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 이야기
COMMISSION2021. 3. 8. 02:20
당연하게도 주말의 놀이공원은 붐볐다. 약속을 잡은지 일주일 쯤 전에 차라리 하루 통째로 빌릴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있는 사람 하나 없이 텅 비면 그 기분이 또 안 난단다. 내심 내키지 않았어도 메이 아이든은 제가 기르는 인간의 바람은 뭐든 들어주고 싶었으니 어쩔 수 없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개장시간에 맞춰 놀이공원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쉬는 휴일에 놀이공원에 즐기러 왔다곤 믿을 수 없는 반듯한 차림새로. 멋들어지게 만진 머리는 곧 롤러코스터 위에서 잔뜩 흐트러질 것이고, 선을 맞춰 다림질한 정장엔 조각 피자 조각이 묻을 것이며, 그가 아닌 누군가 광이 나게 닦아 준 구두에는 철없는 아이들이 실수로 남긴 발자국이 남겠지만 그것이 가장 그 다운 모습이었다. 꼭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입어야겠냐는 말이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메이는 적당히 넘겼다. 편한 모습으로 데이트 하자니, 데이트라고 한다면 더욱이 차려입고 싶은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개장시간인데도 사람이 엄청 많네!"
"뭐, 주말이니까……."
사람이 미어터지게 많은 건 아침에도 똑같았다. 도장이 찍힌 입장권 팔찌를 받자마자 서로 눈짓을 교환하고 인기 있는 어트랙션으로 우다다 달려가는 사막여우와 늑대, 수학여행인지 교복을 입은 한 무더기의 사람들, 철없이 부모의 손을 놓고 뛰어다니는 어린이 개들. 아이들은 뒤를 보며 시끌벅적 뛰어다니다 결국 가만 서 있는 메이에게 한번 꿍 부딪혔다. 메이는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고, 아이가 돌아가자마자 필요에 의해 만든 웃음을 지웠다. 이런 데 오고 싶나? 몇 없는 휴일을 써서 사람들에게 치이고 하루종일 서 있다가 몇 번 타지도 못할 어트랙션을 즐기고 집에 돌아가는 것이 로망이라는 말은 메이에겐 영 현실성이 없어보였다. 그래도 메이는 목끝까지 차오른 말을 정장 주머니 쪽에 묻은 과자가루와 함께 남몰래 털어냈다. 슬럼에서 온 제로에겐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로망이었다. 내일의 해를 따듯한 곳에서 보는 게 그의 꿈이었고 폭신한 이불을 덮고 자는 것이 소원이었다. 사는 세계가 다르기에 존재하는 격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서로의 반려가 된 것이 꽤 오래 전임에도, 여전히 메이는 제로의 조그만 소원들이 시시했고 제로는 간혹 메이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거리는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줄어들었고 지금은 서로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때로 서로가 멀게 느껴질 땐 가만 앉아 눈을 마주쳤다. 한때 차가운 얼음 같았던 눈동자는 맑은 하늘빛이 됐고, 재만 남은 듯한 죽은 붉은 눈은 이젠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됐다. 그리고 따듯한 시선이 오가면 다시 일어나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들이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은 그것의 반복이었다.
제로는 보라색 종이팔찌를 두 개 들고 가만 서있는 메이에게 뛰어왔다. 그렇게 가고 싶다더니 제대로 보지 않더라도 들뜬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제로는 신이 나 있었다.
"이걸 들고 가면 된대!"
"그래."
근데 이 종이를 계속 들고 다녀야 하는거야? 제로는 막대스틱 같은 입장권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메이를 쳐다봤다. 종이의 뒷면을 긁어서 팔찌로 붙여서 다녀야 한다는 걸, 아마도 그는 몰랐으리라. 메이는 아무 말 없이 손에서 팔찌를 하나 뽑아 제로의 손목을 잡고 입장권을 팔찌처럼 둘러주었다. 제로는 제 손목에 채워진 놀이공원 이용권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이용권엔 놀이공원의 이름과, 날짜, 그리고 분실하면 재입장이 불가하다는 안내가 콩알만한 글씨로 써져 있었다. 제로는 하나 남은 입장권을 메이의 눈앞에 척 내밀었다. 입에선 반려동물이 할 것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당돌한 말이 튀어나왔다.
