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드는 곳으로

COMMISSION2022. 7. 28. 03:24

   출발지로 가는 것 마저 하나의 여행이었다. 타국이라고 한들 이제와서 낯설 것도 없었지만 갈레말 제국 2대 황제에게 정치적 목적도 군사적 목적도 없는 여행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똑같은 길도 주의깊게 살폈고 다른 풍경이 나올 땐 눈을 날카롭게 세우고 긴장했다. 그 길에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니 더 그랬다. 황제가 별 호위도 없이 다소 가벼운 복장으로 걸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전 대장군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사방에 적이 있는 삶이란 원래 비극인 법이니까. 약속된 접선은 기라바니아 호반지대였다. 느긋한 인상과 달리 일행은 제 시간에 맞춰 알라미고인 거주구 아래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 시간에 맞췄다고 해야할까, 경비에게 물으니 이미 한참 전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어째서일까. 영웅은 텔레포 한 번으로 어디든 빠르게 갈 수 있지 않았던가. 시간이 썩어 넘치기라도 하는건가? 그는 영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고 먼저 도착한 수대바노에게 다가갔다.

 

   "황제님, 오셨군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일찍 나왔군. 기다렸나?"

 

   수대바노는 하나도 기다리지 않았다며 맑게 웃었다. 어차피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공공의 적인 갈레말 제국 황제와 세계의 중심인 영웅은 달과 태양만큼이나 멀고, 또 달랐다. 그들은 똑같이 빛나지만 그 빛이 비추는 곳은 정반대였다. 그러니 어떻게 그것을 이해할까.

 

   첫 번째 목적지는 그리다니아였다. 기라바니아 대륙과 이어진 곳이 그리다니아였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약속지점을 그리다니아로 해도 됐을텐데, 수대바노는 부러 회담 장소였던 알라미고를 고집했고 거기서부터 그리다니아로 가는 길도 비공정을 타거나 하지 않고 도보로 걸어갔다. 가끔은 에테라이트가 있는 지점에서 제공되는 수송 시스템을 이용해 초코보를 타고 가기도 하고, 험난한 기라바니아의 산을 넘기 위해 날아갈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걸어가며 지나가는 풍경을 그 눈에 담았다. 호반지대에서 산악지대로, 산악지대에서 변방지대로⋯ 왜 구태여 먼 길을 선택하고 힘들게 걷는지 이해타산에 능한 그로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물어도 가는 길 역시 여행의 한 부분이 아니냐는 얼빠진 대답이 돌아왔다. 시간은 금이고, 이렇게 목적 없이 걷는 시간이 낭비처럼 느껴지는 기분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곳이 멋지다, 저쪽 길도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말하며 반짝 빛나는 그 눈은 정말이지, 천진하기 짝이 없어 무심결에 눈이 쫓고 마는, 모험가의 그것이었다.

   두 사람은 출발한지 반 나절 정도 지나 마침내 검은장막 숲의 동부삼림, 아홉덩굴 숲에 도착했다.

 

   "저기가 호손 산장이에요! 여기까지 왔으면 금방이에요."

 

   에오르제아 관광이라더니,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수대바노는 좋은 여행 안내인이었다. 기라바니아 정도는 바리스로서도 낯설지 않은 곳일텐데도 영웅은 제가 모르는 것들을 많이도 알고 있었다. 썰렁하기 짝이 없는 알라가나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산이 깎여 만들어진 계단식 지형에 누가 자리 잡고 있는지, 말라 비틀어진 사막 같은 곳에 핀 꽃은 무엇인지, 반쯤 무너진 돌길을 빙빙 돌아 올라가면 어떤 풍경이 보이는지. 높은 벼랑 끝에서 본 녹슨 바위 벌판은 장엄하고 근사하기 그지없었다. 그에게 가파른 산악지대는 무어냐고 묻는다면, 이동하는데 불편하나 전략 상 이용할 수 있는 지형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곳엔 거기에 어떤 꽃이 피는지, 어떤 풍경이 근사한지, 그곳엔 어떤 사람이 사는지 같은 것은 없었다. 에오르제아 삼국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가는 곳도 아니고 어떤 지형인지 어떤 기후인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공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를 가더라도 그와 함께라면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그곳엔 전략적으로 어디에 자리잡아야 좋은지, 이 나라의 단점과 약점은 무엇인지, 이 나라가 끌어안고 있는 고통과 갈등은 무엇인지 같은 것은 없었다. 무엇이 이렇게도 그와 자신을 다르게 만드는 것일까. 답은 내려지지 못한 채 동부삼림의 서쪽 끝, 벌꿀 마당을 지나 중부삼림에 도착했다.

