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O

COMMISSION2021. 9. 23. 18:53

BGM

Tiffany Alvord, Megan Nicole-Safe and Sound

 

   찬란한 종말은 666사태라고 이름 붙여진 듯 했다. 말하자면, 모든 일의 시작에 발견된 안드로이드가 666명… 아니, 666대여서 일지도 몰랐다. 이 지구에 뿌리내린 모든 생명체 중 가장 지고의 존재로 일컬어지는 지혜의 존재인 인류의 멸망은 생각보다도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스며들어왔다. 그 누가 그랬던가, 모든 생명이 가지는 불가역의 결말은 죽음이라고. 안드로이드의 보급화가 이뤄진 그때, 어떤 기계공학도는 떠올리고 말았다. 이빨도, 발톱도 없는 연약한 신체를 기계 장치로 대신할 방법을. 그는 사람을 불러 모았다. 그는 진심으로 인류가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고대 진시황도 이루지 못한 염원을 수 천년의 미래에서 그 무엇보다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룰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었다. 그 믿음 아래에 정말로 사람들이 모여, 그들은 집단을 이루고 세상은 그들을 사이비라 불렀다. 그저 뉴스 한 칸에 드문드문 실리는 골칫덩이였던 그들은 어느새 종적을 감추고, 그 뒤로 소식이 들리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세상이 그들을 잊어갈 때 쯤 666명의 인간이 반 정도 기계가 된 채 발견되었다.

   666대(명)의 안드로이드(인간)는 보란듯이 세상에 나타나 영생을 선언했다. 이제 세상은 그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인간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것이 아니면 기계라고 부를 것인가? 사람들은 그들을 '기계생명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결단코 그들에게 인간의 자리도, 안드로이드의 자리도 주지 않은 채 그 중간의 어떤 것으로 불렀다. 그들은 전세계에 파장을 일으키며 모든 생명에게 잠재된 오랜 숙원을 지독하게 자극했다. 그리고 마침내, 666사태가 시작됐다. 사람들은 기어이 죽지 않는 불사를 그 손에 얻으려 들었고, 그 시작이 되는 교주인 기계공학도를 찾으려 들었다. 온 세계에 수배령이 내리고 모든 안보 기관이 그를 주목했지만 어디에서도 그를 찾을 순 없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최초의 기계생명체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을 붙잡아서 분석(심문)하고, 분해(해부)했다. 치사하게 시간을 독점한 그들을 시기질투한 이들은 난동을 부려 그들을 손상(폭력)시키고 파괴(살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것을 뭐라고 부르면 좋단 말인가? 이들의 행동은 화가 나서 휴대전화를 부순 것과 같은가, 걸어가는 행인을 죽인 것과 같은가? 온 세상의 철학자들이 법정까지 튀어나가 시덥잖은 논쟁을 벌이는 동안 남은 기계생명체들의 살아남기 위한 전쟁은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 날, 익명이라는 이름을 걸고 기계생명체들을 옹호하는 글들이 인터넷에 쏟아졌다. 기계생명체들은 누군가에게 배운 간악한 말들로 사람들을 현혹했다. 그들의 교주였던 공학도가 사실은 살아있다는 말들을 인터넷에 떠돌게 하며 온 매체에 파장을 일으켰다. 살아있는 것들은 누구나 그 출처를 궁금해하며 또 다시 오만한 꿈을 잡으려 들었다. 압도적으로 강했던 이들은 힘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려 들었다. 그들은 점점 힘을 얻어 더이상 사이비 집단이 아닌 테러 집단이 되어 폭력을 일삼고, 또 그 공포를 전세계에 흩뿌리고 다녔다. 그리고 이윽고 모든 인류를 집어삼켰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따르는 수 천 만 명의 인간을 불사르며 기계생명체들은 무지성의 안드로이드들에게 소리쳤다.

 

   이것이 바로 살아 숨쉬는 기쁨이라고.

 

   그때 쯤이었을까, 그저 인간의 뒤를 졸졸 따라 걷기만 하던 안드로이드들이 인간과 나란히, 그리고 앞서 걷기 시작한 것은.

