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SICK GIRL (下)
DREAMING/ACE OF DIAMOND2021. 2. 12. 06:23
그 뒤로 시간은 4년이나 흘러, 아쉽게 고시엔 출전을 놓치고 은퇴하여 졸업한 유우키는 카타오카 감독의 모교인 메이지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동안 우연이라도 아메나시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아메나시와 유우키는 다른 반이었고 그 뒤로 아메나시가 야구부에 나오는 일도 없었으니 만나지 않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어쩌다 복도에서 만날 법 하다가도, 아메나시가 필사적으로 그를 피해 다녔기에 언젠가부터 유우키는 우연히라도 마주쳐 그 날의 이야기를 매듭짓길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하긴, 만나서 무엇을 하랴. 아메나시는 다른 사람을 좋아했으니 이제와서 저에게 할 말도 없을 것이고, 딱히 유우키에도 들을 말은 없었다. 상처를 줘서 미안하든지 하는 말을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언제까지고 그 날 아메나시를 세게 밀쳐 바닥에 쓰러트린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런 표정은 처음 봤어. 그야 그때 자신이 지은 표정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겠지만, 한순간이라도 그 눈에 서린 것은 명백한 공포였다. 단지 그것만이 마음에 걸렸다. 그 밤에 남동생이 말하길, 아메나시는 울면서 돌아갔다고. 아메나시가 말하지 않았으니 그 눈물이 그때의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유우키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 때문이라고. 너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아메나시가 사정없이 쑤시고 갔던 상처는 어느샌가 뒷전이 되었다. 차라리 끝까지 철저하게 나빴으면 했다. 마음 놓고 원망해도 될 정도로 맑게 웃으며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못 견딜 정도로 잔인해도 좋으니까, 네가 울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시험이 코앞인데도 유우키는 책상 앞에 앉아 가만 펜만 돌렸다. 책상 위엔 잊고 놓고 간 참고서와 필통이 있었다. 참고서엔 온통 정답 뿐이었다. 실수로라도 아메나시가 오답을 내놓는 일은 없었다. 그럼, 그날 일도 정답이었을까. 시험 문제를 틀리는 일이 잦은 그로선 알 수 없었다.
듣기를, 아메나시는 일반 입시가 강한 사쿠라자와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학업에 집중하고 싶다며 입학과 함께 그곳의 기숙사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유우키는 도쿄 서부지구의 강호인 세이도 고등학교로 진학했으니 그 이후로도 특별히 만날 일은 없었다. 가끔 아메나시의 동생이 이쪽으로 넘어와 먹을 것을 나눌 때 정도나 그 소식을 간간히 알 수 있었다. 유우키는 물어서 좋을 것도 없는 걸 알면서도 아메나시 이사에게 누나에 대한 것을 물었다.
"…유이는 잘 지내?"
"누나, 입학한 뒤로 명절이 아니면 안 와서 잘 모르겠어요. 공부는 잘한다고 하던데 도쿄대, 정말로 가버릴지도 몰라요."
"아, 그래……. 저기, 이사."
네? 아메나시 이사는 떡이 가득 담긴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유우키를 돌아봤다. 어째서인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망설임 끝에 그에게 줄곧 마음에 담아둔 부탁을 전했다.
"곧 여름 예선인데…"
"아, 알아요! 형이랑 같이 응원갈게요. 형, 휴학해서 지금 집에 있으니까요."
"그… 유이에게도, 전해주면 안될까."
꼭 오라는 말은 안 해도 되니까 전해주기만 해 줘.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하지 못한 부탁을 기어이 입 밖으로 낸 것은 3학년이 되어서였다. 이제와서 구경하러 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봐줬으면 했다. 아메나시 이사는 시루떡을 우물거리며 눈치없이 굴었다. 직접 말하지, 왜요? 그 말에 댈 핑계는 없었다. 전화번호가 바뀐 것도 아니었고, 그 뒤로 사이가 안 좋아졌다는 걸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었다. 눈치없는 만큼 넉살도 좋은 아메나시 이사는 반 정도 남은 떡을 유우키의 입에 갖다대며 웃었다. 반대쪽 손에 든 휴대전화엔 이미 메일이 전송된 후였다. 누나, 곧 여름 예선인데 보러 갈래? 다행히 그가 전해달라고 했다는 말은 없었다.
