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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ISSION2021. 3. 2. 20:23
람템의 재건 작업이 시작한지도 벌써 삼 년이었다. 한때는 떠오르는 달을 함께 보며 벅찬 일들이 다 끝난 듯한 달성감에 젖고 서로의 안녕에 안도했지만 달이 지면 해가 뜨듯 그 뒤로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모든 것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변해갔다. 비는 한동안 이전과 마찬가지로 후두둑 떨어져 재건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발을 잠그고 눈앞을 가렸지만 날이 갈수록 조금씩 줄어들어 며칠을 두고 비가 내리지 않는 날도 있게 되었다. 네트워크망도 특정한 장소에선 쓸 수 있을만큼 복원이 되어 각자의 핸드폰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람템을 침몰시켰던 썩은 빗물도 어느정도 빠져 람템도 수몰도시라는 이름을 벗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일주일 중 비가 오는 날이 더 많고, 좁은 네트워크 스팟을 벗어나면 핸드폰이 먹통이 되고, 수몰지역이라는 이름이 붙은 람템의 거리가 있더라도 수귀범람 사태 때 멈춰버린 인류의 시계는 다시금 삐걱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한번 멈췄던 도혁과 니체토의 시간도 다시 흐르게 되었다. 지옥에서 돌아온 그들에게 람템에서의 삶은 두 번째 생(生)이었지만 이전의 삶과 유달리 달라진 점은 없었다. 도혁의 정육점이 도축장을 겸하게 되고 미친 신부라는 니체토의 이름이 블하블의 바텐더가 되었을 뿐이었다. 도혁이 다시 태어났다고 한들 온몸에 진 흉터가 사라지지도 않았고, 미지근한 가족과의 관계가 드라마틱하게 변하지도 않았다. 딱히 변할 게 없던 건 니체토도 마찬가지여서, 여전히 니체토는 조각상 같은 미인이였고 유별난 성격도 변하지 않았다. 진득하게 니체토에게 달라붙은 병적인 콤플렉스도 먼지 만큼도 남지 않은 자존감도 어떤 증오와 혐오심도.
다만 서로의 삶이 은근하게 그리고 일상의 모든 구석까지 스며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니체토에게 입맞추는 이가 있고, 아침마다 누군가가 싸야하는 도시락 상자 수가 늘어나고, 하루종일 저녁 여덟 시가 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블하블에 단골 손님이 한 명 늘어나고, 쓸쓸한 새벽 세 시의 거리를 함께 걷는 그림자가 생기고, 더이상 외로운 밤이 없어진, 딱 그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수귀범람이 괴로웠더라도 그 이상으로 소중한 만남을 얻었기에 그것은 술 한 잔에 돌아볼 수 있는 기억이 됐고 설령 다시 그 전으로 시간을 돌려준다고 한들,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은 악몽이 되었다.
그리하여 어제가 지나고 돌아온 오늘의 저녁 여섯 시. 니체토는 가게 문을 열고 나와 조금 높게 걸려 있는 표지판을 돌렸다. 원래 좀 더 낮게 걸었어야 했는데, 제 키가 컸기에 어쩔 수 없었다.
OPEN.
운영시간이 오후 여섯 시부터이기에 그는 평소처럼 일찍이 출근하여 영업 준비를 마쳤다. 설거지도, 가게 청소도 끝났고 주크박스에 노래를 넣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군가 정성을 가득 담아 싸준 저녁 도시락을 먹는 것도. 남은 것은 다 씻은 잔을 살짝 닦아주는 정도였다. 여섯 시부터 술을 마시겠다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으니 항상 니체토에게는 삼십 분 정도의 유예시간이 있었다. 니체토는 유예시간을 써 유리잔을 닦으며 가게에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걸어놓은 아날로그 시계를 흘긋 흘겨봤다. 그야, 오늘도 딱히 온다는 말은 안했지만 올 게 뻔했다. 니체토는 일부러 좀처럼 주문받는 일이 없는 더블 샷 잔을 꺼내 꼼꼼하게 닦았다. 언제쯤 오려나. 목장 옆 정육점 운영이 오후 일곱 시까지니 여덟 시 쯤 올 것이다. 어차피 그때쯤 올 걸 아는데도 자꾸만 눈길이 시계에 갔다. 시계 보는 일이 더 잦아지면 잦아질수록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듯 했다. 니체토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은 이 가게를 여는 오후 여섯 시 부터 그가 오기 전까지의 몇 시간이었다. 가게를 열어도 대체로 저녁식사 이후 시간부터 사람이 오는 술집에서는 오픈 직후엔 할 일이 없었다. 니체토는 은은하게 바텐더 테이블을 비추는 금빛 조명에 다 닦은 잔을 이리저리 비췄다. 먼지 한톨 남지 않게 잔을 닦는 것은 이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든 달래기 위해서였다.
