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연옥

COMMISSION2021. 7. 25. 21:52

BGM

Rib-アカイト

 

   그 아이와의 티타임은 온통 눈물진 자리가 되어 차가 다 식기도 전에 끝났다. 그야 당연했다. 네가 그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으니까. 그 뒤로 한동안 에이비를 볼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그 아이만의 작별 선고라고 생각했다. 너만의 눈물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패배란 그리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니까, 졌다는 사실이 널 낙담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물론 그렇게 생각해도 모든 것이 완전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승리한다면 패배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했고, 만약 승패가 그렇게도 그 아이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분명 나는 졌을 것이다. 딱히 이기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내게 주어진 일에 성의와 정성을 다하는 일이 너를 아프게 한다면 나는 기꺼이 나태를 선택하겠어. 그 말을 직접 전하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한 번 태워버린 꽃이 다시 피지 않듯이, 그 아이와 나는 단절되어 한동안 보지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에이비가 없는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서, 마치 몇 십 년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아주, 오래……

   그 시간이 무척이나 지루했던 것과는 별개로, 동시에 내가 원했든 원치않았든 에이비에 대해 많은 걸 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아이가 나오지 않게 되자 학교는 잠시 술렁였고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험담과 동정이 쏟아졌다. 그 아이를 헐뜯는 말들이 아팠지만, 귀를 막아버리기엔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성격, 관계,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가정사와 불명예, 옛날 이야기들. 차라리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 아이에 대한 나쁜 말들이 들려와도 그곳에서 기어코 좋은 점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다가  그 일마저도 지쳐버렸을 땐 그저 있는 그대로 그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성격이 까칠하다든지, 질투심에 미쳐있다든지, 항상 고까운 사람을 노려보고 있다든지, 성적이 별로 좋지 않다든지, 강박이 있다든지, 불마법은 이제 못 쓸 거라든지. 신기한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못난 점'을 알게 되더라도 여전히 그 아이가 보고싶었다. 오히려 더 그리워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냐 한다면 더 좋아진 쪽에 가까웠다. 그 아이가 학교를 나오지 않게 된 이후로 쏟아졌던 악랄한 관심은 빠르게 꺼져 이제는 아무도 그 아이를 기억하지 않게 됐음에도 그 아이를 생각하는 일은 점점 늘어만 갔다.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저런 말들을 모른 척하며 학교를 다녔던걸까. 그렇게 고민이 많았다면 알려줬으면 좋았을텐데. 또 울고 있다면 어떡하지. 연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도 그 끝은 항상 이랬다. ……보고싶다.

   분명히 말하건대, 에이비가 딱히 그 이후로 이사를 간 것은 아니었다.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집으로 놀러갔을 때의 기억을 잊은 것도 아니었고 길을 찾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몇 번이고 근처 골목길에서 발을 돌린 것은 분명, 나의 존재가 그 아이에겐 상처가 됨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에게 패배는 패배 이상의 절망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고, 에이비에게 절망을 안겨준 것은 다름아닌 승자인 나였다. 나라는 존재가 너를 아프게 한다면, 그렇게 해서 네가 괴로워하거나 울게 된다면 그리운 추억 같은 건 텅 빈 옆자리에 묻어두어도 괜찮아. 그러나 그렇게 돌아나오는 길에 핀 이름없는 들꽃이 퍽 사랑스러워서 문득 네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 이것은 필시 사랑이겠지. 갈 곳 없는 불꽃이 튄 곳은 파릇한 이파리였다. 가만 보고 있다면 그대로 꺾어들고 네게 달려갈 것만 같아서, 괜스레 예쁘게 활짝 핀 꽃을 망가트렸다. 이제 저 자리엔 잎이 돋지 않겠지. 불이란 그런 것이었다. 멀리 있을 때는 그 따스함이 간절하고, 가까이 있을 땐 집어삼켜져 버린다.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것. 때로 추위가 심해지면 손을 뻗었다가도, 데일 것 같으면 다시 손을 거둬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그 대가였다. 정도를 모르고 너라는 불꽃을 가까이 한 대가.

   그랬기에 에이비가 나를 찾아온 일은 아주 의외였다. 어서 오라는 말보다도 왜 왔냐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정도로, 당황스러움에 한참이나 문고리를 잡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별 볼 일 없는 집에 찾아왔다든지, 늘 붉은 색 투성이었던 옷차림이 녹색으로 변했다든지, 얌전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라든지 모든 게 낯설었다. 낯설었는데도 반가워서 덥석 끌어안았다. 무슨 일로 왔는지 따윈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 그 말은 너에게 내가 그저 상처로만 남지 않았다는 것. 그 말은 곧 네가 나를 잊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이 기뻐.