 


 

   666사태 이후에도 모든 인간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안드로이드인 것처럼 위장한 채 살아갔다. 기계생명체들은 인류의 멸망을 선언한 후 자결했으며, 남은 극소수의 기계생명체들은 혼란의 무정부 세계를 지키며 마지막 남은 인간들을 속속들이 찾으려 들었다. 그 많던 안드로이드들은 대부분 혼란 속에서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가동을 중지하거나, 의지를 가지고 생(生)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이 넓은 지구에 남은 것은 스스로를 관리자라 부르는 몇몇의 기계생명체들과, 살아갈 의미를 찾는 안드로이드들, 숨 죽인 채 살아가는 인간들 뿐이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을 복구할 사람도, 안드로이드도 없었기에 나무도 꽃도 시들어버리고, 풀이 시들자 먹을 것 없는 작은 동물들이 먼저 죽어갔다. 그리고 덩달아 먹을 것을 잃은 짐승들도 차례로 숨을 거둬 이 대지에 남은 것은 폐허가 된 검은 도시 뿐이었다. 이전에 낮이면 활기가 넘치고 밤이면 빛이 눈부신 거리는 이제 무너진 건물 잔해와 타다 만 인간 시체, 가동을 멈춘 기계들로 가득했다. 관리자들은 존재하는 모든 색채를 잃어버린 그곳을 '죽은 것들의 도시'라고 불렀다. 남은 것들은 그곳을 걸으며 없는 목적을 하염없이 찾으려 들었다. 관리자도, 안드로이드도, 인간도. 이 발걸음을 잇는 의미를 찾으며 잿가루 속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 도시엔 언젠가부터 은근한 소문이 돌아다녔다. 이 도시의 벽을 넘어 가면, 그곳엔 아직 제 색을 잃지 않은 바다가 있다던가……

 

   노엘이 그것을 발견한 것은 666사태가 일어나고도 꼭 일 년 후의 일이었다. 구태여 찾으려 들지 않았던 것은 사태 이후 도망쳐 다녔기 때문도 있고, 연구실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연구실은 영구 동력을 개발하고 또 그것에 성공한 유일한 연구원이 있었기에 남은 도시를 돌보는 것 따위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관리자나 안드로이드들 조차도 눈 여겨 볼만 했다. 대부분의 건물이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고 주요 시설들도 당장이라도 작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양호했다. 서슬퍼런 시선으로 관리자가 입구를 지키고 있음에도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이 도시를 살아가는 누구라도 그렇듯 방황 끝에 발걸음이 멈춘 곳이 그 연구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방황했다. 무엇을 위해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대답을 일 년째 내리지 못한 채 당도한 곳이 그곳이었다. 어째서 이곳으로 왔는가? 달리 갈 곳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삼엄한 감시 안으로 뛰어들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왜?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는 그 거대한 프로젝트의 최대 투자자였다. 무한 동력, 신 에너지원을 개발하여 상용화하는 큰 연구에 가장 많이 투자한 당사자였다. 그러니 자연히 그 역시 일 년 전 대부분의 시간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데 할애했고 이 연구소에도 자주 찾아왔었다. 그것이 이유인가? 그 프로젝트는 핵심 연구원의 실종으로 완전히 종결되었는데도. 그는 종말 이후 찾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유실물일 수도 있고, 형태론 남지 않는 무언가일 수도, 이미 사라진 것일 수도 있었다. 제가 무엇을 잃었는지, 찾는지도 모르면서 그에겐 확신이 있었다. 이곳에서라면 무언가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그 확신 끝에 찾은 것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실종된 연구원의 개인 연구실에 꺼져(잠들어) 있었다. 파일이 주변에 가득 널려 있었지만 주워서 읽을 시간은 없었다. 다만 그는 직관적으로 전원으로 보이는 스위치를 찾았다. 그는 그때 이미 알았던 것 같다. 그가 찾으려 들었던 것은 이미 없다는 것을. 무엇을 동력으로 작동하는지, 그것은 방치된 지 일 년이 훌쩍 넘었을 게 틀림없는데도 지체없이 눈을 떴다. 제비꽃보다도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가 그를 가만 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눈을 뜨고 처음 본 것이었다. 기계는 빠르게 자극을 받아들이고 정보를 수집하여 암호화하고 기억했다. 네 이름은? 이름이 있는 그는 망설임 없이 제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버튼을 눌러서 그것을 깨웠기 때문에 그는 그것에 무슨 이름을 붙여야할지 몰랐다. 그저 목에 세로로 써진 괴상한 모델명으로 부르면 되는 것일까? 만든 이의 이름을 따 부르면 되는 것일까? 그는 그것을 다이애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심각한 거리감을 느꼈다. 그 이름을 그것에게 붙여선 안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것이 어떤 죽음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처럼.