손님은 일곱 시부터 들어왔다. 니체토는 어딘가 힘 빠진, 하지만 여전히 빛나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했다. 주문을 받고 술을 섞으면서도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 시곗바늘에 눈길이 갔다. 가뜩이나 오늘은 특별한 것을 준비했는데, 빨리 오지 않는 도혁이 조금은 야속했다. 테이블은 빠르게 가득 차서 떠들석한 가게 분위기에 노랫소리가 점점 묻혀갔다. 그렇게 기다렸던 손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덟 시가 되고도 한 시간이 지나 블하블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혁 씨~"
니체토는 웃으며 반가운 손님을 맞이했다. 니체토는 방긋 웃는 얼굴로 앉으라며 제 앞자리를 권했다. 원래대로라면 어딘가 구석진 작은 테이블에 앉는 도혁에겐 의외의 권유였다. 니체토는 어딘가 석연찮은 얼굴로 자리에 앉는 도혁을 이리저리 살피다 한마디 물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었네요?"
"아…, 그냥 누가 잠깐 한 잔 하자고 해서."
"그럼 여기로 데려오지."
도혁은 니체토의 말에 대충 얼버무렸다. 네가 다른 사람을 접대해주는 게 싫어, 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어… 아무거나 줘."
니체토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열심히 닦은 더블 샷 잔을 들었다. 혹시나 안에 미처 못 닦은 먼지가 있거나 잔에 금이 갔을까 빛에 비춰서 꼼꼼히 확인했다. 이것은 전처럼 심심한 시간을 어떻게든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혁을 향한 온전한 정성이었다. 그는 제임스를 잔에 담고 내놓기 전에 도혁을 보며 한번 빙긋 웃었다.
"오늘은 특별한 걸 준비했어요~"
테이블 안에서 꺼낸 것은, 새로 산 귀여운 코스터였다.
"…뭐야, 이 백곰 코스터."
"그냥 당신 생각이 나서."
가게에 하나 밖에 없는거예요. 니체토는 팔을 내밀어 특별함을 담은 코스터 위에 아이리쉬 위스키를 담은 샷 잔을 내주었다.
"아일랜드에서 만든 위스키 중, 제임스라는 술이예요."
그 뒤로 샷 잔이 어쩌니 하는 설명이 조금 붙었지만, 도혁의 시선은 이미 이 가게에서 하나 뿐이라는 귀여운 코스터를 향했다. 백곰의 얼굴을 귀엽게 본 딴 두툼한 코스터였다. 백곰이건 강아지건 고양이건 동물 종류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는 어딘가를 걷다 발견한 이 코스터를 보고 저를 떠올려준 것이 퍽이나 기꺼웠다. 도혁은 더블 샷 잔에 담긴 위스키를 한번에 쭉 넘기며 코스터를 괜히 들어 이리저리 살펴봤다. 어딘가 험상궂지만 귀여운 백곰이었다. 니체토는 특별한 술을 꺼내와야 한다며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손에 흑맥주 캔을 하나 들고 나왔다.
"오늘은 위스키로 드릴거예요."
"손에 든 건 맥주 같은데…."
"이건 재료. 맥주를 베이스로 하는 칵테일이예요."