"손!"
어쭈. 메이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졌다. 지금 누가 할 말을… 하지만 그는 순순히 정장 소매를 걷어 시계를 차지 않은 쪽의 손목을 제로에게 내밀었다. 제로는 짧은 손톱으로 입장권 뒤를 한참 긁고 나서야 테이프 면을 떼내고 그 손에 입장권을 채워줄 수 있었다. 메이는 제 손에 삐뚤게 둘러진 입장권을 쳐다봤다. 글자도 뒤집어졌고, 부착면도 어긋났지만 그것마저도 제로 다워 메이는 저도 모르게 힘빠진 웃음을 지었다. 사람도 많고 번잡하기만 한데, 라고 말해도 여우의 귀는 솔직하게 은근한 기쁨을 드러냈다.
어쨌든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놀이공원에 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최대한 길게 놀고 싶다는 제로의 응석이기도 했지만, 오후라면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할 인기 어트랙션을 빨리 타기 위해서였다. 밑에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놀이공원 곳곳에서 파는 간식거릴 함께 먹는 것도 제로의 로망에 포함된 모양이라, 메이는 구태여 프리미엄 이용권에 대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도 로망이지만 이것저것 타고 싶은 건 많은지 제로가 지도를 보며 손가락으로 여기 저기 짚는 동안 메이는 놀이공원 전용 어플을 다운 받았다. 하루종일 기다리기만 하면 다 못 탈 게 분명했고 종일 기다리지 않고도 탈 수 있는 프리미엄은 또 싫다 하니 시간에 맞춰 예매한다면 덜 기다리고 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이렇게까지 빙빙 돌아가는 게 제법 귀찮아도 눈을 빛내며 지도의 한가운데를 가리키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었다. 메이는 제로에게 보이지 않게 화면을 살짝 기울이고 대충 대꾸했다.
"롤러코스터가 오후에 제일 줄이 길어진대!"
"그래서, 그거 먼저 타자고?"
"그래야 좋지 않을까? 지금 가도 조금 기다린다던데."
제로는 지도를 반 접고 곁눈으로 핸드폰을 보는 메이의 팔을 끌었다. 일단은 롤러코스터를 타겠다더니, 시선은 길목 중간에서 파는 와플에 꽂혀 있었다. 은근한 식욕을 담은 눈길이 메이에게 꽂혔다. 와플 먹을래?
"…그래. 와플."
그럼 메이는 그걸 또 사줄 수 밖에 없었다.
밖에 나가면 와플 위에 생크림이며, 초콜릿이며, 제철 과일이며, 온갖 토핑 소스들이 다 올라간 와플을 한가득 먹을 수 있는데 종이에 반 접힌 평범한 생크림 와플이 뭐가 좋은지 기다리는 줄이 제법 길었는데도 제로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 듯 보였다. 와플은 줄보다 훨씬 짧아서 중간까지 가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제로는 빈 종이를 아쉬운 표정으로 접었다. 하나면 된다고 하긴 했지만 막상 정말로 하나만 먹으니 어딘가 모자랐다. 딱 하나 반이면 좋을 것 같은데… 알았는지 몰랐는지, 메이는 제로가 쓰레기를 주머니에 구겨넣자 제가 먹던 와플을 그의 입에 갖다댔다. 거의 먹지 않은 채였다.
"메이, 안 먹어? 맛있는데… 혹시 입에 안 맞았어?"
"아니, 그냥. 제로 많이 먹어."
신경쓰지 말고. 퍽 다정한 것이 꼭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는 듯 했다. 반려관계는 언젠가부터 조금씩 그렇게 변질되고 있었다. 반려(伴侶)는 그들 사이에서 언젠가부터 가까이 두고 기르는 것이 아니라, 짝이 되는 누군가를 이르는 말이 되어가고 있었다. 제로는 주는대로 거의 새 것이나 다름없는 블루베리 와플을 먹었다. 방금 먹었던 딸기와는 다른 행복이 있었다. 저게 저렇게 좋을까. 와플 두 개도 줄보단 짧았다. 남은 줄은 서로 손을 맞잡고 어제와 내일의 얘기를 한다든지, 지도를 펼쳐놓고 다음 행선지를 정한다든지, 누군가는 높이 올라가는 롤러코스터를 보며 감탄한다든지, 누군가는 그 사이에 몰래 다음 어트랙션을 미리 예약한다든지 하며 보냈다.