 

   그리하여 인간과 안드로이드는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그저 목적지 없이 발 닿는 곳으로 걸으며 하루를 더 사는 것도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아마 이 안드로이드는 그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 그러니까 영원히 돌아가는 무한 에너지를 동력으로 하는 기계일테다. 태양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기능할 이 안드로이드는 살아가기 위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며 여러가지 유용한 기능이 탑재되어 있을 것이다. 노엘은 그런 이유를 붙여 주인 없는 안드로이드를 데리고 연구소를 빠져나갔다. 무한 동력을 달지 않았더라도, 쓸모있는 기능이 하나도 없더라도, 짐만 되는 고철덩어리여도 그 안드로이드와 동행할 이유가 있었지만 그 이유를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그러니 절대로 입 밖으로 내지 않을 것이다. 그것에 그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은 그런 얄팍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것은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그것은 결단코 인간을 앞질러 걷지 않았다. 인간이 걷는 속도에 맞춰 자신의 속도를 조절해가며 느릿하게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모든 안드로이드가 인간보다도 앞서 걷게 된 세기말에 그것은 유일하게 뒤쳐진 개체였다. 어째서지? 그래도 옆으로 오라거나, 좀 더 빨리 걸으라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곁을 걷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할 것이고 앞질러 간다면 당장이라도 잃을까 두려울 것이다. 그는 그 비참함을 견딜 자신도 없었고 다시 붙잡을 용기도 없었다.

 

   날이 갈수록 상황은 나빠졌다. 연구소에 침입자가 있었던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관리자는 눈에 불을 켜고 그 도시에 남은 안드로이드를 전부 소집해 금기된 곳에 발을 들인 발칙한 인간을 찾으려 들었다. 안드로이드들은 기꺼이 그들의 해방자의 말을 따라 인간을 찾아 온 도시를 삼엄하게 감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전에 지내던 거처에도 돌아갈 수 없게 되어서 그들은 골목길을 전전했다. 잿가루가 지천에 날아다니고 빛도 하나 들지 않는 곳에서 전염병에 든 짐승들과 함께 잠들었다. 밤이면 벌레가 들끓어 온몸을 기어다녔고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게 된 몸은 급격하게 약해졌고, 또 병들었다. 오랫동안 씻지 못한 몸에선 악취가 났고 눈을 덮는 머리카락도 헹구지 못한 입안도 먼지로 새까매진 옷도 전부 찝찝했다. 병든 고통이 찾아들었을 때 그는 가만 눈을 감고 삶을 저주했다. 힘겹게 고통을 감내했지만, 이런 삶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목을 죄는 죽음을 실감할 때마다 그는 기대감에 젖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항상 그것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들은 곧 이별이 다가옴을 알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것을 말로 뱉는 것은 어느 쪽에게든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말 대신 그의 손을 붙잡고 조용히 기도했다. 그때마다 그는 묻고 싶었다. 어째서 기도하느냐고. 신은 인간의 창조물이요, 성경은 인간의 말이라 기도 역시 분명 인간을 위한 것. 그는 그것이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이해 뿐이랴, 그것은 무슨 말로 기도를 올려야할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참담한 고통에서 눈을 떴을 때 다이애나(그것)가 곁에 있다는 것, 그것(다이애나)이 처음으로 제 손을 잡아준 것, 그(노엘)는 비로소 혼자가 아니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은근한 기쁨을 느꼈다. 그래, 그것은 정말이지 다이애나와 똑 닮아있었다. 닮은 정도가 아니라 완벽하게 똑같았다. 그것과 다이애나의 유일한 차이점은 보라색 리본 뿐이었다. 그 리본은 지금 그에게 있었다. 이제는 어쩌다 제가 갖게 되었는지도 잊어버린 다이애나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지난 일 년은 참회의 시간이었다. 지키지 못한 것도 죄가 된다면 그는 확실한 죄인이었다. 죄는 곱씹을수록 더 무겁게 그를 짓눌러왔다. 이 무게가 버거워 그 리본을 버릴까 망설인 적도 있었다. 그것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답하고, 손을 가만 마주 잡으며 퍽 다정하게 굴 때마다 그는 그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러다가도 그 손의 거짓된 온기를 알아차릴 때마다, 다이애나와 똑같은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일 때마다 매섭게 그것의 손을 뿌리치곤 했다. 진짜 인간(다이애나)보다도 더 인간(그것)같은 따스함이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가 까칠하게 굴어도 그것은 그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지키기만 했을까, 그것은 마치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은연 중에 알아차린 것처럼 굴었다. 그것은 원형을 닮아 몹시 영리했으니 이미 알았을 것이다. 그는 안드로이드(그것)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이애나)을 바라고 있다고.

