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ariod
COMMISSION2021. 2. 2. 03:56
신년이 되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사옥은 텅텅 비고 본가에 가기 싫은 사람들이나 몇 명 남아 연맹을 지켰다. 이설희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부모가 외국에 있으니 신년이어도 인사드릴 곳이 없었다. 전화로 영 맥 빠진 새해 인사나 나눴을 뿐 회사에 앉아있자 빨간날 기분도 안 들었다. 어제랑 오늘이랑 똑같은 걸 뭐. 신년이니 만큼 편하게 휴가 내라고 했음에도 신정 당일에 회사에 나오는 게 몇 명 없다는 걸 알아서인지, 휴가를 내고 간 영매사들이 열심히 전날에 일하고 간 덕에 출근해도 할 게 없었다. 창고도 들락거려보고 보고서도 쓸 게 없는지 컴퓨터를 뒤졌지만 깔끔하게도 일을 다 마치고 떠난 후였다. 의뢰가 들어오는 것도 없고 파견도 없어서 정말로, 문자 그대로 할 게 없었다. 휴일에 출근했다고 추가수당이 나올텐데 이거 완전, 날로 먹는 느낌. 돈을 그냥 받으면 좋긴 하지만 은근히 몸이 쑤셨다. 연말엔 그렇게도 바빠서 이놈의 일거리 다 사라져버려! 라고 외치기도 했지만 정말로 하나도 할 일이 없자 심심하기만 했다. 괜히 과외할 때 쓸 자료를 들추어보기도 했다가, 어제 올린 보고서에 실수는 없었는지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가 결국 벌떡 일어섰다. 이미 검토에 검토를 마쳐서 제출한 보고서에 실수가 있을 리도 없었고 가르칠 사람도 없는 지금 자료를 본다고 뭐가 나올 리도 없었다. 차라리 청소라도 하자! 일단 생각이 미치니 치울만한 게 생각났다. 회장실 구석에 있는 상자들! 몇 번이고 치우겠다고 말했지만 치우려고 하기만 하면 무섭게도 일거리가 닥쳐서 결국 이제껏 미루기만 했던 짐덩이들. 회장님도 연휴 동안 자리를 비우셨으니까 괜찮을거야. 이설희는 할 게 생겨 은근히 들뜬 기분으로 마른 걸레와 먼지떨이를 들고 회장실로 향했다.
막상 치우려고 가니 언제 생긴건지 못 보던 서랍이 있었다. 깔끔한 모던톤의 2단 서랍장을 주변으로 치우려고 했던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놓여 있었던거지? 상자 내용물은 믹스커피와 녹차 티백, 생수와 종이컵 같은 소모품들이었고 비품실로 옮겨두면 될 듯 했다. 그보다도 이설희는 갑자기 생긴 서랍에 관심이 튀어 괜히 서랍을 열어봤다. 여기 있는 걸 못 열게 하진 않았으니까 괜찮겠지? 잠기지 않은 서랍은 새 것 답게 부드럽게 잘 열렸다. 서랍 안에 든 것은 낡은 앨범과 천으로 구멍이 막힌 도자기였다. 웬 도자기? 그보다도 이설희는 앨범에 눈이 갔다. 설마 회장님의 앨범인가? 괜스레 어떤 사진이 있을지 기대가 되어 이설희는 도자기는 서랍 위에 세워두고 당장 앨범을 열었다.