과연, 이 놀이공원의 대표 어트랙션이라던 롤러코스터는 생각보다도 빠르게 달렸다. 처음엔 안전바 사이로 팔을 내밀어서 흔들던 제로도 낙하가 시작되자 손잡이를 꽉 붙잡고 바람 사이로 비명을 질렀다. 드문드문 다시 올라가며 속도가 느려졌을 땐 파랗게 질린 얼굴로 옆에 가만 앉은 메이의 팔을 붙잡는다거나, 까마득한 아래나 너른 하늘을 상공에서 보거나 했지만 결국 다시 낙하가 시작됐을 땐 바람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눈을 감고 있었다. 메이는 롤러코스터를 담담하게 즐겼다. 롤러코스터를 즐겼다기 보다는, 옆에 앉은 동행인의 희비를 즐겼다. 조용히 난리법석이 난 옆자리를 흘겨보는 눈동자와는 다르게 머리카락은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대로 마구 휘날렸다. 이따금씩 하늘을 날던 머리카락이 종종 이마와 콧등을 때리고 눈을 찔렀다. 귓속을 가득 채웠다 그대로 빠져나가는 바람이 간지러웠다. 한바퀴 돈 롤러코스터는 또다시 가파른 경사 위를 달려갔다. 메이는 이리저리 뻗친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정돈되지 않은 건 참기가 힘들었다. 옆자리 사정이 어떻든, 바람에 난도질된 울상인 얼굴로 제로는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안전바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옆자리의 메이를 찾았다. 서로 다른 사정을 가진 손이 맞닿았을 쯤 롤러코스터는 다시 급강하 했고, 결국 머리카락은 하염없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내렸을 땐 이미 만신창이였다. 메이는 롤러코스터가 가장 낮은 레일로 돌아와 어트랙션 개찰구에 들어갈 때 머리를 좌우로 털어 정돈했다. 제 꼴이 어떤지 거울이 보고 싶었다. 제로는 반 정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상체를 누르는 안전바에 머리를 톡 기댔다. 저 머리가 기댄 곳이 메이의 어깨가 아닌 게 퍽이나 아쉬웠지만, 여전히 손은 꼭 붙잡은 채였다. 서로의 안전바 손잡이가 하나씩 빈 채로 두 사람은 개찰구로 들어갔다. 무지개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마이크에 대고 콧노래를 부르며 작별인사를 했다. 안전바는 천천히 올라갔고, 제로는 어딘가 혼이 빠진 표정으로 내려 지도와 가방을 챙겼다. 중력의 반대 방향에 매달리는 경험은 이번 한 번으로 괜찮을 듯 했다. 그래도 어트랙션 홈을 나오자마자 지나간 공포는 잊을 수 없는 짜릿한 스릴이 되어 제로는 밝은 얼굴로 메이를 돌아봤다. 재밌었어! 그 천진한 눈은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한참 인기 어트랙션을 타고 나니 점심이 지나 있었다. 하나를 타고 나오면 곧바로 지도를 펼쳐들고 다음엔 이걸 타야한다고 손가락으로 콕 콕 짚거나 대기줄에서 이것도 타고싶다고 졸라대는 탓에 메이는 하루종일 시간을 맞춰 칼같이 프리패스를 예약하고 하나를 내리면 내리는대로 행동이 느린 제로를 끌고 바쁘게 돌아다녔다. 길은 알아? 지도를 갖고 있지도 않은데 자꾸만 저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는 게 제로 딴엔 조금 불안했지만서도 결국에 메이는 헤매지 않고 지름길을 골라 돌아다녔다. 당연했다. 철두철미한 성격인 그는 다음 어트랙션 위치를 어플로 미리 확인해 가장 빠른 길을 체크하는 정도의 센스를 잊지 않았으니까. 줄이 길다고 소문난 것들이 한군데 모여 있었다면 수고를 덜었겠지만 구석진 곳들에 제법 멀리 떨어져 흩어진 탓에 그 넓은 놀이공원을 한바퀴 쭉 돈 셈이 되었다. 역시 이쯤되니 메이도 진이 빠져 두 사람은 길목 중간에 설치된 야외 테라스에 앉았다. 손에는 종이박스에 담긴 미국식 핫도그와 조각피자가 들려 있었다.
