ただいま

COMMISSION2021. 5. 14. 13:32

BGM

伊藤由奈-Trust you

끌어안은 너의 파편에 아픔을 느끼더라도
아직 이어져 있으니까, 믿고 있어
이어져 있다고

 

   지구가 둥글고 어디로든 걷기만 하면 땅이 이어지리란 것을 알면서도 그곳은 마치 이 세계의 벼랑 끝과도 같이 느껴졌다. 세상의 끝은 온통 눈밭이었다. 하늘에서는 눈이 그저 쏟아져 내리기만 했다. 눈은 내리는대로 곧장 쌓였다. 그리고 녹는 일도 없어 그 위의 생명을 머리 끝까지 잠굴 것처럼 굴었다. 가끔은 이상하게도 차갑지 않은 눈이 내렸다. 바람도 불지 않는 그 설원에서 스즈카는 얼핏 그림자를 발견한 듯 했다. 그림자는 이상한 모양으로 흔들거리다가, 곧 가장 그리운 모습으로 변했다. 저승사자는 가장 그리운 사람의 모습으로 온다던가. 날 거둬주러 온검까. 말을 걸어도 대답없이 아야세는 눈이 소복히 쌓인 땅 위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 눈 아래는 분명 새까맣겠지. 서로의 시체를 쌓아 만든 묘지 위에 비로소 유일한 삶으로 살아남은 우리들… 그리고 그 첨단이 되어 이곳에 마지막 묘비명을 쓸 스즈카는 잘 걷기도 힘든 눈 사이를 억지로 헤치고 나아가 일렁이는 그림자에 손을 뻗었다. 쥰 쨩, 어쩐지 옅게 웃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림자에게 얼굴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마주 웃음을 지은 때, 손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비명같은 칼바람이 불었다. 매서운 바람이 한참 기승을 부리고 지나가면 그림자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공허였다.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스즈카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 종말이 오고서도 소중한 누군가가 곁에 있었기에 잊은지 오래됐다고 생각했던 쓸쓸함은 홀로 남자마자 그를 괴롭혔다. 혼자가 두렵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홀로 남은 불티는 점점 튈 곳을 모르고 사그라들고 있었다. 온통 새하얀 이 죽음의 터전에서.

 


 

   "눈이 오는 날이라 운이 좋았어요. 불이 크게 번지지 않았으니까요. 손가락은 다 펴지시나요?"

 

   꿈은 오래도록 스즈카를 괴롭혔다. 그래도 기적은 있는 모양이라, 스즈카는 기어이 제 몸 위로 관짝을 닫는 눈을 거세게 밀어치고 다시 햇빛이 내리는 양지로 뛰쳐나왔다. 회복도 무척이나 빨라서 손가락은 움직이는대로 곧잘 움직였다. 물론 종말의 흔적은 전신에 멍에처럼 남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길 야구도 다시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넵, 잘 움직임다."

   "근육이 둔화된 감각이 남아있긴 할텐데 곧 돌아올테니 퇴원해도 될 것 같아요."

 

   계절은 꼬박 한 바퀴를 돌아 병상 생활을 마치고 나오니 꼭 겨울이었다. 눈은 차가웠고 또 바람은 매섭게 불었다. 이 외로움을 채우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동 나잇대 사람들 중 쥰이란 흔한 이름이었고 이름을 안다고 해도 당장 찾을 자신이 없었다. 우주에서 보면 일본은 한없이 작은 땅이겠으나 그럼에도 사람 하나 찾기엔 넓었고 공공연하게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 하고 광고를 낼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저 그가 볼 수 있게 멀리까지 빛나는 별이 되는 수 밖에.