특별한 건 새로 산 코스터 뿐이 아니었다. 니체토는 오늘 아침 갑자기 떠오른 근사한 술을 만들기 위해 오기 전 가게에 없던 흑맥주를 사왔다. 도혁에게 더 어울릴 강한 흑맥주를 찾느라 이곳저곳 돌아다녀야했다. 잔은 깔끔하고 큰 하이볼 글라스를 골랐다. 마찬가지로 니체토는 전등빛에 잔을 한 번 비춰보고, 도혁이 보는 앞에서 흑맥주를 열어 글라스에 따랐다. 이후에 있을 특별한 잔을 위해 글라스의 1/4는 여분으로 남겼다. 다음으로 든 것은 크림 리큐르인 베일리스였다. 60ml 더블 샷 잔에 베일리스를 반절 담고, 나머지는 아이리쉬 위스키로 채웠다. 그렇게 담으니 반절은 탁한 회색빛이 도는 크림색이었고, 반절은 노란빛이었다. 도혁은 니체토가 술병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제게 올 특별한 잔을 만드는 모습을 가만 쳐다봤다. 술을 잘 모르고 좋아하기만 하는 그가 보기엔 그냥 신기하기만 한 모습이었지만. 니체토는 샷 잔 끝까지 위스키로 채우고 나서, 도혁이 이미 비운 더블 샷 잔을 치우고 흑맥주를 담은 하이볼 글라스를 내주었다.
"이 술은 아이리쉬 밤(Irish bomb)이라는 술이예요. 우리 가게 메뉴엔 없는 거지만, 당신이니까."
"…어어, 그래. 고마워. 잘 마실게."
도혁은 주는대로 잔을 바로 들었다.
"아, 잠깐. 바로 들면 안돼요."
"왜?"
"그건 그냥 흑맥주. 거기에, 이 샷 잔을 같이 넣어야해요."
니체토는 그렇게 말하며 크림 리큐르와 위스키가 반절씩 담긴 샷 잔을 내밀었다. 넣어? 도혁은 왼손에 샷 잔, 오른손에 하이볼 글라스를 들고 니체토의 눈치를 살폈다. 부어 마시라는건가?
"그냥, 문자 그대로 퐁당 빠트리면 돼요. 잔 그대로. 그리고 중요한 건, 빠트리자마자 바로 마셔야해요."
잔 그대로 넣으라고? 니체토는 머뭇거리는 도혁의 왼손을 잡고 글라스에 샷 잔을 그대로 빠트렸다. 퐁! 하는 소리가 나며 넘친 흑맥주가 살짝 튀었다. 도혁은 옷 소매에 살짝 남은 검은 얼룩을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니체토가 이른대로 곧바로 아이리쉬 밤을 마셨다. 니체토는 술을 쭉 들이키는 도혁을 보며 웃었다. 웃는 입술 새로 나온 말은 이랬다.
꼭 도혁 씨 같지 않아요? 검은 술에 퐁당 빠지는게.
우연이지만, 색도 좀 그렇고. 도혁은 마시던 술을 살짝 뱉을 뻔 했지만, 다행히 끝까지 무사히 삼켰다. 다 마시고 나니 검은 흑맥주에 가려서 안 보이던 샷 잔이 텅 빈 하이볼 글라스 바닥에 똑같이 빈 채로 내려앉았다. 도혁은 괜히 묻지도 않은 술을 찾으며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니체토는 잔을 치워주며 늘 그랬듯 가볍게 설명을 붙였다.
"흑맥주를 베이스로 하고, 아이리쉬 위스키와 크림 리큐르인 베일리스를 같이 넣어서 마시는 칵테일이예요. …오늘 아침에 생각났어요."
언뜻, 우리를 좀 닮은 술이라고. 니체토는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웃었다.
어쨌든 출근중이었으니 마냥 도혁의 앞에만 있을 순 없었다. 니체토는 아이리쉬 밤을 마지막으로 작은 안주거리와 양이 꽤 많은 롱 드링크를 만들어 주곤 가게를 돌봤다. 엉겁결에 잘 앉지 않았던 바텐더 테이블에 끝자락에 앉게 된 도혁은 앞에 놓인 크래커를 집어 먹으며 술잔을 홀짝였다. 블하블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손님들은 구태여 포장마차에 있는 것 마냥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고즈넉한 카페에 있는 것처럼 목소리를 죽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각자 편안하게 자신의 소리로 말을 나눴다. 블하블은 그런 곳이었다. 갈빛 원목가구가 주는 따듯함이 있고,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 맛이 좋은 술잔을 나눌 수 있는 행복이 있고, 주변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가게 규칙에 매이지 않는 편안함이 있는 곳. 블하블을 그런 곳으로 만든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니체토 콘스탄틴이었다. 차가운 가족, 가정폭행이라는 불행, 폐쇄된 마을. 그가 오랜 시간 박탈 당했던 것들이 이곳에 온전히 있었다.