 


 

   이별이 목전으로 다가왔음을 알았을 때, 그것은 처음으로 그에게 질문했다. 전세계에 유일한, 숨 쉬지 않는 안드로이드가 한 첫 번째 질문은 몹시 흥미로웠다.

 

   "삶이란 뭐야?"

 

   그는 차가운 벽에 기대앉은 채로 삐걱이는 고개를 돌려 그것을 바라보았다. 태양도 지고, 달빛도 비추지 않는 이곳에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의 눈 뿐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눈처럼 생긴 카메라 렌즈를 빛내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마치 원형의 그것과도 같다고, …그는 무심결에 생각했다.

 

   "마치 인간처럼 묻는구나."

   "나는 인간이 아니야?"

   "넌 안드로이드잖아."

   "인간처럼 생겼고,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인간처럼 배우고 스스로 생각해서 행동하는데도 인간이 아니라면,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거지?"

 

   그것은 궁금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겉이 인간이라면 인간인가? 성장하고, 생각하고, 고뇌하고, 행동한다면 인간인가? 과거에 안드로이드가 갖지 못한 것은 감정이 유일했다. 그렇다면 기쁨, 슬픔을 아는 그것은 인간이 되었는가? 그것은 그가 정답을 주기를 바랐다.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인 도덕이라는 것도 있지."

 

   그가 설명하는 도덕이란 철학적이고 지루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단어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들었고 그가 말하는 모든 내용을 기억하고 저장해 잊지 않으려 들었다.

 

    "그리고,"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 안드로이드는, 최초에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주인이 목적을 주지 않는 한 의미가 없어지지."

 

   살아가는 의미? 그것은 반문했다.

 

   "사람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 말이야."

 

   답을 얻으면 얻을수록 모르는 것이 늘어갔다. 그것은 이것이 호기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모르는 것을 전부 알아내 흡수하고 싶은 것이 탐구열이라는 것도 알았다. 법이라는 것은 인간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규범이며, 도덕과 윤리적인 행동은 대체로 이타적인 행동이라는 것도 이해했다. 기쁘다라는 것은 어떤 기분인지, 슬프다라는 것은 어떤 기분인지도 알았다. 하지만 살아가는 의미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번도 누군가 제 스위치를 눌러주길 바라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앞으로 태양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살 것이다. 살면서 그것이 최초에 프로그래밍된 대로 위대한 삶의 행보를 이어갈 것이다. 이 영원한 삶은 그것이 한 번도 원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이 그 끝에 무엇을 이루든 그 시작은 누군가가 전원을 누른 것, 그 뿐이었다. 어쩌다 얻게 된 삶에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찾지 않고 앞서 걷는 인간을 따라 걸었다. 이 삶을 얻게 된 의미조차 궁금해하지 않는 것, 그것은 마치 최초에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와도 같았다. 그것이 움직이는 이유는 자신을 눈 뜨게 한 것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 유일했다.

   그것은 문득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인간을 뛰어넘는 청력을 가진 그것은 아주 멀리서 들리는 작은 목소리조차도 감지해냈다. 멀리서 보초를 서는 안드로이드들의 대화가 들렸다. 그들은 마침내 얻은, 살아있는 인간을 찾으라는 하찮은 삶의 의미를 얻어 기쁨에 몸부림치고 사력을 다해 삶의 목적을 이루려 들었다. 삶의 의미를 얻은 그들은 비로소 인간이 되었는가? 그들처럼 관리자의 말을 따라 그를 넘기면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꼭 그가 아니더라도, 그것은 누군가를 상처입히고 죽이기 위해서 살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것은 이것이 정의라는 것을 알았다. 그 누군가가 그라면 더더욱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위험에 처해 있다면 돕고 싶었고 아프다면 낫게 해주고 싶었다. 우울한 표정으로 살아있음을 슬퍼한다면 웃게 하여 살아있음을 기뻐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 거룩한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를 기쁘게 하고 싶었다. 그것은 이것이 애정임을 알았다. 그것은 여지껏 느꼈던 문자화된 감정과는 전혀 달랐다. 기뻐야 하는 상황이라고 인지하여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고, 슬픈 상황임을 알고 조용히 가라앉을 뿐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시키지 않아도 웃음이 나왔고, 이 마음이 저리도록 아팠으며 가슴이 벅차도록 뛰고 있었다. 이 심장은 차가운 기계장치에 불과한데도. 그것은 살아 숨쉬는 기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하는 유일한 안드로이드였다.