   푸른 자연의 은혜가 내린 땅, 그리다니아에서 수대바노는 오래 걸어 지친 몸을 쉬자고 제안했다.

 

   "모처럼 숲이니까 산림욕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도시로 가는 게 아니었나?"

   "그야, 도시 전체가 숲이니까 그리다니아를 걸어도 되긴 하겠지만⋯"

 

   수대바노가 추천한 장소는, 검은장막 숲 중부삼림의 수영풀 쉼터였다. 두 사람은 비취 호수를 지나, 대형 에테라이트가 있는 굽은가지 목장 서쪽에 난 아랫길로 내려갔다. 야트막하고 얌전한 강을 따라 내려가면 그 끝에 굵직한 느티나무가 두터운 줄기를 하늘 위로 치켜든 영원 그늘이 나왔다.

 

   "나무가 근사하죠? 장로 나무라고 한대요! 수영풀 쉼터 쪽엔 마물이 많지만 이 아래쪽 영원그늘엔 사람도 별로 없고, 마물도 안전한 친구들 밖에 없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강 위를 기어다니는 민달팽이를 쿡쿡 찔렀다. 바리스가 눈으로 쳐다보기만 해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던 달팽이들도 그가 건드릴 땐 도망치지도 않고 얌전히 굴었다. 마물도 사람을 알아본다⋯ 인가. 순한 것은 인상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마물을 더러 친구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랬다. 마물조차 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인가. 영웅이라면 무릇 벗만큼이나 적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는 에오르제아의 영웅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업은 사람 치고는 밝고 낙관적이며, ⋯지나치게 상냥했다. 하지만 그 역시 배신의 상처를 수도 없이 안고 상실이라는 이름의 상처를 마음에 몇 번이고 남겼을 것이다. 그 손은 세계의 적들의 피로 더럽혀졌고 발 아래엔 죽은 시체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바리스가 그렇듯이. 그런데도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는거지? 과연 저 웃음이 그의 약점일까.

   바리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수대바노는 이미 나무 그늘 아래 앉아 그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는지, 천로브 안에 입은 옷들이 시원하고 가벼운 차림이었다. 어떻든 수대바노는 진지하게 영웅으로써 자신이 회담 때 내놓은 말에 대한 대답으로 이 관광을 제안했다. 그리고 시간에 맞춰 나타났고 약속한 대로 에오르제아 곳곳을 자신에게 소개시켜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도 똑같이 성의껏 응하는 것이 옳았다. 그는 자신을 부르며 웃는 수대바노의 옆에 앉았다. 하늘도 도운 것인지 날이 화창해서, 우거진 수풀 안으로 조금씩 비치는 햇빛이 따스했다. 햇빛이 따듯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하다. 가만 귀기울이면 새 우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기분을 마지막으로 언제 느꼈는지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그의 삶은 항상 죽음과 맞닿은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듯 위태로웠다.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는 무거운 책임을 안아야 했고 단 한 번 있었던 사랑은 슬프게도 져버렸다. 제 옆에 있는 이 어설픈 영웅에겐 이런 아픔이 없어서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인가. 한 번이라도 좋으니 묻고 싶었다. 너의 강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고.

 


 

   두 번째 목적지는 다날란이었다.