도혁은 니체토가 떠나자, 앉은 자리에서 흘긋 고개만 돌려 그 가운데에서 빛나는 니체토를 찾았다. 블하블에 있을 때도 그의 시선은 항상 니체토를 향해 있었다. 가게 전체에 내린 은은한 노란색 조명이 니체토를 비췄다. 늘 그 자리에 앉는 단골손님이 니체토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세상을 이루는 빛들이 이렇게도 많은데 그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 한 사람 뿐인 듯 했다. 가게 중앙을 보고 있으니 절로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둔 시계에 눈이 갔다. 시곗바늘은 그가 여기 들어왔을 때의 아홉 시에서 꽤 오래 달려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영업이 세 시에 끝나니까 앞으로 네 시간. 어차피 그때쯤 나갈 걸 아는데도 자꾸만 눈길이 시계에 갔다. 시계 보는 일이 더 잦아지면 잦아질수록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듯 했다. 도혁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은 이 가게에 앉아 있는 여덟, 아홉 시부터 새벽 세 시까지의 몇 시간이었다. 블하블의 얼굴마담인 니체토는 항상 바빴다. 손님에 둘러싸여서 웃고, 떠들며 술을 섞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니체토가 도혁이 아닌 다른 것을 보는 건 오로지 블하블에서 뿐이었다. 도혁은 그게 괜스레 얄궂게 느껴져 항상 다른 사람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구석에 앉았다.
열두시 쯤 되니 손님들은 조금씩 돌아갔다. 도혁은 언제 옮겼는지 조금 한적한 자리에 앉아있었다. 마지막으로 주고 간 롱 드링크와 크래커는 이미 다 먹은지 한참 됐지만 다른 바텐더한테 술을 받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아 일부러 시키지 않고 앉아있었다. 가만 앉아서 핸드폰이나 만지작 거리는 것도 물렸다. 도혁은 핸드폰을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고 괜히 코스터를 만지작 거렸다. 빈 잔과 다 먹은 그릇은 바텐더 테이블에 놓고 왔지만 가게에 하나 있다는 백곰 코스터는 슬쩍 같이 들고 왔다. 뭘 봤는지 표정을 팍 구긴 게 도혁을 확실히 닮아 있었다. 시선은 또 다시 시계를 향했다. 이미 한 몇 십분은 지난 것 같은데 몇 분 지나지도 않은 시곗바늘이 짜증났다. 도혁은 말랑말랑한 고무 코스터를 손 안에서 굴리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니체토를 발견하고 고개를 슥 들었다. 무늬가 멋지게 새겨진 낮고 둥그런 글라스 잔에 가득찬 검은색 수면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찰랑였다.
"바빠서 미안해요, 하하… 오늘따라 더 많네요~ 손님."
"뭐, 항상 그랬으니까… 네가 열심히 일하잖아."
확실히 블하블은 항상 영업이 잘 됐다. 블하블을 열겠다고 했을 땐 철저한 쾌락주의자인 니체토가 가게 운영을 잘 할까 걱정한 것도 사실이었으나 막상 가게를 열고 나서 니체토는 제대로, 그리고 성실하게 블하블을 운영했다. 그 점이 내심 기특했다.
"잭콕(JackCoke)이예요."
니체토는 그렇게 말하며 어느새 손을 떠나 책상 위에 반듯하게 놓여 있는 백곰 코스터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조명을 받자 글라스에 딱 맞게 들어간 구체 얼음이 수면 위로 고개를 빠꼼이며 빛났다. 잭콕. 잭콕은 익숙한 술이었다. 잭 다니엘과 콜라를 얼음이 들어가는 온더락 글라스에 빌드해서 마시는 거친 칵테일. 니체토는 항상 특별한 주문이 없는 도혁에게 제법 자주 잭콕을 내주었다. 콜라의 마스코트인 백곰에게 잘 어울리는 술이 있다나 하며.