"작년도 제작년도 핑계 대면서 안 왔던 거 같은데, 누나도 너무 박정하다니까요… 아, 답장 왔다."
답장은 빠르게 날아왔고, 유우키는 뻣뻣하게 굳어 입에 들어온 떡을 씹는 것도 잊고 휴대전화 화면을 훔쳐봤다.
싫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아메나시 이사가 뭐라고 마구 중얼거리며 답장을 우다다 보냈지만, 확실히 일반 입시로 대학에 진학하는 아메나시에게 지금은 중요한 시기였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앞둔 지금 여름 경기를 하나하나 다 보면서 버릴 시간은 없겠지. 이젠 볼일도 없는 사람의 경기를 구태여 챙겨 볼 이유도 없었다.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무엇을 기대했을까. 변덕을 부려 경기장에 오겠다는 연락은 오지 않았고, 예정대로 여름 예선이 지나가 세이도 고교는 아쉽게 결승에서 이나시로 실업에게 패배했다. 자동적으로 유우키는 고교야구에서 은퇴했고 메이대 진학을 결정했다. 그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잔뜩 벌어져서 욱씬거리는 상처를 두 사람에게 남긴 채로.
그 해의 도쿄대학교 대표 입학생은 아메나시 유이치였다. 사쿠라자와의 수석으로 도쿄 의료대학교에 신입생으로 입학한 아메나시는 강단에 서서 대표인사와 선서를 하고 내려갔다. 그것만을 위해 3년 간을 공부에 전념했으면서도 딱히 기쁘지 않았다. 전국에서 가장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만이 모이는 도쿄대학교에 진학한 것도, 아버지가 원하는대로 의료대학교에 진학한 것도, 신입생 대표가 되는 것도 딱히 기쁘지 않았다. 기쁜 일은 3년 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공부를 하다가 기숙사로 돌아가 잠에 들고 다시 일어나는 일만을 반복한 3년 동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게 이상했다. 그가 한때 사랑했던 이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 총명함을 잃고 불량아로 불리게 됐다는 듯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 사람이 그렇게 될까. 한때는 궁금해서 어떻게든 그를 찾아볼까 했지만, 그가 애인에게 큰 상처를 주고 사랑을 잃은 후에 그렇게 망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선 흥미가 끊겼다. 고작 사랑 때문에 인생을 망치다니. 그것도 자기가 멋대로 굴어서 상대방에게 상처준 탓으로? 바보같다며 말하는 그 입이 지은 웃음은 싸늘한 자조였다. 사랑 때문에……. 그와 아메나시는 닮은 꼴이었다. 사랑받는 기쁨을 비틀리게 이용했다는 점과, 그 후에 점점 사랑에 병들어 갔다는 점에서.
지독했던 외사랑은 깨졌고, 그 후로 아메나시는 그 일을 완전히 잊었다. 그가 어떻게 되었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한때는 그가 헤어지길 간절히 기도했지만 막상 그리 되고나니 딱히 기쁘지 않았다. 그건 더 이상 그가 이전의 그가 아니어서일까, 아니면 항상 올곧게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에게 준 상처 때문일까. 함부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바란 대가는 컸다. 그 아픔은 여름이 되면 더 지독해졌다. 여름 예선이라며 반에 한 둘 있는 야구부원이 간혹 글러브를 챙기고 밖으로 나갈 때면 더 그랬다. 그는 괜히 따라나가서 배트를 몇 번 휘둘러보기도 했다. 그래도 그 어떤 그라운드에 서도 이전만큼의 기쁨은 없었다. 왜일까. 그가 타자가 친 공을 받아서 던져도, 그곳에 있는 것은 유우키가 아니었다. 유우키가 공을 잡지 못해서 모처럼의 수비가 무너져도, 삼진으로 아웃되어서 출루한 자신의 뒤를 받쳐주지 못해도 그가 있는 그라운드는 즐거웠다. 홀로 서는 그라운드는 눈꼽만큼도 즐겁지 않았다. 결국 이름만 넣은 야구부엔 다시 가지 않게 되었다. 여름 예선 얘기가 들려올 때면 괜히 대진표를 찾아다가 보곤 했다. 한 번도 경기장엔 가지 않았으면서도. 경기가 있는 날 아침이면 평소보다도 일찍 일어나 부산스럽게 나갈 준비를 했다가, 그러다가도 다시 자리에 앉아 책을 폈다. 책을 읽다가도 일어나서 다시 나갈까 하다가도 결국은 문앞에서 멈췄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저녁이었고, 경기장은 닫을 시간이었다. 그럼 또 그 경기를 보러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워 남몰래 울었다.