 

   "여기는 중부삼림이니까 남부삼림으로 가기도 편해요. 남부삼림으로 내려가서 그대로 동부 다날란으로 들어가고, 울다하로 들어가면 될 것 같아요!"

 

   여행자는 지도도 보지 않고 경로를 술술 읊었다. 가는 길은 초코보를 타고 이동했다. 다날란의 황야는 삭막하고 쓸쓸했지만, 지천에 무성하게 자란 야생풀들이 이곳이 아직 생명의 대지임을 알려주는 듯 했다. 바위 속에 주황빛 크리스탈을 숨기는 땅의 정령, 솔같은 꼬리를 휘두르며 떼지어 다니는 황야염소들, 굶주려서 바싹 마른 들개. 이따금씩 땅을 뚫고 고개를 드미는 두더지들. 여행자들의 길잡이인 낡은 가로등까지, 이 황량한 땅마저 버려지지 않은 채 생명을 품고 있었다. 초코보를 반납하기 위해 잠깐 들렀던 마른뼈 야영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처음 만난 거대한 이방인의 날선 눈매에도 겁먹지 않고 조용히 인사한 채 지나갔다. 제대로 된 건물에 에테라이트, 상인들도 있는 걸 보면 제대로 된 마을인 것 같은데 이렇게 쥐 죽은 듯 조용한 것이 이상했다. 장사치가 많은 울다하의 영역에서 아무도 먼저 구매를 권유하지 않는다니, 시선이 절로 안내인을 향했지만 수대바노 역시 마찬가지로 조용히 초코보를 반납하기만 할 뿐 별 말이 없었다. 그는 먼저 말을 붙이는 게 껄끄러워 결국 똑같이 말없이 마을을 떠났다.

   수대바노가 지나 온 마른뼈 야영지에 대한 설명을 한 것은 중부 다날란으로 빠지는 길에서였다.

 

   "아까 그곳은, 성 아다마 란다마 교회에 있는 묘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에요."

   "어떤 교회지?"

   "5년 전 재해가 있었을 때 도시에 수용할 수 없어서 넘쳤던 시신을 받아 준 교회래요. 그 야영지는 매장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고요. 그래서, 명복을 비는 사람들이 많은 마을이라 조용해요. 장사꾼들이 있긴 하지만 보통 간단한 먹거리나 장례에 필요한 물건을 팔아요."

 

   전쟁은 그치지 않고, 이 세상에 슬픔이 끊임없이 태어나도 우리는 행복해지길 바라며 계속 기도한다.

 

   "언젠가 그곳에 의뢰 때문에 갔을 때, 묘지 앞에서 기도하던 분이 들려주신 말이에요."

 

   그 말엔 어떤 울림이 있었다. 그들은 끊이지 않는 전쟁의 당사자였으니까. 그들은 그 누구도 그저 싸움이 좋은 전쟁광이 아니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눈물을 참고 신도 하늘도 아닌 시체로 쌓인 길에 기도하는 것. 기도의 제물은 언제나 곁에 있는 동포의 죽음이었다. 그것을 인류가 본래 있어야 할 모습으로 되돌려놓기 위한 초석이라고 여기고 눈을 돌린지 얼마나 오래 되었던가. 평화는 허상이고, 화합은 거짓된 것. 바리스는 문득 제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이곳에 영웅과 함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라면 허상도 실제로 만들고 거짓도 진실로 만들 수 있을까. 길은 길지 않아 고개를 들었을 땐 울다하 날 회랑으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안내인이 제안한 것은 부의 도시 울다하가 만들어 낸 오락소, 골드 소서 체험이었다.

 

   "그곳은⋯ 한심한 도박꾼들이 넘쳐나는 도박장이 아니던가?"

   "아니에요! 물론,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그곳은 원래 울다하 난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에요. 즐길 수 있는 게임 가짓수도 많고요. 설립 목적이 난민 지원이었다보니, 분위기도 개방적이고 건전한 편이에요."