   다행히 죽고 살아나니 하고 싶은 일은 많아서 당장 야구공부터 잡았고 운이 좋았는지 선수로 뛸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도 좋았다. 다른 구단이긴 했지만 다신 못 만날 것 같았던 전 팀 사람들도 꽤 있었다. 재회는 기적 같았고, 그럼에도 스즈카는 가장 바라 마지 않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실망했다. 종종 찾아오는 기대는 몇 번이나 배신당했고 문을 닫는 소리는 항상 허망하게 떨어졌다. 혼자 남겨진 곳에 여전히 남은 것은 지독한 외로움이라, 분명 어딘가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스즈카는 쓸쓸했다. 특히 종말 이전의 삶과 지금을 비교할 때면 한없이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어디에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소중한 것들이 당연한 듯이 존재했던 그 나날들은 얼마나 바보같았던가. 언제나 존재하기에 깜빡 잊은 소중함이란 비로소 잃은 뒤에나 사무치도록 아팠다. 당연했던 만큼이나 집 문을 열면서 습관적으로 던졌던 인사말은 아프게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집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문을 열면 훅 끼치고 들어오는 것은 죽은 듯한 한기 뿐이라 그곳은 마치 관처럼 느껴졌다. 하긴, 관이어도 이상하진 않았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지거늘 집이 관처럼 느껴진들 무슨 상관이랴. 그럼에도 누구의 따스함도 없는 빈 집 같은 건 불을 켜고 TV를 틀어두더라도 익숙해지는 법이 없어 서글펐다. 새삼스럽게 울진 않았지만 편히 잠들기엔 너무도 불편했다. 차라리 종말 때 서로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던 것이 훨씬 따스하고 또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집은 낯설었다. 그럴 때면 생각나는 것은 이젠 너무도 옛날이라 멀게만 느껴지는 따듯한 손이었다. 이젠 잡을 손이 없는 빈 손은 슬프기만 해서 스즈카는 자꾸만 누군가의 목소리를 떠올리려 들었다.

 

   야근할 때 말곤 자주자주 생각해줄게.

 

   그놈의 야근은 평생 하나보지? 어디서 들은 말인지 기억이 안 나지만서도 스즈카는 그것이 은근히 서운했다. 그래도 그는 한 차례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밤낮으로 열심이었다. 그것은 올지 말지 불확실한 미래를 붙잡으려는 의지라, 그 만남이 다시 올 것이라는 기묘한 확신이 있었다. 마치 어떤 겨울이든 그 끝에 봄이 도래하는 것과도 같이…… 언젠가는 따스한 봄의 볕이 올 것이며, 싹은 얼어버리기 전에 서리를 깨트리고 땅 위로 머리를 들이밀겠지. 그러니 도돌이표처럼 계속되는 꿈에서 깨며 느꼈던 절망은 차츰차츰 희망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내는 힘은 여전히 어릿하게 남은 그림자의 미소였다.

 


 

   계절이 꼬박 한 바퀴 돌아서, 그 동안 백신이며 치료제니 하는 것들은 착실하게 개발되었다. 날고 긴다 하는 연구자들이 하나같이 달라붙어서 만든 것이니 상용화까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런 걸 어떻게 만드냐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아야세 역시 몇 번이고 연구소를 들락거렸다. 그것이 그가 등에 업은 책임이니까. 꼭 남을 밟고 악착같이 살아남았다는 삶에 대한 부채감만이 그를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두려움을 웃으면서 말했던 그 얼굴이 그는 자꾸만 눈에 밟혀서, 그 붉은 머리카락만이 어른거려서. 청승맞게 굴지 말자고 생각해도 어린 아이들이 야구배트를 들고 우르르 달려갈 때면, 약국에서 곰이 그려진 데일밴드를 볼 때면, 렌즈를 씻을 때면, 별이 눈부실 때면 결국 한참이고 야구공이 오가는 걸 구경하고 계산대에 쓸 일도 없는 밴드 박스를 올리고, 렌즈통을 닫거나 하늘에서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가 연구소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또 처절할 정도로 간절했다.