먼지가 가득 쌓인 앨범 안에 꽂힌 것은 예상대로 금비나의 사진이었다. 이 사람, 사진도 찍는구나. 죽기 이전의 모습인지 다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게 낯설고 신기했다. 웃기도, 울기도 하는구나. 토라지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는구나… 이설희로선 알 수 없었던 모습이 가득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뎌져 마모된 모습과는 달랐다. 이설희는 그 자리에 앉아 청소 같은 건 까맣게 잊고 앨범을 한참이고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앨범을 보며 지금과 다른 회장의 모습을 잔뜩 귀여워하다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덮고 서랍을 닫았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얌전히 닫기만 했다면. 이미 낡아버린 앨범에 딱 붙어버린 페이지를 어떻게든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않았다면.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장을 억지로 벌려 보려다가 힘을 주어 당긴 팔이 서랍장 위에 둔 도자기를 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도자기 병은 힘없이 흔들거리더니 그대로 서랍장 아래로 떨어져 날선 소리를 내며 깨졌다. 으악, 망했다! 서랍에 보관할 정도면 소중한 도자기일 수도 있는데……! 이설희는 앨범 닫는 것을 잊고 허둥대며 깨진 도자기 조각을 얼른 쓸어 모았다. 한곳으로 모인 도자기 조각 위엔 붉은색 돌이 있었다. 그 돌은 잠시 빛나더니, 안개같은 붉은 연기를 매섭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곳은 영매사 연맹이었으니 저런 병에서 위험한 게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구멍을 막아둔 것을 보니 악령을 억지로 못 나오게 봉해놓은 병일수도 있었다. 아니면 금단의 영매술이라든가? 어느 쪽이든, 나 사고 치는건가?! 이설희는 가져온 먼지떨이를 힘주어 잡았다. 안개는 곧 걷혔고, 그곳에 서 있던 것은 악령도, 금지된 기술도 아닌…
"회장님?!"
앨범 속 금비나였다.
갑자기 나타난 금비나(를 닮은 것?)는 의외로 침착하게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 영매사였으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담담히 수긍한 듯 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환상과도 같은 존재임도, 말하지 않아도 납득한 듯 보였다. 이렇게까지 침착하니 오히려 할 말이 없는데……. 이설희는 일단 깨트린 병을 안 보이는 곳에 모아 버렸다. 혹시나 조각이 남아 누군가 밟지 않게 아주 철저하고 꼼꼼하게 치우곤, 갑자기 나타나버린 금비나를 데리고 창고로 향했다. 이런 도자기는 특수한 물건일 게 뻔하니 고서를 보면 어떤 도자기인지 나올 수도 있었다. 이설희가 한참이고 이 책, 저 책을 빠르게 훑으며 도자기, 도자기 하고 중얼거리는 동안 금비나는 그 근처 어딘가에 앉아서 대략 60, 70년 후에 출판될 책들을 구경했다. 한 시간 정도 눈 빠지게 고서를 뒤진 수확으로 이설희는 병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분신의 도자기, 특정한 사람의 영혼이 깃든 물건의 정보를 통해 그 사람의 분신을 만든다. 결국 저 회장님은 분신이라는 거구나. 분신의 분신이라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병 자체가 희귀한 물건은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부탁하면 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이설희는 당장 휴대폰을 들어 동료 영매사의 번호를 눌렀다.
"분신의 도자기 알아?"
"갑자기 전화해서 무슨 소리야?"
"내가 그걸 깨버렸어…… 같은 병 좀 구해주면 안될까? 연휴 끝날 때까진 필요해."
수화기 너머로 불퉁스럽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쉬는 날에 누가 그거 팔겠냐?"
"너 아는 사람 중에 이런 거 파는 사람이 있다며! 제발 부탁할게. 회장님한테 들키기 전에 꼭 돌려놔야해."
"미리 좀 말하라고!"
나라고 오늘 도자기 깰 줄 알았겠냐! 다행히 그는 귀찮아 하면서도 알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니 같은 도자기는 확실히 시간 내로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자기는 연휴가 끝나고 제자리에 넣으면 된다. 이제 남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도둑질이라도 한 것 같고, 어딘가 들키면 안되는 실수라도 저지른 것 같지만서도 연휴에 출근한 다른 영매사들과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회장님을 피해서 연맹 이곳저곳에 금비나를 숨길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엔 말없이 이설희를 쫓아다녔던 금비나도 세 번 정도 장소를 옮기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별로 큰 실수도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되는 거 아니야?"
"절대 안 돼!"
이설희는 딱 잘라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회장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엄숙하리만치 비장했다. 별 거 아닌 도자기를 깬 실수를 한 것 치고는 각오가 대단했다. 회장이 된 나의 부하라는데, 실수하면 엄청 화내기라도 했나? 금비나는 휴게실 소파에 앉으며 문 밖을 무섭게 노려보는 이설희에게 물었다.