 

   말대로 뒷골목에서나 볼법한 폐쇄된 도박장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보다는 관광객 유치를 위한 거대한 카지노 같아서, 사방이 금빛으로 번쩍이고 화려했다. 첫 발을 딛은 바리스는 눈 앞에서 회전하는 거대 사보텐더를 넋놓고 보고 있었다. 저게⋯ 뭐지? 수대바노는 멍하니 서 있는 바리스의 팔을 잡아 끌고 골드 소서에 처음 온 그에게 입구 광장의 일일 복권을 먼저 소개했다. 하얀 정장을 차려 입은 일일 복권 판매원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노련한 직원답게 온화한 표정으로 복권 두 장과 MGP 동전이 조금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오늘 처음 방문하셨죠? 편하게 즐기실 수 있게 적은 양이지만, 환영의 인사로 MGP를 드리겠습니다. 방금 드린 복권은 이 동전으로 긁으십시오."

   "고맙군."

   "자, 황제님! 여기서 무작위로 세 군데를 골라서 긁는거예요. 옆에는 나온 숫자들을 다 더한 총합 별 보상이에요. 베스트는 1, 2, 3이 이어진 한 줄을 고르는 거겠네요!"

   "흐음⋯"

 

   이미 긁혀있는 가운데 숫자는 2였다. 바리스는 망설임 없이 2를 중심으로 Y자 위치에 있는 자리를 긁었다. 과연, 왼쪽 대각선이 1로 2와 이어졌다.

 

   "이 줄로 하는 게 좋겠군."

   "그럼, 열어드리겠습니다."

 

    날씨만큼이나 운이 따르는 날인지, 마지막 자리의 숫자는 3이었다.

 

   "축하드립니다!"

   "황제님! 첫 복권에 합계 6 줄을 고르셨네요, 대단해요!"

 

   복권 판매원은 복권 보상이라며 건네 주었던 주머니에 MGP를 한 뭉치 넣어주었다. 이게 그렇게 좋은 일인가? 바리스는 폴짝 뛰며 좋아하는 수대바노를 떨떠름한 눈으로 쳐다봤다. 수대바노가 들고 있는 복권은 1, 2, 7이 연결된 이른바 '꽝'이었다. 그런데도 정말로 좋아하고 있었다. 본인이 당첨된 것도 아닌 종이 한 장에. 너는 이런 별 것 아닌 일로도 웃고 기뻐할 수 있는건가. 그 모습이 어쩐지 바보같고 한심하게 느껴지다가도, 마음 속으로 스미는 은근한 기쁨이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아주 조금, 웃고 말았다.

 

   "가져라. 어차피 밖으로 나가면 여긴 다시 올 일이 없을 것 같으니."

   "그런 게 어딨나요! 기념으로 가지셔야죠."

   "그래도⋯"

   "그럼, 오늘 하루 같이 쓸까요? 그리고 남는 동전은 꼭 기념으로 가져가세요. 오늘을 어디서든 기억할 수 있게요!"

 

   그는 그 다정함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한 것은 크리스탈 타워 내려치기였다. 이미 몇 무리가 모여 저마다 망치를 들고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보기엔 단순한 힘자랑 같군."

 

   바리스는 설명도 필요 없다는 듯, 성큼성큼 기계 옆에 놓인 해머로 기계판 중앙 버튼을 세게 내리쳤다. 강한 충격에 기계 전체가 진동하듯 흔들렸으나, 정작 점수를 표시하는 사보텐더는 수직선 절반도 올라가지 않은 채 아쉬워요 따위의 메세지를 띄웠다.

 

   "이것도, 그냥 세게 내리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에요. 저 기계판의 타이밍 끝에 맞춰서 치면 칠수록 사보텐더 친구가 높게 올라가요!"

   "그렇군⋯ 요컨대, 저 기계판에 있는 게이지 끝에 맞춰서 치면 된다는건가."

   "맞아요! 그러면 그렇게 세게 치지 않아도 고득점 가능해요."