   한 가지 변화는 집 TV가 꺼질 일이 없어졌다는 점이었다. TV가 없으면 핸드폰이라도 써서 꼭 스포츠 방송을 틀어두었다. 가끔은 스포츠 잡지를 사오기도 하고. 최신 방송은 보지 않았다. 최신 잡지도 사지 않았다. 구하기 어려운 몇 년 전 잡지를 억지로 구해서 봤을 뿐. 방송은 디지털이라 그런지 꽤 오래 전 방송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화면 안에서 공을 잡고, 던지고, 달리고, 배트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 꼭 죽음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스즈카는 이 넓은 그라운드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고 잡지 속 사진에서마저 생동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어딘가에 누워서 숨을 멈췄다니. 이름을 어딘가에 검색하면 옛날 인터뷰나 뉴스 같은 걸 찾기 쉬웠겠지만 어딘가에 스즈카 유이라는 이름을 검색하는 짓만큼은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 밖에서 한 번 죽은 스즈카를 또 다시 죽이고 싶진 않았다. 그것이 비겁하고, 나약한 도피임을 알았고 이따금씩 미뤄둔 숙제처럼 떠나보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끝끝내 그 이름을 포털에 올리지 않았다.

 

   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은 꼭 봄이 시작되는 3월이었다. 유난히 햇빛이 따사롭고 부드럽게 불어오는 동풍에 실린 꽃향이 기분 좋은 봄날이었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눈치 없이 울리는 알람소리에 눈을 떴고, 자기 전에 생각없이 틀어놓은 TV에서는 야구 방송이 한참이었다.

 

   "웬 이런 시간에 재방송을…"

 

   알람에 눈을 떴는지 해설사가 부른 그리운 이름에 눈을 떴는지 마침 스즈카가 나오고 있었고 그는 똑바로 보기 위해 렌즈를 찾았다. 흐릿한 눈에 렌즈가 들어오자 차츰차츰 화면이 똑바로 보였다. 화면에 비친 스즈카의 눈 밑엔 기묘한 흉터가 있었다. 화상 자국 같은데, 저런 상처도 있었나? 그는 본 일이 없는 상처였다. 저런 상처가 있었다면 몰랐을 리가 없는데, 그제서야 그는 마음에 떠오르는 희망이 있었다. 본 적 없는 심한 화상 자국, 반창고로 가린 기묘한 상처들, 화면의 왼쪽 위에 깜빡이는 라이브 표시, 눈의 깜빡임과 흩어지는 숨.

 

   여기는 나고야돔, 나고야 경기장이었습니다.

 

   도쿄역에서 2시간인 나고야돔, 그리고 그곳에서 실시간 방송으로 중계되고 있는 야구 경기. 아야세는 씻을 생각도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태양이 저 멀리 뜨고 있었다. 마치 빙하가 녹지 않아도 봄날이 따스한 것처럼, 봄은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눈은 언젠가 녹아 어른한 생명의 꽃잎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신칸센에 타서도 아야세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조그만 화면에 비치는 것은 이번 시즌 라이브 중계 방송이라 경기야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다. 그야 이기면 좋기야 하겠지만, 이기는 것까지 바랄 정도의 욕심은 그에게 없었다. 그저 이 깜박이는 라이브 표시가, 선발 선수 목록에 있는 너의 이름이, 득점에 기뻐하고 동료를 독려하는 그 모습이 거짓이 아니면 되었다. 이기지 않아도 돼. 잘하지 않아도 돼. 못 보던 흉터가 있어 모습이 변했더라도, 긴 외로움에 지쳐 더 이상 웃지 않게 되더라도, 네가 나를 잊었다고 하더라도 괜찮으니까. 그저 그 끝에 약속된 만남이 있었으면 했다. 기차가 멈추기도 전에 내릴 준비를 해서,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뛰쳐갔다. 지금 같이 하고 있는 구단이 그럭저럭 인기가 많은지 역은 붐볐고 아야세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서까지 급하게 경기장으로 달렸다. 이어폰에서 해설사가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지만 귀에 들리는 것은 오로지 그 이름 뿐이었다. 그 오랜 시간 검색창에 한 번도 눌러보지 못했던 그 이름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네가 기다릴 것을 알았으면. 그러진 않았을텐데. 그것이 또 하나의 죄가 되어 달리느라 지친 다리보다도 묵직하게 마음을 눌러왔다. 그럼에도 이전에 스즈카가 느꼈던 실망만큼이나 큰 기대가 죄책감을 비집고 나왔다. 떨리는 눈, 벅찬 숨, 빨라지는 발과 멀게 들리는 관중의 함성. 열어젖힌 문 틈으로 눈부신 조명이 쏟아졌다. 영화보다도 영화처럼, 이 앞의 일을 예고하듯이, 일 년의 결심만큼 오래 잊었던 눈물을 떨구며, 마치 기적의 재회를 그리는 것처럼

 

   오랜만이야, 기뻐.