"내가 엄청 무섭게 굴어?"
"아냐! 회장님 하나도 안 무서워. 엄청 잘해준다고. 내가 진짜 진짜 매일 귀찮게 구는데 신경써주시고……."
눈으론 누가 오는지 안오는지 깜빡이는 것도 잊고 감시하면서도 입으로는 두서없이 회장 금비나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다. 그렇게 안 감싸도 되는데. 정신없이 줄줄 이어지는 회장에 대한 것들은 대충 들으면 그냥 하는 말 같다가도 귀 기울여 들으면 자세히 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세심한 말들이었다. 머리도 좋아, 다정하지 착하고 강단있지, 약간 무르긴 해도 정말 중요한 건 반드시 지키려고 하셔.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그 다음 말은 나오지 않았다. 금비나는 가만 이설희를 쳐다보다 별 것 아닌 것처럼 한 마디 툭 던졌다.
"혹시 나 좋아해?"
아, 나 라는 건 나 말고 그러니까… 지금의 나? 회장? 무심하게 덧붙인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이설희는 바깥을 보다 말고 멍하니 고개를 바닥에 떨궜다. 들어본 적 있는 질문이었다. 심장을 찌르고 마구 들쑤셨던 그 한 마디. 대수롭지 않은 듯 물어보는 어투까지 똑같았다. 어째서 그런 말투로 물어보는거야. 왜 그런 표정으로 묻는건데? 말하진 않았지만 대답도 들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야? 묻지 마. 묻지 말아줘. 눈가가 불에 데인 듯 덥게 달아올랐지만 애써 이설희는 아무것도 아닌 척 고개를 들고 목전까지 올라온 울음을 꾹 밀어냈다. 사실대로 말하면 스스로를 찌른 듯 아플 게 뻔했지만 그래도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언젠가 사라질 환상이라고 해도. 이설희는 한 차례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응."
다행히 정말이냐고 묻진 않았다. 그보다 금비나는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덤덤한 표정으로 농담을 하니 누구도 못 알아듣는거야.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는 시간이 지나고, 금비나는 잠시 꼼질거리더니 이어 물었다.
"내가 거절했어? 아니면 아직……."
자꾸만 아픈 곳을 찔러왔지만 이설희는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똑바로 눈을 보고 대답하면 그대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괜히 문 밖을 노려봤다. 다른 사람이 오는지 안 오는지 감시하는 척, 하지만 대답이 다 느껴지게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절하셨어."
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금비나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이해 되지 않을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60, 70년 쯤은 더 지난 2100년 대. 지금 이상한 사고로 분신으로 존재하는 저와 이설희는 살아가는 시대가 달랐다. 겉으론 비슷한 나이여도 지금의 자신은 80세는 훌쩍 넘은 노인이리라. 나이를 먹고도 다행히 썩 괜찮은 어른인 것이 조금 위안이 되다가도 눈앞에서 울음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이설희가 안쓰러웠다. 금비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이설희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정도 밖에 없었다. 울지 말라고 어깨를 토닥이는 정도 밖엔. 그 밖에 지금의 자신을 변호한다든지 거짓말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이설희를 다시 상처주는 행동이었다. 손이 어깨에 닿기도 전에, 이설희는 홱 돌아서 금비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눈은 터질 것처럼 울먹이고 있었다.
"저기,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될까?!"
"거, 거절 당한 거 아니었어? 내가 그랬다가 나중에 더 속상해지는 건…"
"그 정도는 금방 아무렇지도 않아질거야."
설령 후회해도 후회는 계속 할 수 있지만 회장님이 날 안아주는 기회는 지금 밖에 오지 않잖아! 금비나는 그 이상 이설희를 거절할 수가 없어 그대로 이설희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것이 퍽 기꺼운 동시에 서글퍼졌다. 예정된 행복과 불행이었다.