"같이 먹을 거라도 줄까요?"
"그냥 마셔도 돼. 그… 뭐야, 아까 크래커도 먹었고."
"그래요, 그럼. …자꾸 혼자 둬서 미안해요."
도혁은 괜히 멋쩍어져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차마 그 말에 대고 알면 앞에 앉으면 안되겠냐곤 할 순 없었다. 니체토는 다시 가게의 어딘가로 가버렸고, 도혁은 다시 혼자 남겨진 채 잭콕을 마셨다.
다음 잔을 받은 것은 두 시가 조금 넘은 때였다. 시간이 두 시 정도 되니 손님들도 하나 둘 일어나 돌아가기 시작했고 가게는 자연히 한적해졌다. 직원들이 빈 자리를 정리하며 조금씩 퇴근 준비를 시작하는 게 보였다.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니체토도 뻐근한 어깨를 몇 번 돌리며 바텐더 테이블 안으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손님은 돌아갔지만 영업이 닫는 때까지 있을 손님이 있었으니까.
오늘 니체토는 도혁에게 중간에 준 롱 드링크를 제외하면 술을 세 잔 주었다. 첫 번째, 위스키 스트레이트. 있는 그대로의 위스키를 체격이 큰 그와 닮은 투 샷 잔에 주었다. 두 번째, 아이리쉬 밤. 색 배합이 그들을 꼭 빼닮은 독특한 칵테일. 세 번째, 그를 상징하는 백곰이 마스코트 캐릭터로 선전하는 콜라를 넣은 잭콕. 세 잔 어딘가 그가 연상되는 술이었다. 네 번째 잔으로 준비하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저와 닮은 칵테일이었다. 니체토는 진, 럼, 위스키, 브랜디, 남은 흑맥주와 그리고 샴페인을 꺼냈다. 영국이 기원이라고 하는, 이름의 유래도 무엇도 전부 매우 불명확한 기묘한 칵테일. 잔은 슬림한 굴곡이 우아한 글라스를 골랐다. 만드는 법도 어렵지 않았다. 샴페인을 제외한 모든 재료를 정량에 맞게 잔에 빌드하고 나머지 잔에 꽉 차게 샴페인을 부으면 끝. 니체토는 설핏 웃으며 구석진 자리로 갔다. 도혁은 주변이 한가해지고 니체토가 제쪽으로 오자 은근하게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 끝났어?"
"아뇨."
도혁은 칼같은 대답에 내심 실망했지만 늘 그랬듯 내색하지 않았다. 니체토는 혼자 앉은 도혁에게 같이 먹을 조그만 큐브 치즈와 완성된 술을 내밀었다.
"이건…"
늘 내주는 술의 이름 정도는 알려줬는데, 니체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혁을 바라보았다. 마치 빨리 마셔달라는 듯. 도혁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굳어버린 혈흔 같은 검붉은 색부터 방금 상처에서 배어나오는 피처럼 새빨간 색까지, 보기에도 제법 기묘했다. 설마… 시그니처 메뉴라는 블러드 오브 그리스… …는 아니겠지. 어딘가 기대하는 듯한 니체토의 시선을 받으며 도혁은 마지막 잔을 한번에 쭉 삼켰다. 도혁이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고 니체토는 자신이 방금 내준 술의 이름을 일러주었다.
"행맨스 블러드(Hangman's Blood)라는 술이예요."
술맛은 제법 씁쓸했다. 섬세한 글라스와 매끄럽게 이어진 세련된 붉은색과 달리 여기저기 얼룩진 듯한 맛이었다. 이것저것 전부 다 섞인 술을 마시고 안에 뭐가 들어갔는지까지 추론해내는 섬세함은 도혁에겐 없었기에 뭐가 들어갔는진 몰라도 제법 특이한 술이겠거니, 생각했다. 니체토는 도혁이 내려놓은 빈 잔을 들었다. 남기지 않고 마셔서 잔은 깔끔했다. 옅은 잔향이 느껴졌다. 끝까지 마셔준 게 어쩐지 기뻤다. 항상 니체토가 주는 잔이라면 도혁은 전부 마셨지만 어쩐지 스스로를 닮은 술을 남기지 않고 마셨다는 게 특별하게 느껴졌다. 니체토는 도혁의 속마음을 은근히 찔렀다.