그리고 매년 여름마다 그것을 반복하던 아메나시는 딱 한 번, 도쿄 서부지구 고시엔 예선 경기장에 갔었다. 3학년 마지막 여름, 이나시로 실업과의 결승전 때. 이미 경기가 시작했을 시간에 아메나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고 바깥으로 뛰쳐 나갔다. 버스 안에서도 혼자 안절부절 못한 채 휴대폰으로 시계만 보고, 버스가 멈춘 후엔 있는 힘껏 달려 경기장으로 뛰어갔다. 경기장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땐 이미 경기가 끝난 후였고, 유우키는 여기저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부원들을 다독이며 정렬하고 있었다. 그는 캡틴이 서는 자리에 서 있었다. 키가 훌쩍 커버린, 그때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아메나시는 박수갈채를 보내는 관중들 사이를 헤치고 조용히 돌아갔다. 그라운드 위에선 결코 울지 않는 그 대신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울지 않는 게 화가 났다. 어떤 상처를 줘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는 그 강함에. 스스로 입힌 자그만 상처에도 곧잘 울어버릴 정도로 점점 나약해지는 자신과 다르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의젓해진 그가 미웠다. 그리고 그런 그가 잠시지만 화를 낼 정도로 심한 상처를 준 자신이 싫었다. 미운 것과 싫은 것은 달라. 그것을 아메나시는 아주 잘 알았다.
그 여름 이후로 한번도 유우키를 잊은 적이 없었다. 드문드문 잊을 법하면 잠깐 생각났던 이전의 2년과는 달랐다. 그는 일어날 때도, 세안 할 때도, 아침을 먹을 때도, 등교할 때도, 수업을 받을 때도, 점심을 먹을 때도, 하교할 때도, 자습할 때도, 심지어 잠에 들 때 조차 생각났다. 모든 것이 이미 지나가버린 그날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같은 학교에 갔을까. 여전히 같은 시간에 같은 길로 등하교 했을까. 수업 시간엔 시시한 장난도 치고, 식사 시간엔 서로 도시락을 바꿔 먹기도 하고, 자습은 몰래 빠지고 야구공이나 던지고, 가끔은 같이 잠들기도 했을까.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이 들때면 자꾸만 입술을 깨물게 됐다. 그때 제 입술을 문 것은 유우키였다. 서로를 탐하는 것에 급급해 서툴고 어딘가 급하기만 한 키스였지만 그런 중에서도 확실하게, 어딘가 그만의 상냥함이 있었다. 가령, 아프진 않을 정도로 밑입술을 물었다든지, 간간히 입술을 떼 숨 쉴 틈을 준다든지, 따듯한 눈길을 보낸다든지. 된다면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 따스함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만약 그 여름으로 돌아간다면 상대를 놓칠까 꽉 끌어안는 건 유우키가 아니라 자신일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외로움은 더 짙어졌다. 날 봐줬으면 좋겠다. 안아줬으면 좋겠다. 키스해줬으면 좋겠다.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이름. 그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며 입맞추는 자신에게 그는 화가 나 있었다. 그 화에 겁 먹은 것이 자존심 상해 내뱉은 말은 갈고리처럼 돌아와 아메나시를 찔렀다. 싫어질 자신도 없이 날 좋아하진 말았어야지. 유우키는 다정했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그 다정함을 싫어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아메나시는 그를 미워했다.