제 삶에도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존재했다. 이미 지나간 인연이지만 한때 그들은 이설희를 사랑했고 그 마음만큼이나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다. 그들은 주는 만큼 받고 싶어 했고, 된다면 더 받고 싶어했다. 그것이 스스로를 가꾸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사는 게 좋았던 이설희에게는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결국 인연은 좋지 못하게 매듭을 지었고 그땐 저를 무겁게 짓누르던 것들이 사라져 차라리 속시원했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난, 자신의 사랑을 제대로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어렸구나. 그때 자신이 성가시고 벅차다고 느꼈던 언행이 그대로 제게서 나왔다. 더 관심 받고 싶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고, 된다면 주는 이상으로 받고 싶다고.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그 사람과 같은 환영에게 사랑을 달라고 조를 정도로, 이설희는 한심했다.
슬픈 낭만은 오래가지 않았다. 배가 고팠으니까! 누군가의 온기가 닿자 긴장이 풀려 뒤늦게 허기가 몰려왔다. 하긴, 곧 점심시간일 시간이긴 한데… 식사는 항상 회장실에서 했고 오늘 출근할 때도 도시락을 미리 거기에 두고 오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영 고민이 되었다. 회장님이 당장 없다곤 하지만 올 수도 있고 회장님 외에 다른 사람이 올 수도 있어. 저 혼자 가면 별 문제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금비나의 분신을 여기에 혼자 두고 갈 순 없었다. 누군가 발견해서 곤란하게 만들면 안 돼. 휴게실은 곧 점심을 먹으러 오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금비나를 빈 수련실에 살짝 넣어두고 혼자 회장실로 향했다. 도시락만 들고 바로 나오자. 어쩐지 바짝 긴장이 되어 문을 열기도 전에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밑층에서 멀게나마 밖에 나가서 식사하자는 동료 영매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설희는 습관적으로 회장실의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대답이 들려올리가 없는,
"들어와."
데…….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영락없는 이 방의 주인이었다. 심장이 한 번 멈췄다가 이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도자기 치우고 나오길 잘했다. 그냥 안 들어가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이설희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연휴 동안 안 오겠다던 회장님은 의자에 앉아 연말에 제출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이설희는 쭈뼛쭈뼛 최대한 회장에게서 떨어진 채 걸어 도시락 가방을 홱 낚아챘다. 인쇄된 검은 글자를 보고 있던 시선이 벽으로 튀었다. 그 끝에 걸린 것은 어딘가 고장난 듯 삐걱거리는 이설희였다. 왜 저래? 그는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몸을 뒤로 기울여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이설희는 어울리지도 않는 심각한 표정을 하며 이쪽을 노려봤다.
"…방해 안 할테니까 여기서 점심 먹든지."
"아, 그게 말이죠… 사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오늘은 다른 데서 혼자 밥을 먹을까봐요."
억지로 지어낸 진지한 표정이라 어딘가 미심쩍었지만 회장은 더 캐묻지 않고 그럼 나가보라며 손짓했다. 남이 숨기고 싶은 것을 구태여 캐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한때 상대방을 향한 남모를 배려였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닳아 그저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에 무심해진 것에 가까워졌다. 스물 몇 살이 진지하게 하는 고민도 팔십이 훨씬 넘은 제가 듣기엔 별 것 아닐지도 몰랐다. 괜히 듣고 그게 뭐가 대수냐며 초치는 것 보다는 차라리 듣지 않는 것이 나았다. 본인에게도 그럴 것이고. 이설희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인사 하는 것도 잊고 쏜살같이 바깥으로 도망쳤다.
수련실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없는 게 당연했다. 수련실에 일상적으로 올 만큼 성실하고 진취적인 성격의 영매사들도 오늘은 휴가니까. 처음부터 여기 올 걸 그랬나? 수련실엔 변변한 책상도 없어 이설희는 무릎에 도시락을 얹고 뚜껑을 하나씩 열었다. 분신의 몸으론 식사를 못한다는 걸 본인도 알기에 금비나는 말 없이 그 옆에 가만 앉아 이설희가 식사 준비하는 것을 빤히 쳐다봤다. 이설희는 양껏 챙겨온 도시락을 착착 열더니 젓가락을 들어 혼자 식전 인사를 중얼거렸다. 도시락 내용은 그냥, 평범한 한국인의 도시락이었다. 밥이 있고 잔반이 종류별로 칸에 들어가 있는 정도였다. 금비나는 누가 올 새라 빠르게 밥을 집어삼키는 이설희에게 물병을 내밀며 물었다.