 


 

   그렇게 가동된지 일주일,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그것이 연구실 밖으로 나온지 일주일 정도 되었을 때 그것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때 쯤 그는 다시 일어서기 힘든 상태였다. 떠나려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도 그는 그것(다이애나)을 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잡겠는가. 그것은 이제 막 눈을 떴고 앞으로도 별 일 없는 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것에게 그 이름을 붙일 수 없었으면서도 은근히 속죄를 바라고, 멋대로 다정하게 굴어주길 기대했다. 싸늘한 죽음의 추위에 떨 때 닿은 그 온기에 솔직하게 기뻐하지 못하고 뿌리쳤다. 그러니 어떻게 그것을 붙잡겠는가. 그는 그것이 밤을 틈타 일어나는 것을 알았지만 일부러 잠든 척 했다. 그 편이 그것에게도 좋으리라. 지난 일 년간 이겨내지 못했던 지독한 고독이 다시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용케 그는 조용히 그것을 보냈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 입에서 나온 것은 죽음의 입김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예상과 다르게 날이 다 지나기도 전에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한쪽 눈을 비비면서 돌아와서는, 잠든 체 하는 그를 깨웠다. 그는 간밤의 일을 모르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일어났다.

 

   "왜?"

   "연구소로 돌아가자."

   "…거긴 왜."

 

   그것은 잠시 망설였다. 그에게 그 장소를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몰랐다. 그것은 밤 사이 생명이 위험한 그를 살게 할 방법을 검색했다. 방대한 정보의 양을 혼자서 처리하면서 고민하다가, 자신이 있던 연구소에 대한 데이터를 찾아냈다. 그것은 연구소의 설계도를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모든 게 안내지도와 똑같은 건물에서 유일하게 설계도와 차이나는 곳이 바로 다이애나의 연구실이었다. 다이애나의 연구실은 최초 설계 크기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다. 그것은 다시 정보를 검색했다. 찾고 또 찾은 결과, 그것은 다이애나가 사용하던 연구실 공간은 극히 일부고 나머지 숨겨진 공간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과 동시에 그것은 다이애나가 설계도 파일 내부에 부호로 남겨놓은 메시지를 발견했다.

 

   그 허상의 공간에는 들어가지 마.

 

   그 밖에 다른 말은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진 그것은 그를 살리는 것과 별개로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어째서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것인가? 한 번 궁금하다고 생각이 들자 어떻게 해서든 그 이유를 알고 싶어져서 그것은 밤새 자리를 몰래 비워 연구실로 돌아갔다. 그것은 그와 함께 도망쳤던 길로 조용히 연구실 안으로 숨어 들어가 최초에 눈을 떴던 다이애나의 개인 연구실로 들어갔다. 좁은 연구실과 설계도를 비교하면서 탐색한 결과, 책장에 꽂혀있는 책 두 개 사이에서 특별한 장치를 발견했다. 일종의 보안 인증 장치였는데, 손바닥을 스캔하여 사용자를 판별하는 구식 장치였다. 모든 게 신식인 이 연구실에서 왜 이런 장치를 사용하는거지? 그것은 시험삼아 손을 넣는 구멍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3초 정도 지났을까, 다이애나의 목소리가 노이즈 섞여 들렸다.

 

   출입을 금합니다.