 

   수대바노는 시범을 보이겠다는 듯 남은 해머 하나를 들고 기계판을 지긋이 노려봤다. 게이지가 맨 끝 분홍에 닿았을 때를 놓치지 않고, 그는 손에 든 해머로 크리스탈 타워를 내리쳤다. 그렇게 세게 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초록색 사보텐더는 수직선 끝까지 올라갔다. 잘했어요!

 

   "헤헤, 이렇게요!"

 

   두 사람 옆으로 지나가던 세뇨르 사보텐더가 다가와 박수치더니 수대바노에게 MGP 동전을 몇 개 내밀었다. 그리곤 뒤뚱뒤뚱 걸어 다른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저건⋯ 뭐지? 아까부터 신경쓰였는데."

   "사보텐더예요! 골드 소서의 마스코트 격이죠. 저렇게 돌아다니는 친구도 있고, 여기 저기에 많아요. 여기 크리스탈 타워에도 있고요. 그 친구를 본딴 탈 것도 MGP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살 수 있어요."

 

   최고상품 격이죠! 수대바노는 그렇게 말하며 바리스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는 손을 마주 잡고, 오색깔 선물 박스가 쌓인 신비의 광장 바로 옆에 있는 워프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의 발이 닿자 물이 치솟아 올라 그대로 그들을 위층에 떨어트렸다.

 

   "잠깐⋯!"

   "헤헤, 이것도 골드 소서의 묘미! 에테라이트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워프로 슝~ 하고 올라갈 수도 있어요!"

 

   그들이 도착한 곳은 고드베르트 조각상이 있는 맨더빌 라운지였다. 여기서 잠깐 쉬고, 다음 게임을 하러 가요!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천진난만하게 말하며 웃었다.

 


 

   여행의 종착은, 바다의 도시 림사 로민사였다. 림사 로민사로 들어가는 길은 서부 다날란의 지평선 가장자리를 지나 저녁별 만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배를 타면 여객선 부두에 닿았고, 마지막 일정은 레스토랑 '비스마르크'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이었다. 인기 식당이기에 레스토랑은 예약 손님으로 붐볐고, 그 중 딱 한 테이블이 예약석 팻말이 걸린 채 비어 있었다.

 

   "저 테이블이 저희 예약석이에요! 미리 예약해뒀거든요."

 

   종업원에게 말을 걸자 그는 정중한 인사로 손님에게 예를 갖추고, 안쪽 비어 있는 예약석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종업원은 테이블 가운데 놓인 램프를 키곤 물 주전자와 컵 두 개를 세팅해주었다.

 

   "코스 요리로 두 분, 맞으시죠?"

   "네, 맞아요."

 

   코스 요리는 매일매일 달라지는 모양인지 분필로 쓰고 지우는 칠판에 오늘의 메뉴들이 적혀 있었다. 전채요리로는 신대륙의 열매채소인 악어배를 발사믹 식초로 맛을 낸 악어배 샐러드, 파 크림 수프에 메인 요리로 연어 구이와 영양 스테이크, 준비된 디저트로는 붉은머루 타르트와 도토리 쿠키가 있었다. 거기에 마실 것을 와인이나 커피, 맥주 등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음식은 코스 요리 답게 기다리지 않고 차례로 받을 수 있었고 어느 음식이나 유명세에 부끄럽지 않은 맛이었다.

 

   "음식 맛이 좋군."

   "입맛에 맞으세요? 다행이에요! 오늘 어떠셨어요? 직접 느끼는 건 역시 듣거나 공부하는 거랑 다르죠?"