"별로 맛 없었죠?"
"어……."
그냥 먹을만 했어. 어딘가 묘한 술이었긴 해도, 그가 준 잔을 나쁘게 말하기 싫었던 도혁은 대충 뭉뚱그렸다. 그리고 그는 조심히 말을 고른 뒤 덧붙였다.
"그래도 마음에 들어."
그 말 뒤엔 거친 다정함이 있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데. 하긴, 스스로도 맛이 썩 훌륭한 술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 점까지 니체토와 닮아 있었다. 오래 전에 이미 어딘가 새카맣게 썩어 비틀린 그를 마신들. 그래도 도혁이라면 마실 것이다.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니체토는 반대쪽 손으로 사랑스러운 그 옅은 금발을 쓸어주었다. 어떤 손짓이 가끔 말보다 깊다는 것을 니체토는 아주 잘 알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도혁은 멀뚱히 저를 따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니체토를 마주봤다.
"도혁 씨가 좋아할만한 술이 있어요. 위스키 베이스는 아니지만, 한 잔 더 주고 싶은데… 마실래요?"
"어어… 그래. 근데 그… 퇴근 준비 해야하는 거 아니야?"
도혁은 어느새 어수선해진 주변을 보며 물었다. 사실 그러길 바라는 것이긴 했지만 아니어도 그다지 상관은 없었다.
"만드는데 얼마 안 걸려요~ 조금만 기다려요."
과연, 그쯤되니 블하블 안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주크박스도 어느새 마지막 곡을 틀고 있었다. 마지막 잔으로 준비하는 것은 제법 달고 상큼한 술이었다. 럼과 리큐르가 들어가는데도 알코올이 약해 도혁에겐 내준 적이 없었지만, 단 것을 좋아하니 마음에 들어할 법 했다. 준비한 것은 술을 넣고 섞을 쉐이커와 리큐르 크림 드 카시스, 피치 리큐르와 말리부 럼. 그리고 오렌지 주스와 레몬 주스를 함께 꺼냈다. 만드는 방법도 간단했다. 안에 얼음을 넣은 쉐이커에 정량대로 전부 넣고 짧고 강하게 쉐이킹 해 잔에 넣으면 끝. 모양이 둥근 잔을 꺼낼까 하다가 각이 진 삼각형 잔을 꺼냈다. 잔에 꽉 차도록 잘게 간 얼음을 조금 넣고 쉐이커 내용물을 담고, 파릇한 민트 잎을 몇 장 장식으로 올렸다. 니체토는 남은 큐브 치즈로 심심한 입을 달래며 자신을 기다리는 도혁에게 잔을 내밀었다.
"이건… 카시스 프라페(Cassis Frappe)라는 칵테일."
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도혁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검붉은 색부터 밝은 노란색까지 잔잔하게 이어져 보기에도 제법 예쁜 술이었다. 입가에 대기도 전에 달콤한 향이 훅 끼쳐왔다. 그 향은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입에 넣자 더욱 달달하게 목을 적셨다. 다 넘기고도 입안에 복숭아 향이 가득 찬 게 느껴졌다. 도혁이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고 니체토는 자신이 방금 내준 술에 단 한 마디 설명을 붙였다.
"키스하기 전에 마시는 칵테일이예요."
그렇게 말하는 입꼬리가 조금씩 위로 올라가더니 곧 확실히 알 정도로 곡선을 그리며 웃었다. 덜걱거리며 굳어 빈 잔으로 향하는 도혁의 시선을 억지로 붙잡는 것처럼. 니체토는 방해가 되는 잔을 옆으로 밀어 치우곤 상체를 바짝 테이블에 붙여 도발하는 것처럼 웃는 얼굴을 도혁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깜빡이는 횟수를 셀 수 있을 것처럼 눈은 느리게 껌뻑였다. 맞닿는 호흡에선 카시스열매 향기가 도리어 니체토를 유혹하는 듯 했다. 여기에 입맞추라고. 니체토는 기꺼이 유혹에 넘어갔다. 단 걸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새벽 세 시의 입맞춤은 문자 그대로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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