 

   그 아이와의 재회는 반가웠던 만큼 짧았다. 여전히 말이 짧았던 에이비는 잠깐 얼굴만 비추러 온 거라는 말만 남기고 다시 사라졌다. 그러나 그 뒤로, 드물지만 가끔씩 편지가 날아왔다. 그동안 학교도 가지 않았던 사정도 그곳에 적혀 있었다. 풀 마법을 쓴 그 아이를 가문에선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밖에 편지 내용은 별 것 없는 이야기들 뿐이었다. 편지들은 항상 똑같은 연두색 편지 봉투에, 매번 다른 꽃으로 밀봉되어 있었다. 편지는 항상 줄기를 자른 꽃이 시들기 전에, 보낸 주소 없이 도착했다. 그 후로는 한 달에 한 두번 정도 불규칙적으로 도착하는 편지를 기다리는 것만이 일이 되었다. 모처럼 보내준 편지에 먼지나 흙이 묻는 게 싫어 이사온 이후로 한 번도 청소하지 않았던 우편함을 청소했다. 조화로 장식된 상자를 사 받은 편지들을 넣었다. 씰 대신 쓰인 꽃은 색을 잃을 때까지 한참이고 책상 위에 두고 예뻐해주었다. 보낼 주소도 없는 답장은 쌓여만 갔다. 에이비가 보내는 편지들은 점점 짧아졌는데도 답장은 점점 길어지기만 했다. 당연했다. 그 아이는 아마 편지를 쓰기 위해 한 달에 삼 십분 정도, 기분이 좋은 날 자기 전에 간단히 시간을 낼테지만 줄곧 새 편지가 오길 기다리는 나는 할 얘기가 점점 쌓여만 갔다. 그 얘기를 쓸 곳이 없어서, 보낼 주소도 모르면서 무작정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 무엇을했는지, 학교에 무슨 일이 있는지, 주변 사람들 얘기나 배우는 마법 이야기, 좋아하는 차 따위의 이야기나 꽃이 예쁘다는 실없는 말들까지. 점점 편지가 오는 일이 줄어들고 다음 편지가 오기까지의 간격이 길어졌기 때문에 답장은 항상 길어지기만 했다. 너무 길어져서 편지 봉투에 다 들어가지 못하게 됐을 즈음엔 그냥 바닥에 내버렸다.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편지가 도착하지 않게 됐을 쯤엔 오색깔 편지지로 내 방 바닥이 온통 어지러워져 방 안에서 미끄러지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도 편지 쓰는 일을 그만 둘 순 없었다. 그 편지만이 에이비와의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네가 나를 잊지 않았다는, 어딘가에서 살아 숨쉬며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 그러니 없던 이야기라도 지어서 너에게 보낼 편지를 써야 해.

 

   언젠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결혼하자!

 

   그런 실없는 망상이라도 적지 않으면 펜이 멈추고 만다. 더이상 적지 못하게 되면 분명 끊어지고 말거야. 그럴 때마다 비겁한 변명을 덧붙였다. 펜을 일부러 부러트려서라도 편지를 적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말을 매듭짓는 것이 몹시 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지른 밤들은 구겨버린 편지지 만큼 쌓여갔다.

 

   그리고 더이상 덧붙일 변명을 찾지 못하는 밤이 왔다. 펜은 손에서 떨어져 굴러갔다. 굴러가며 그 더러운 잉크자국을 남겼더랬다. 진한 원색 편지지 위엔 더이상 글자도 아닌 이상한 선들만 가득했다. 언젠가는 다 채워지리라 막연히 기대했던 편지 상자는 텅 비었다. 우편함엔 다시 먼지가 가득 쌓여갔다. 바닥엔 더 이상 밟고 갈 곳조차 남지 않아 종이 투성이였다. 문득 잉크 줄기를 따라 시선이 책상 끝으로 향했다. 언젠가의 꽃들은 이미 다 바스러져 썩었다. 굵은 검은 선은 점점 얇아져, 펜이 책상 끝에 걸리자 툭 끊겼다. 펜은 떨어질 듯 기울어졌고, 기울어지며 바닥으로 검은 점을 툭툭 떨어트리다, 어느 순간 툭 하고ㅡ

 

   시엘.

 

   ㅡ유성처럼 커다란 얼룩을 그 땅에 남겼다.

 

   고개는 목소리를 따라 열린 창문으로 향했다. 창문 틀을 붙잡고 고개를 내미는 것은 에이비였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아 어두운 이 밤에 유독 빛나는 것은 그 아이였다. 한참을 끙끙대더니 기어코 창틀에 앉아 분홍색 제라늄 다발을 내밀었다.

 

   "함께 가자."

   "어디로?"

 

   갈 곳은 없었다. 갈 수 있는 곳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그 아이도 아는 듯 했다. 누구도 그 아이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 말을 전하는 것이 상처가 될까 머뭇거렸다.

 

   "이제 나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 …너 빼고."

   "나?"

   "그러니 여기로 온거야."

 

   그러니, 가자. 귀족 영애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편한 복장에, 멋대로 묶은 머리를 하곤 2층 창문을 타고 들어와 손을 내미는 에이비는 그 무엇보다도 자유로워 보였다. 그래, 마치 날아다니는 무언가처럼……

 

   "…나비 같아."

 

   그 손을 붙잡자, 에이비는 창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아이가 웃는 것을 본 것은.

 

   "나방이겠지, 그것도 불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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