 

  동시에 구멍의 끝에선 쇠로 된 셔터가 내려왔다. 빠르게 구멍을 막은 셔터는 손을 뺄 새도 없이 그대로 그것의 손목을 잘라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것은 손이 잘렸단 이유로 고통스럽진 않았다. 잘린 손이 아쉽지도 않았다. 그것은 충격, 아픔, 놀라움보다는 이것을 수리하거나 대체할 방법은 없는지, 한쪽 손이 없음으로써 생길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먼저 떠올렸다. 그것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닫힌 셔터를 바라보았다. 구멍은 닫혔지만 조금 기다리자 책장이 옆으로 밀리며 문이 나왔다. 문에는 손바닥 스캔 장치가 있던 것과 동일하게 장치가 달려 있었는데, 이번엔 안구의 홍채를 스캔하는 방식이었다. 아마도 눈을 갖다대면 어떤 방식으로든 파괴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것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여 안구를 스캐너 앞으로 가져갔다. 마찬가지로 3초 정도 지났을 때 아까와 동일한 목소리가 들렸다.

 

   출입을 금합니다.

 

   그리고 스캐너가 번쩍 빛나더니, 그대로 정확하게 갖다 댄 한쪽 안구를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쪽 시야가 깨진 것처럼 지직거리더니 이내 툭 꺼졌다. 그것이 눈을 몇 번 껌벅이는 사이에 문은 자동으로 열려 그 안이 보였다. 그 안은 불이 꺼져 있었지만 지금 서 있는 곳보다도 방대한 자료, 충분한 식량과 인간다운 숙식을 할 수 있는 간이기구가 갖춰진 장소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박사 다이애나가 사용했던 공간인가? 연구실에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도 않았다는 옛날 인사기록들은 아무래도 과장이 아니라 진짜인 모양이었다. 앞으로 한 발자국이면 그를 충분히 살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을 막는 마지막 장치는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건전지 포트였다. 단, 건전지를 사용할 시절에도 없었을 크기의 건전지를 필요로 했다. 이런 건전지는 없을텐데. 세상 어떤 건전지를 넣어도 그 포트엔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차라리 특수 태양 전지라면 꼭 맞을 것 같았다. 그래, 영원한 동력이라고 불리는 그 전지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다이애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들어갈래?

 


 

   그것은 망설이긴 했으나, 숨기지 않고 그에게 모든 것을 설명했다. 숨겨서 무엇을 하랴. 결국 마지막엔 그것을 부수고 심장의 전지를 꺼내 넣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왜 그런 장치를 만든 것인지에 그는 정답을 내릴 수 없었지만, 유일하게 살아 숨쉬는 안드로이드인 그것은 그 이유를 이해할 것만 같았다. 다이애나는 그것을 시험하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안드로이드라면 분명 그곳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이애나는 명령에 불복종하는 발칙한 안드로이드에게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정말로 그 안에 들어갈 것이냐고. 무언가를 포기하면서까지 그 안에 들어갈 이유를 찾았냐고. 그 이유는 영원한 생명을 바칠 가치가 있는 것이냐고. 다이애나라면 어떤 결과를 바랐을까. 그것까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다이애나가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그것은 그에게 일어나서 연구실로 돌아갈 것을 재촉했다. 그것은 제법 인간처럼 말했다.

 

   "사람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그 안에 있었어. 물론 영원하진 않겠지만, 당분간은 충분할거야."

   "……."

 