   "그렇군,"

 

   그는 짧게 감상을 말했다. 그리다니아의 자연 속엔 생명이 가득했고, 그저 사치와 향락만이 있을 것만 같던 울다하에도 난민을 위해 재산을 투자하고 그 마음에 답해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외딴 섬처럼 보였던 라노시아에는 다양한 종족의 사람들이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랬다. 그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쳐부숴야할 적 나라가 아니라, 그곳에서 숨을 쉬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모든 게 즐거움으로 가득찬 것은 아니었다. 그리다니아엔 미코테족과 엘레젠족 사냥꾼들이 영역 다툼을 했고 울다하엔 여전히 난민이 넘쳐났으며 림사 로민사 뒷골목엔 해적들이 도사렸다. 그래도 여전히 곁에 있는 사람과 마주보며 내일의 행복을 기도했다. 그렇게 그들은 어제의 절망을 넘어 오늘에 있는 것이었다. 슬픔이 끊임없이 태어나도, 행복을 위해 기도한다⋯ 그는 다날란에서 들은 말이 떠올라 괜스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을 밖에 설치한 레스토랑이라 안전 울타리 밖으로 림사 로민사 앞바다 풍경이 넓게 보였다.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선착장에 댄 큰 배를 바쁘게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멀리서는 불꽃축제가 한참인지 한참 떨어진 동쪽 해안에서 터트리는 불꽃이 여기서도 보였다. 까만 밤하늘에 별은 모래알처럼 반짝여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테이블 위는 방금 만들어 따끈하고 맛있는 음식들로 넘쳐났다. 바리스는 이 모든 상황이 있을 수 없는 환상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닷바람 따윈 머리가 날려 불편할 뿐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건 그와는 관계 없는 일이었다. 불꽃축제는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사치스러운 행사였다. 하늘 따윈 올려다 본지 오래됐고, 별이 반짝이는지 달이 빛나는지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잘 차려진 음식을 매일 먹더라도 음식은 살기 위한 섭식물에 불과했다. 무엇이 이 바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거지? 불꽃이 터지는 저 밤하늘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이 이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까. 비일상의 곁엔 수대바노가 있었다. 똑같은 길, 똑같은 도시, 똑같은 하늘, 똑같은 식사여도 그와 함께라면 그곳엔 새로운 즐거움이 있었다. 그런가. 고독한 황제는 그제서야 비로소 그것이 태양의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길을 걸을 때 작은 꽃의 이름을 궁금해하는 것, 언제 어디서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잊지 않는 것, 작은 마음을 선물이라며 억지로 손에 가득 쥐여주는 것, 아무것도 아닌 풍경을 보며 눈을 빛내는 것, 거짓된 화합은 없다고 믿는 것. 그것은 영웅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약한 모습이 아니라,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무엇보다도 강한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황제님이 무슨 생각으로 회담에서 그런 주장을 하셨는지 알아요. 그리고 오랜 시간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한 복잡한 마음들이 있는 것도요."

   "아니, 넌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도 그런 말로 나를 설득할 생각이지 않나?"

   "맞아요. 재해를 일으키면 많은 사람들이 또 죽거나 다칠거고, 그런 건 바라지 않아요. 하지만 이대로 황제님을 또 혼자 고독한 왕좌로 돌려보내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문득, 아주 멀리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앉은 바리스 조스 갈부스가 보이는 듯 했다. 그는 타버린 것만 같은 잿빛 왕좌에 홀로 앉아있었다. 오로지 하얀색 달빛만이 그를 비추고 있었다. 화려하지도 않고 편안하지도 않은 딱딱한 의자에 앉은 그는 눈으로 공기도 베어버릴 듯한 눈초리로 세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도 그의 전신을 매고 있는 끈이 있었다. 끈 하나는 부하요, 동포요, 갈레말이라는 이름의 나라여서.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그를 단단히 붙잡아 매고 있었다. 그곳은 오래도록 쓸쓸하고 차가웠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 마침내 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분명 멀리 있었지만, 성큼성큼 걸어 단박에 바리스 황제의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황제를 매달던 밧줄을 하나씩 풀어내고 있었다.

 

   "혼자서는 외로워요. 하지만 더 이상 혼자 앓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가 바리스, 당신에게 알려드릴게요."

 

   햇빛이 비추는 세계를.

 

   그리고, 다 같이 내일로 걸어가요. 오래도록 지지 않았던 달은 천천히 떠오르는 해에 저물고 있었다.

 

BGM

LUCY-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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