"회장실에서는 별 일 없었어?"
"아, 그게. 회장님이 벌써 와 계셨어. 나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연휴 땐 안 오시겠다고 했는데 일이 빨리 끝나셨나봐."
일은 무슨 일? 연말에 마무리 못한 일이 있어. 이설희는 열심히 70년 후에 금비나가 처리하게 되는 의뢰 내용을 설명했다. 신년이 될 때마다 사람들이 열심히 소원을 빌잖아? 그 덕에 영혼들이 많이 꼬이는데……. '제 나이에 맞는' 금비나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평범하게 썩 괜찮은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기분이 이런 걸까. 결단코 성의 없거나 심드렁한 건 아니지만 어떤 얘기를 해도 덤덤하고 어딘가 건조하기만 한 회장과는 달랐다. 이야기는 점점 의뢰의 내용을 벗어나 결국 회장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날 정말 가차 없이 찼어. 여지도 안 주고 차버렸다고. 그런데 아직도 다정해서 속상해. 아무리 그래도 그런 모습을 보면 좀 기대가 되잖아? 아니, 되어버리잖아?! 내가 이상한 거 아니지?"
"그렇지."
"그런데 금방 현실적인 이유를 들면서 다시 싹 잘라내는 걸 보면 아, 회장님은…"
날 정말 유의해야하는 영매사, 그것도 아니면 그냥 어디에나 있는 사회초년생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뒤통수라도 맞는 것처럼 느껴진다니까. 그 말에 금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먼 미래의 자신이 상처입힐 사람에게 한 말이 무겁게 느껴져서일까. 금비나는 어렸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말이 가지는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친구로서도, 누군가의 상사로서도, 누군가의 우상으로서도, 누군가의 사랑으로서도. 자신이 내뱉는 말은 묵직하게 떨어진다. 그것을 금비나는 아주 잘 알았다.
이야기는 물 흐르듯 흘러 언젠가부터는 회장이 이설희에게 얼마나 잘대해주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불평불만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이설희는 회장의 좋은 점을 잔뜩 금비나에게 쏟아냈다. 말리지 않으면 하루종일이라도 이야기할 것 같았다.
"얼마나 강하고 멋진데! 차라리 멋지지라도 말든지……. 아. 멋지기만 한 게 아니고 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있다? 아, 너는 앨범을 못 봤겠네. 앨범에 있는 사진들도 전부 귀여웠어."
금비나는 가만 팔 속에 양 무릎을 모으고 도시락 먹는 것도 잊은 채 한참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설희를 바라봤다. 회장의 이름이 나온 이후로 도시락은 손도 대지 않고 식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한 번 쯤 젓가락으로 잔반을 집으면서 식었다고 실망하면서도 한참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갔다. 전부 다 투박하고 솔직하기 그지없는 말들이었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진심처럼 다가왔다. 이렇게 전부 털어놓을 수 있는 건 이 사람이 바보같이 솔직한 사람이어서일까, 아니면……. 금비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번 의뢰에서의 활약상까지 주절주절 거리던 이설희는 그가 일어서서 제게 가까이 다가오자 말을 멈췄다. 왜, 하나 줄까? 분신이 아무것도 못 먹는 걸 알면서도 이설희는 괜한 질문을 했다. 금비나는 눈을 껌뻑이며 이쪽을 보는 이설희에게 담담하게 한 마디 했다. 그 말도 바보같을 정도로 솔직했다.
"나는 언니가 좀 좋아질 것 같아."
