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꽃 질 무렵에

COMMISSION2022. 2. 24. 16:06

BGM

Roel-벚꽃연가

 

   인자 풀 때 됐다이가!

 

   끈은 풀렸다. 이 손으로 풀었다. 너는 참 맑게도 웃었다. 웃으면서 하는 말은 잔인했다. 헤어지는 것도 갈캬주야제, 이왕이면 성심성의껏, 끝까지. 그 끝엔 나 밖에 없단 말을 붙였다. 또 그 말을 이길 수 없어 정말로 성의껏 풀어냈다. 고작 끈일 뿐인데도. 아주 얇고 길지도 않은 끈이라 만지면 끊어질 것만 같아 손끝으로 잡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묶었던 만큼 풀어내는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마음과는 다르게 끈은 너무도 쉽게 풀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풀어진 끈은 잡을 새도 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닥에 닿을 때 방울 소리가 났다. 고양이에게 방울을 다는 이유,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서. 이제는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어졌다.

   이 끈을 묶을 때와 마찬가지로 끈을 풀었다고 해서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푸는 순간엔 마음이 술렁였지만 그 뿐이었다. 여전히 달이 지면 해가 떴고, 해가 질 때면 달이 떴다. 계절도 항상 그렇듯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오면 장마가 왔다. 장마도 영원하진 않아서 하루가 멀다 쏟아지던 비도 유월의 끝무렵엔 거짓말처럼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비가 그칠 무렵에 네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막대기에 작게 묶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떠났다. 그러곤 들고양이처럼 내키는 때에 돌아오곤 했다. 장마가 끝날 쯤이면 항상 '잠깐의 마실'이 있었지만 한 번도 잡지 못했다. 어쩌겠는가. 끈을 묶어달라고 한 것은 너였고, 끈을 묶은 것은 나였다. 풀어달라고 한 것은 너였고, 푼 것은 나였다. 끈이 풀려 떨어질 때 알았다. 들짐승을 집 안에 들인 대가는 언젠가 반드시 올 이별이라는 것을.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어깨 쯤 까지 오는 담장 옆까지 나와 배웅하는 것, 그리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게 이곳을 지키는 것. 돌아오지 않더라도 또 새로운 안식처를 찾길 기도하는 것. 배웅하는 것은 쉬웠다. 이곳을 줄곧 지키는 것은 쉽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할만 했다. 기도하는 것 만큼은 어려워서 한 번쯤 성공할 법 하다가도 번번이 실패했다. 네가 결국 새로운 장소를 찾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라도 이곳에 돌아오길 바랐다. 바깥은 춥고 낯설다면서 이곳이 따스하고 편안하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역시 이 곁이 좋다면서 다시 한 번 웃어주길 바랐다. 손바닥만한 방울끈은 그렇게 길게 늘어지며 너의 발목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 겨우 입 밖에 나온 말은 고작,

 

  …다녀오거라,

 

   하는 시시한 인사였다.

 

   하루, 이틀. 이번 마실은 길게 이어졌다. 시간은 이전과 똑같이 흐르고 있을텐데도 마냥 늦게 흐르는 듯 했다. 혼자 있는 집은 넓게만 느껴졌고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사람 하나가 숨쉬는 소리는 잔잔하게 내리는 장마 끝물의 소나기에 묻혀 사라졌다. 그래, 또 비가 왔다. 이 비에 걷는 길은 괜찮을까. 우산은 가지고 나갔던가. 여정이 험난하진 않을까. 비를 맞고 감기에라도 걸리는 것은 아닐까, 젖은 옷 대신 입을 옷이 있긴 할까. 신발은, 짐은…… 걱정은 끝도 없이 이어지다, 결국 추잡한 본심에 가서야 멈췄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니 돌아오진 않을까, 하고. 홀로 있는 적막함이 싫어 한참이고 우산을 들고 너를 배웅했던 그 담장 옆에 서 있었다. 밤이 되자 비는 그쳤다. 비가 그치자 어두운 밤길을 핑계로 등불을 들고 서 기다렸다. 늦은 밤까지 그곳에 서 있다가 이웃집 불이 다 꺼질 쯤에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또 다시 외로움이 찾아 들었다. 더이상 따듯하지 않은 안방에 이불을 두 자리 깔고 누웠을 쯤엔 다시 깨닫고 만다. 참 지독하게도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품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스스로가 그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었다. 태양처럼 웃는 얼굴이나, 살갑게 부르는 목소리, 곁에 웅크린 작은 온기는 잔비처럼 잔잔히 일상에 스며들었다. 항상 곁에 있다는 익숙함에 속지 않기 위해 부던히 애썼다. 사랑에 멀어 조바심내고 매이는 모습 같은 건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가지고만 있어도 괜찮다, 고. 그런 주제에 네게도 내가 소중하고 이 앞으로도 쭉 이 곁에 있을 것이라고 멋대로 단정지었다. 앞으로도 이 시간이 쭉 이어질거라고. 끈을 묶어달라고 한 날은 더욱이 그랬다.

 

   행님은 괭이한테 요거 와 달아주는지 아나?

 

   방울을 다는 이유는 뻔했다. 주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이겠지. 하지만 처음부터 거처 없이 살아가는 들짐승에게 주인은 없었다. 그런 것을 다는 건 번거롭고 되려 살아남는데 걸리적거릴 뿐. 방울은 조금 낡았지만 손 안에 굴리니 제대로 된 소리가 났다. 방울을 받고 난처한 듯 웃는 목소리엔 은근한 기쁨이 실렸다. 네가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소유물 표시, …라 카든데.