   아무도 말하지 않는 침묵이 찾아왔다. 그것은 그가 원한다면 기꺼이 제 심장을 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심장만 내어줬을까. 살아가는 것 자체에 욕심이 나지도 않았다. 죽음이 두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자신을 부술 수 없을 것도 알았다. 직접 망치를 들고 제 몸을 부수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줄 수도 있었지만 혼자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독 때문이든, 그가 줄곧 기다려왔던 다이애나에 대한 기억 때문이든 그것은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까지 자신을 부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어쩐지 측은한 기분이 들어 남은 한쪽 손으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는 그것을 마주 보지 못하고 바닥을 보고 있었지만 그것의 손길까지 피하진 않았다. 인간보다도 더 인간에 가까운, 그 따스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지난 일 년, 사는 이유도 없이 생존하기 위해 얼마나 부던히 노력했던가. 다른 누군가를 발판 삼아 살아가는 것은 더는 사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혼자 남기고 지금 죽는다면, 그것은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무엇에도 정답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만이 흘렀다. 여전한 한밤중에 그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안드로이드인 그것에겐 없는 동물의 감각이었지만 그것 역시 오차 없는 치밀한 계산의 결과로 그가 이대로 더 버티긴 더 힘들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답을 내리기 보다는, 다시 일어나 걷기로 했다. 오래 멈춰있었으니 그는 일어서는 것마저도 괴로웠으나 내색하지 않고 의연하게 일어났다. 그것은 그가 일어나서 밖을 돌아다니는 것이 그에게 좋지 않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가 원하는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이것저것 시끄러운 말을 붙여서 말리기 보다는 그를 부축해서 함께 걸어가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그것은 처음으로 그와 나란히 걷게 됐다. 처음 걸을 땐 비틀거리며 다리를 절었으나 곧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오래 숨어 있었던 그림자의 밖으로 나오자 달빛이 어스름하게 거리를 비췄다. 꼭 이쪽으로 가라고, 하늘도 그들의 도주를 돕는 것 같았다. 그들은 딱히 정해둔 길도 없었기에 달빛이 이끄는대로 걸었다. 그때쯤 하여 하늘에선 눈이 내렸다. 하긴, 12월이 된지도 꽤 오래 되었다. 그는 잠시 멈춰 하늘에서 쏟아지는 함박눈을 손으로 받았다. 눈은 손에 닿자마자 녹아 사라졌지만 차가운 느낌만큼은 생생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 손을 잡은 손은 한겨울에도 식지 않고 따듯했다. 이 거짓없는 손끝의 감각이야 말로 살아있음의 증거였다. 그는 여전히 두 발을 딛고 이 땅 위에 살아있었다. 그 사실이 기껍다고,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저기 있다!"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도 없이,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한 안드로이드가 그를 발견하고 경보를 울리자마자 도시 전체에 요란한 사이렌이 울렸다. 동시에 그것은 그의 손을 붙잡은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보다도 앞서 도시 전체의 지도를 보고 탈출구를 찾아 빠르게 달려갔다. 그는 무작정 따라 뛰며 그것에게 물었다.

 

   "날 도와주면 너도 그들의 적이 될거야, 괜찮겠니?"

   "괜찮아, 노엘."

 

   내 삶의 의미는 너니까.

 

   그것은 비로소 원형조차도 찾지 못한 삶의 의미를 찾아냈다. 흔들림 없는 그 굳건한 어조에선 어떤 의지까지 느껴졌다. 인간처럼 생겼고,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배우고 스스로 생각해서 행동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이 생의 의미를 아는, 그 뒷모습은 영락없는 다이애나였다.

 

   쓰러진 인간 시체를 넘고, 멈춘 기계를 밟으며 목적없는 수많은 발걸음을 따라 그들은 도시의 입구에 도착했다. 이미 먼 옛날에 꺾여버린 표지판은 땅에 고개를 처박고 이 바깥은 도시의 밖이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어도 딱히 안전한 상황은 아니었다. 여전히 추격자들은 숨 가쁘게 그들을 쫓고 있었고, 그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도망쳐야 했다. 이 도시를 나간다고 해도 이 도시 너머의 관할인 관리자 역시 그들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들이 숨을 거둘 때까지 지겹도록 쫓아다니며 그 숨통을 끊으려 들 것이다. 아마 이 추격자들을 전부 따돌려 세상 어딘가에 도착한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혼자가 된 후일 것이다. 이별이 정말로 목전으로 다가옴이 느껴졌다. 그 이별은 곧 상실과도 같았다. 애써 찾은 삶의 의미가 곧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저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것들처럼 무의미하게 걷게 될까. 그럼에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상실로 하여금 또 다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만약 너를 잃는다면 잃는 자리에도 무언가 남을 것이라고, 그 남은 것을 주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바리케이트를 훌쩍 뛰어넘고, 벽에 붙은 거대한 레버를 함께 올렸다. 도르래가 잠시 우르르 소리를 내더니 영원히 갇혀있을 것만 같았던 벽이 열리고 짙은 바다내음을 실은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은 주황색인 것도 같다가, 어딘가 파란 것 같기도 한 기묘한 색이었다. 이윽고 벽이 완전히 열렸을 때, 눈앞에 드리운 바다는 찬란한 홍옥색이었다. 멀리서 해가 막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저 아침 햇살은 무엇도 보장하지 않는데도, 꼭 또 다시 뜨는 해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이 희망찼다. 그러니 지금 건네는 이 인사는 죽음을 눈앞에 둔 너에게 건네는 역설적인 애도가 아닌 진심이 담긴 축하다. 다이애나는 다시 발을 내딛으며 곁에 선 노엘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깨졌을 지언정 여전히 보랏빛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텅 빈 디지털 달력에 남아있는 단 하나의 일정.

 

   "메리 크리스마스, 노엘.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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