 

  유이 쨩.

 


 

   아무리 눈물겹고 기적같은 재회라도 이전에 오래 함께 있었던 만큼이나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빠르게 거처를 옮기고 서로의 생활을 맞췄다. 반 정돈 빈 거나 다름 없었던 냉장고도 금방 찼고, 욕실의 칫솔은 늘어났으며 먼지만 쌓여가던 방에도 사람의 온기를 품게 되었다. 또한 서로가 자신의 삶에 충실했으니 큰 변화라고 할 것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아야세는 여전히 연구소에 출근했고 시간이 나면 자꾸만 스포츠 방송을 틀었다. 그것은 더이상 다 지나간 옛날 경기가 아니라 이번 시즌의 현재 진행중인 경기였다. 그 오랜 시간 종일 야구를 보면서 어느정도 애착이라도 생겼는지 그는 제법 흥미진진하게, 스즈카의 구단이 경기에 나오지 않더라도 경기를 챙겨봤다. 스즈카 역시 착실하게 연습에 임했고 종말에서 험하게 살아남은 것이 무색하게 실력은 전보다도 좋아져갔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터뷰 요청이나 취재도 많이 들어와서 한동안 제법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세간에선 그에게 전에는 보이지 않던 상처들에 대해서 물었지만 스즈카는 늘 어설프게 어물거렸다. 매스컴에서야 종말의 흔적이라고 이미 확신하고 기사를 찍어내는 듯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머물렀던 병원에선 아무 말이 없는지라 화재에 대한 내용은 없었고, 설령 그 사실을 밝혀내더라도 스스로 지른 불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테니 괜찮을지도 몰랐다. 누가 알았겠는가. 혼자 죽고 싶어서 지른 불에도 죽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아야세가 물을 것이 두려워 한동안 얼굴을 보이기 싫어했던 때도 있었다. 어떻게 스스로 밝히겠는가. 누군가에게 이 고통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아서 혼자 죽으려 불을 질렀다는 것을. 타 죽는 것보다도 이 불이 또 다른 누군가를 덮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지옥불에서 살아남은 것은. 어쨌든 그가 캐물을까 싶어 일부러 끊임없이 다른 말을 붙이고 왼쪽 얼굴을 보이지 않은 때도 있었지만 오래 시간이 지나도록 아야세는 그 일에 대해 따로 묻지 않았다. 그것이 그만의 배려임을 스즈카는 알았다. 알았기에 언젠가부턴 자연스럽게 얼굴을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야구 시즌이 끝나가며 매스컴의 관심도 조금씩 사그라들어 제게 곤란하게 그 일을 묻는 사람도 거의 없어졌다. 그것이 스즈카는 썩 편하게 느껴졌다.

 

   봄으로 시작해 여름을 건너고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됐다. 시즌이 끝나더라도 연습을 쉴 순 없어서, 스포츠백을 매고 나오니 겨울이 느껴졌다. 눈은 차가웠고 또 바람은 매섭게 불었다. 그래도 더이상 지난 겨울의 외로움은 없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녹을 이 눈길을 지나서 계단을 지나고 여는 이 문 뒤에 있을 약속된 따스함이 그곳에 있었다. 문을 열면 전등빛이 새어나왔고, 철지난 경기 소리가 들렸으며 사람 사는 온기가 느껴졌다. 문을 닫는 소리는 더이상 공허하지 않았다. 그 문을 열고 인사를 건네면 집에 '돌아온' 이에게 마땅히 돌아오는 다정한 대답이 있었다.

 

    "おか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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