 

   나 또한 기꺼이.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었다. 이대로가 나을 것이라며 욕심을 부린 대가는 컸다. 때로 너는 어떤 이유로 떠났고 그러는 동안엔 익숙함에 잊은 줄 알았던 짙은 쓸쓸함이 돌아왔다. 발소리에 시도 때도 없이 바깥을 내다보고 때론 신발을 신고 나가 서성이면서까지 널 기다렸지만 그런 날 비웃듯 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홀로 있는 적막이 익숙해질 쯤엔 다시금 돌아와 그 살가운 웃음을 보이며 다녀왔다고, 기다렸냐고 인사했다. 그럼, 나는 그것이 또 슬프고 기뻐서. 다녀왔냐는 짧은 인사 속에 혀끝까지 차오른 욕심을 꾹 눌러 담았다.

 

   사무치게 그리울 땐 바다로 나갔다. 바닷가엔 소리가 많으니 오래 이어진 적적함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었다. 그러나 혼자 신발을 신는 것마저도 허전하게 느껴졌다. 외출할 때면 자다가도 귀신같이 달려와 어디로 가는 거냐고, 누굴 만나러 가는 거냐고, 언제쯤 돌아올거냐고 끈질기게 묻곤 했다. 그러면서 눈곱도 떼지 않은 채로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곤 했지. 핀잔을 주면서도 내심 혼자 걷지 않게 된 것이 기뻤다. 함께 문 밖으로 나서며 서로 옷을 여며주고 우산을 쥐어주곤 하지 않았던가. 뜨는 해를, 지는 석양을, 수놓은 별을 보며 하늘에 대해 이야기하고 산짐승을 쓰다듬고 지천에 핀 들꽃을 구경하지 않았던가. 눈은 절로 함께 걷던 거리로 향했다. 땅은 내리다 만 비로 촉촉했고 우거지기 시작한 녹음은 파릇했다. 여름꽃들도 화사해서,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이 다채로웠다. 어딜 보나 화려한 여름 거리였는데도, 시선은 다 떨어진 이팝나무에 멈췄다. 한참 장마에 아름답게 피어난 이팝꽃들은 묵직한 비를 맞으며 하나씩 떨어져, 장마가 끝날 무렵엔 시들었다. 떨어진 꽃잎들도 빗물에 쓸려가 거의 남지 않은 듯 했다. 겨우 나무에 붙어있는 마지막 꽃잎만이 그들이 살아 개화했던 흔적이었다. 낮중에 내린 빗물이 무거워 떨어지는 작은 잎이 애틋해 급히 손으로 잎을 잡아챘을 때야 떠올랐다. 이팝꽃, 여름이 들어서는 입하에 피는 입하목, 그 의미는.

   변덕이 심한 하늘은 질리지도 않고 다시 소나기를 뿌렸다. 비는 갑작스럽게 쏟아졌고 손에 잡은 꽃잎도 결국 손 위로 떨어진 빗물에 쓸려 사라졌다. 우산이 없어 그저 우두커니 선 채로 비를 맞았다. 몸이 젖는 것도 모르고, 마음이 아프게 찔리는 것도 모르고 멀거니 파도치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파도는 한 번 넘실 거렸다가, 다시 들어가며 모래사장을 애닳게 했다. 마치 이 마음처럼. 비를 피해 어디든 들어가든지, 집으로 돌아가 우산이라도 가지고 나오는 게 좋았겠지만 발걸음은 바다로 향했다. 별 이유도 없이 바다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저 바다에 닿으면, 물 밀듯이 들어오는 파도를 맞으면. 또 다시 네가 넘실거리며 내게 오지 않을까. 바닷물은 차갑게 발목을 집어삼켰다. 걷는대로 바다는 깊어져서, 물 속에서 걷는 사이에 신발 한짝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발 끝에 돌이 걸리고 뭍까지 밀려온 해조류가 발목을 거추장스럽게 감쌌지만 개의치 않고 무릎이 다 잠길 때까지 걸어갔다. 파도는 몇 번이고 흔들거리며 때론 허벅지까지, 때론 허리까지 물결을 흔들고 지나갔다. 하지만, 파도가 몇 번 오더라도 너는……

 

   행님.

 

   그때, 비가 멎었다. 어느 새에 나를 발견하고 왔는지 너는 하나 있는 우산을 펼쳐서 내게 기울였다. 바닷물에 뛰어들어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는 것도 아랑곳 않고 멍청히 서있는 내게 우산을 씌웠다. 항상 여름 태양처럼 웃던 너는, 항상 돌아오는 길에 반갑게 나를 부르며 멀리서부터 환하게 웃던 너는 왜인지 오늘은 웃지 않는 채였다. 하지만 수 천 마디 말보다 애달프게, 떨어지는 눈물보다도 서글프게 반짝이는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때론 말 보다 눈이 더 많은 것을 전한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비를 맞은 것처럼 눅눅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더랬다. 그제서야 빗물이 네 눈물을 감추고 있는 걸 알았다. 그것은, 기쁜 이별의 전조. 길게도 이어진 끈의 매듭.

 

  행님아우 인자 고만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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