"진짜 재밌었다, 그치?"
"뭐가 제일 재밌었는데?"
"바이킹!"
제로는 밝게 대답하며 피자를 한입 물었다. 몸이 지친 만큼이나 식욕이 돌아 별 것 들어있지 않은 피자도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하긴, 바이킹도 줄이 제법 길었다. 한번에 가장 많은 인원을 태우고 운행하는 만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긴 했지만 그 앞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수는 그 인기를 상징했다. 좌우로 높게 움직이는 단순한 궤적의 어트랙션이지만 한쪽 끝까지 올라갔을 때의 아찔한 높이나 하강할 때의 속도감, 반대편으로 올라갈 때의 중력의 무게 등 롤러코스터와는 다른 스릴을 가진 바이킹 위에서 제로는 안전바가 아닌 메이를 끌어안았다.
"으악, 메이! 내려간다, 내려가… 메이이!"
손을 잡고 달래준들 각도 120까지 올라가는 바이킹 위에선 느껴지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바이킹 밖에 있는 사람도 그 이름을 알 정도로 메이의 이름은 몇 번이고 바이킹 좌우에서 높게 울려퍼졌다. 가장 무서워했던 놀이기구가 바이킹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도 그게 가장 좋다니, 메이는 기어코 짓궂은 말로 제로를 놀렸다.
"아. 그러고보니 그 바이킹, 어떤 여우 씨 고막이 터져라 소리지르는 사람이 있었지."
"……."
먹던 피자가 목에 걸린 듯 제로는 연신 콜록였다. 홱 고개를 돌려 마주친 눈엔 장난기가 가득 서려있었다.
"그렇게 겁이 많아서 어떡해, 제로. 인간은 다 그런가?"
"겁 먹은 적 없거든?! 잡종이면 너처럼 다 삐딱해?"
"아, 그런 편이지."
입꼬리는 슬그머니 올리면서 말로만 순순히 인정하니 한층 더 기분이 언짢았다. 제로는 먹던 것도 벤치 위에 두고 지도를 세게 펼쳤다. 몇 번이고 펼치고 닫았던 놀이공원 지도는 어느새 닳아있었다. 그 손으로 짚은 곳은 줄줄이 이어진 어트랙션 코스의 어딘가에서 여기만큼은 안 갈거라고 했던 귀신의 집이었다.
"여기도 갈 수 있어!"
다음 행선지는 그렇게 결정됐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앉아서 쉬던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귀신의 집이 있었다. 오색찬란한 유채색으로 가득 찬 거대한 놀이공원에서 유일한 칙칙하고 음침한 기운을 격리시키듯, 높은 숲이 그 일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빛 하나 들지 않는 깜깜한 어둠이 숲 입구에서부터 보였다. 제로는 안이 보이지도 않는 숲 입구에서 멈칫였다. 손이 절로 메이의 팔을 향했다. 메이는 발이 멈춘 제로를 재촉였다.
"안 가?"
겁쟁이의 등을 떠미는 것은 얄미운 도발이었다. 가면 될 거 아냐, 가면! 제로는 재촉에 못 이겨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숲 안으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끌고 들어간다는 핑계로 메이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막상 들어가니 안전 상의 문제 때문인지, 나무들에 어두운 전등이 걸려 있어 길을 볼 수 있었다. 종종 전등 아래에 걸린 표지판에 그려진 녹아내린 듯한 화살표가 꺼림직했다. 깊게 들어가고 나서야 줄을 선 사람들이 보였다. 줄은 그다지 길지 않았고, 그 끝에 귀신의 집이라는 테마에 걸맞는 무너진 저택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저택은 이미 반 정도는 부서졌고 먼지나 썩은 자재, 거미줄, 깨진 유리창, 무성하게 자란 입구의 잔디, 부러진 우체통 형식의 안내판 등 섬세한 디테일이 있었다. 직원들도 분위기에 어울리게 어딘가 한 번 정도는 죽었다 살아난 듯한 사용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목소리도 매몰차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워서 꼭 유령이 말을 거는 듯 했다.