언니?! 좋다는 말보다도 금비나가 저를 언니라고 부른 것이 퍽 기꺼웠다. 말도 안돼, 내가 언니구나! 한 살 더 먹은 것이 새삼스레 기뻤다. 녹음이라도 해두었다면 좋았을걸. 하지만 기쁨도 그렇게 오래가진 못했다. 말하자면 언니라는 말은 수취인의 이름에 불과했다. 그 박스 안의 내용물은……. 이설희는 헤실거리고 웃다가도 금세 표정을 굳혔다. 불만으로 입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다.
"그렇게 기대하게 하니까 더 속상한거라고."
이설희가 그렇게 말할 것을 모른 것은 아니었다. 아마 이설희는 이 말 때문에 언젠가는 더 괴로워 할거라고, 알았으면서도 전하고 싶었다. 그 말은 예정된 상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기도 했고 지금이 아니면 전할 수 없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나이를 먹고 너를 만난 나는 이런 감정은 가지지 않을테니까 지금이 아니면 네게 말할 수 없는 말인걸. 다음에 건넨 말은 잔잔하게 울리는 것 같다가도, 어딘가 힘이 실려 확실하게 이설희의 마음에 떨어졌다.
"포기 안했으면 좋겠어."
언제 놓았는지 손엔 수저도 없었다. 침묵은 밥알을 어떻게 씹고 삼켰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포기 안 했으면 좋겠다니. 그야 포기하려고 한 적도 없었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영원히 놓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설희는 어렴풋이 그때 알았다. 금비나의 이 말이 자신을 영원히 속박하는 저주가 될 것이라고. 존재하지 않아야하는 환영이자 환상과 같은 금비나는 곧 사라지겠지만 그 말은 사라지지 않고 줄곧 제 마음을 묶을 것이라고.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겨울 바람이 어딘가 쓸쓸했다. 아는지 모르는지, 금비나는 이설희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해도 돼?"
지금 하라고 하면 죽고 싶을 정도로 슬퍼질지도 몰라. 그야, 넌 이제 가버릴거고 결국 없었어야 할 존재인 네게 받는 사랑도원래는 없었어야 하는 거라고. 사실은 별로 안 하고 싶은데 미안해서 그러는 거 아냐? 오히려 이쯤되니 금비나가 미워졌다. 그 병은 깨트린 사람을 저승으로 홀리기 위한 악령인 거 아닐까? 저승사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온다는 말도 있잖아. 그래도 솔직히, 회장님이 이런 말을 한다면. 티내지 않으려고 똑바로 이쪽을 보고 있지만 손이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별로 안 하고 싶은데 억지로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고. 결국 상처 받는 건 제 뿐이라는 걸 잘 아는 금비나가 농담으로라도, 장난으로라도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고. 진심인데 어떻게 거절하겠어. 설령 곧 사라질 분신이라도 금비나에게 상처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설희는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은, 네게 한 번이라도 좋으니 사랑받고 싶을 뿐이라고. 그런 본심은 모른 척 하고.
수줍게 입 맞춘 금비나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마법이 풀리듯 옅어지더니 곧 보이지 않게 됐다. 마지막으로 본 웃는 얼굴은 필름에서 본 것보다도 훨씬, 사랑스럽고 어딘가 서글픈 듯한…….
마치 꿈에서 깨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은 한박자 늦게 화륵 타올랐다. 다, 다행이다… 아무리 이설희라도 그런 모습을 금비나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마치 짜여진 타이밍처럼 수련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회장이었다. 그는 기세 좋게 문을 쿵 열고 들어와 이설희를 한껏 놀래켰다. 반 밖에 못 먹은 도시락이 무릎에서 떨어져 바닥에 엎어졌다.
"평소랑 다르게 행동하길래 악령에라도 씌였나 싶어서 왔어."
표정 없는 그 얼굴 위로 사진에서 본 그가 겹쳐보였다. 아니, 사실은 사진이 아니라 제가 좀 좋아질 것 같다는 그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벌게진 얼굴은 진정할 줄 모르고 자꾸만 달아올랐다. 겨울바람이 그를 식혀주기까지 꽤 오래 걸릴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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