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그것이 마치 무언가의 현신처럼 느껴졌다. 어떤 신적인 존재가 무언가를 인도하는 것처럼 내게 내려와 비밀스럽게 속삭이는 듯 했다. 그것은 내가 보았던 그 어떤 빛보다도 밝았고, 신성했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히이라기 케이가 마치 그날처럼, 이쪽을 한 번이라도 돌아보길 바랐다. 단 한 순간이어도 좋으니 나를 봐주었으면 했다. 그 음습한 욕망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히이라기 케이는 한 차례도 이쪽을 보지 않고 그대로 멀어져갔다. 

 

   마지막으로 본 하늘은 어느새 새카맸다. 분명 낮일텐데도 하늘은 빛 한 점 없이 까맸다. 마치 개기일식의 한낮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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