"심약한 분은 입장을 재고해주세요."
"그렇다는데."
"돼, 됐거든!"
돌이킬 기회는 지났고, 두 사람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안도 제법 그럴 듯 했다. 안에 있는 걸 볼 수 있을 정도의 옅은 빛이 다 깨진 전구에서 나와 저택을 비췄다. 이용자가 헤매지 않도록 길은 다른 곳으로 갈 수 없게 쭉 뻗어 있었고, 나머지 방은 대부분 창문으로나 안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메이는 제로가 현관에 하나 있는 전구에 눈이 박힌 동안 슬쩍 유리창으로 안을 살펴봤다. 먼지 낀 창문에 손자국이 다닥다닥 남아있고, 안엔 잘린 마네킹 목이 하나 굴러다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안에 있는 가구들도 대부분 박살이 나 있었고 어떻게 한 건지 자꾸만 허여멀건 것이 안쪽에서 스슥이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게 연출이라면 어떻게 하는 건지 도리어 궁금해졌으나, 구태여 제로를 부르진 않았다. 보면 기절할거야. 지금도 어쨌든 최선을 다해 없는 용기를 내고 있는 것 같으니 이 이상으로 놀래키고 싶진 않았다.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어쨌든 본인이 들어오자고 했으니 제로는 자존심을 앞세워 몇 발짝 앞서갔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바닥에서 나오는건지 마룻바닥이 삐그덕거렸다. 스산한 바람 소리가 들리자 제로는 저도 모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과연, 메이가 느끼기에도 소리 뿐 아니라 정말로 바람이 어디선가 들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오른쪽 복도엔 기괴한 그림이 반쯤 찢어진 채 걸려 있었고, 왼쪽 복도엔…….
"으아아아아아악!!"
그게 앞으로 수십 번 이어질 비명소리의 첫 번째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거기에 메이드복 입은 강아지 좀비가 나올 줄 어떻게 알았겠냐고!"
제로는 결국 메이에게 안기다시피 하며 저택의 뒷문으로 나왔다. 기어코 안에서 울음이 터졌는지 눈밑이 머리카락 만큼이나 벌겠다. 쥐떼가 갑자기 발밑으로 지나가질 않나,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질 않나, 피로 점칠된 시체가 미라처럼 갑자기 일어나질 않나, 어디를 보고 어디를 걸어도 제로에겐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귀신의 집만큼은 그래도 재밌었어, 라는 기억이 되진 않는 듯 했다. 무언가 튀어나온 줄 알고 저를 잡은 메이를 힘껏 밀치거나 무섭다며 이리저리 잡아당기는 바람에 도리어 메이도 피곤해졌다. 어느덧 시간도 저녁인데, 차라리 일찍 끝내고 밖에 나가서 근사한 식당에나 데려갈까. 슬슬 메이가 나갈 눈치를 보이자, 제로는 지친 것도 잊고 팜플렛 맨 뒤에 있는 저녁 퍼레이드를 메이에게 보였다.
"아직 못 나가, 이거 저녁에 봐야해!"
"…퍼레이드?"
퍼레이드 뿐 아니라 불꽃놀이도 해. 그깟 불꽃놀이 쯤이야 집에 앉아서도 보일 수 있게 쏘아올릴 수 있었지만 꼭 보고 가고 싶다는 그 눈을 이길 순 없을 듯 했다. 결국 식사는 동쪽 식당가에 있는 씨푸드 레스토랑에서 하고, 퍼레이드까지 남는 시간은 불빛이 번쩍이는 게임센터에서 보내거나 기념품샵을 돌아다녔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메이는 제로를 데리고 놀이공원의 한가운데, 오만가지 꽃이 계절을 무시하고 피어있는 화원으로 데려갔다. 퍼레이드가 행진을 쭉 이어 도착하는 장소가 이곳이었고 행진이 끝난 후엔 불꽃놀이와 스테이지 쇼를 꽃밭 바로 앞의 대형 스테이지에서 하니 이것도 저것도 전부 보려면 이곳이 가장 좋아보였다.
"아, 메이! 저기 퍼레이드 시작한다!"
저 멀리 화려한 LED 전구가 가득 달린 이동형 스테이지가 신비로운 분장을 한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빛나는 스테이지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판같기도 했고, 숨겨둔 스테이지가 올라 다단 케이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위에 탄 사람들은 이곳의 어트랙션이 저마다 가진 환상 속 존재였다. 동굴 속을 탐험한다는 롤러코스터엔 모험가가 있었고, 무너진 저택을 빠져나간다는 귀신의 집엔 이미 죽은 사용인들이 있었다. 바다 모험담을 담은 바이킹에는 해적이, 빙글 빙글 돌아가는 회전컵엔 과자세계의 요정이 있었다. 컨셉에 충실하군. 어느새 제로는 메이의 손을 놓고 꽃밭의 앞까지 달려나간 후였다. 메이로선 제로가 조금이라도 제 옆을 떠나는 것이 끔직하리만큼 싫었지만 이제와 그를 나무랄 순 없었다. 물론 신나서 그런거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그랬다. 만약 그가 제로에게 있어 불행이라면……. 메이는 구태여 제 손을 놓는 제로를 붙잡거나 먼저 뛰어간 제로를 따라가지 않고 멀리서 그를 바라봤다. 온갖 색으로 빛나는 환상 속에 있으면서도 눈에 들어오는 건 그 뒷모습 뿐이었다. 퍼레이드가 얼마나 화려하든, 이어질 불꽃놀이가 얼마나 예쁘든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보고 싶은 건…… 그렇게 생각했을 때, 눈이 마주쳤다.
퍼레이드 안에 있는 그 누구라도 놓치지 않을 것처럼 뚫어져라 행진을 보던 제로가 뒤를 돌아 메이를 보고 있었다. 약속된 타이밍에 꽃들이 일제히 개화했다. 온갖 꽃을 다 모은 꽃다발이 가장 향기롭듯, 그곳은 지금 이 순간 그 어디보다도 향긋했다.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꽃내를 싣고 메이를 스쳤다. 스테이지를 밝히는 강한 조명이 후광처럼 제로를 비췄다. 꼭 안은 품 안엔 어딘가 찡그린 표정이 못난 검은 여우 인형이 있었다. 제로는 가만 멈춰서 넋놓고 저를 보는 메이에게 다가와 손목을 잡고 앞으로 끌었다. 프리지아, 붉은 장미, 코스모스, 수선화. 사계절의 향기가 났다. 다시 돌아온 바람은 어느새 옷자락을 흔들며 꽃향기를 묻히고 떠났다. 멀리 금색 빛이 따스하게 두 사람을 비췄다. 꽃밭의 끝에 섰을 때, 하늘로 붉은 불꽃이 높게 치솟더니 온 하늘을 다 덮을 것처럼 크게 터졌다. 이어서 무지개색 불꽃들이 저마다 다른 높이로 올라가 다른 크기로 하늘에 꽃을 그렸다.
"봐, 예쁘지?"
마치 거짓말같은 환상처럼 제로는 맑게 웃었다. 멀리 무대에서 환상의 나라에 어서오라는 요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 환상이 있다면……. 메이는 폭죽이 터지는 하늘엔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응, 예쁘네."
그 눈이 담은 것은 단 한 사람 뿐이었다.
'COMMISS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밤하늘을 걷는 두 방랑가(外傳) (0) | 2021.03.11 |
---|---|
밤하늘을 걷는 두 방랑가 (0) | 2021.03.10 |
내일의 하늘 (0) | 2021.03.03 |
Off the MENU (0) | 2021.03.02 |
YOUR SANDGLASS (0) | 2021.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