입학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아메나시는 메이지 대학을 지나쳤다. 그가 어느 대학에 갔는지 정돈 아메나시도 알고 있었다. 누가 딱히 말해주진 않았기에 남동생을 협박해 알아냈었다. 그는 머뭇거리다 정문 안으로 들어가, 동아리 홍보가 한창인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야구부의 위치를 물었다. 연극부의 포스터를 내밀면서도 그는 그라운드 위치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아메나시는 혹시나 유우키가 자신을 발견할까 주변을 노려보며 그라운드로 향했다. 유우키는 이미 그 안에서 1루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세이도의 유니폼을 벗고, 메이대 유니폼을 입은 채로. 아메나시는 한참을 거기 가만히 서 있었다. 선수가 많았지만 시선은 유우키만을 향해 있었다. 이젠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해 애가 닳았다. 그때 부른 이름이 너였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까. 억지로 눈물을 참는 것이 괴로워 아메나시는 결국 혼자 그라운드 구석에서 훌쩍거렸다. 그래도 이제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제 옷 소매로 눈물을 닦아주거나, 어깨를 도담거리며 달래 줄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그를 더욱이 처연하게 만들었다.
눈물이 멎을 쯤엔 비가 왔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에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부스를 접고 실내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학생이 아니어서 들어갈 곳이 없던 아메나시는 결국 가만히 비를 맞고 서 있었다. 돌아가면 좋았을텐데, 왜인지 그를 만나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욕망은 아주 충동적이고 이기적이었다. 그래도 너라면 만나줄거야. 설령 못난 말을 되돌려주고 나를 상처입히기 위해서라도, 모른 척 하진 않을거라고. 바보같이 가만 비를 맞고 서 있던 것도 그래서였다. 내가 비를 맞고 서 있으면 분명 넌 그냥 가지 못할 거라고. 넌 그런 사람이니까. 아메나시는 남을 사랑하는 방법은 몰랐으면서 사랑받는 방법은 약았을 정도로 잘 알았다. 그라운드 위의 선수들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급히 장비들을 챙기고 우천 연습장으로 뛰어들어갔다. 장마철의 빗줄기는 아플 정도로 거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달라붙은 옷이 기분 나빴다. 아메나시는 그라운드 위에 사람이 없어진 후, 우천 연습장 입구에 서서 기다렸다. 누군가 밖으로 나올 때까지. 과연, 놓고 온 장비를 다시 가지러 누군가 나오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헉, 뭐야. 누구세요?"
"아… 유우키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웬 유우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름을 부르지 않은지도 꽤 오래 되었다. 입 밖으로 내는 것은 훨씬 오랜만이었다. 어느 쪽이든 어색했고, 괜히 이름으로 불렀다간 나중에 그가 곤란해질지도 몰랐다. 특히나 남자만 있는 이런 야구부에선. 그는 곁에 있는 사람과 수근거렸다. 그 녀석, 여자친구 있었나? 들리지 않아도 할 법한 말은 뻔했다.
"불러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기다릴테니까."
"비 엄청 쏟아지는데요?! 어차피 거의 연습도 끝난 참이니까 불러다 드릴게요."
유우키가 온 것은 두 사람이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아메나시의 예상대로,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반대쪽 손엔 큰 수건을 든 채 급하게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 끝에 걸린 것은 온통 비에 젖은 채 멀리 그라운드를 보고 있는 아메나시였다. 4년 만인데도 그는 단번에 아메나시를 알아봤다. 그야, 모를 순 없었다. 그 4년 간 단 한 번이라도 그를 잊는 것에 성공해본 일이 없었으니까. 그는 아메나시의 손에 우산을 쥐여주고 얼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오랜만의 재회에 그는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언젠가 만나면 반드시 하겠다고 다짐했던 사과보다도 먼저 튀어나온 것은 걱정이었다.
"비 오는데 왜 여기 서 있어. 그보다 여긴 왜… 아니, 기다릴거면 안에서 기다려."
"괜찮아.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밖에서 기다릴게."
"…그럼 빨리 끝내고 올테니까 우산 쓰고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점퍼를 벗어 덮어주는 상냥함이 아팠다. 차라리 다신 얼씬 거리지 말라며 겁주면 그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는 비를 맞으며 돌아가더니 정말로 금방, 자리를 정리하고 온 듯 어깨에 스포츠백을 매고 밖으로 나왔다. 아마 팀원의 양해를 구했으리라. 뒤늦게 엄습하는 추위에 아메나시는 몸을 떨고 있었다. 미리 연락했으면, 언제라도 만나러 갔을텐데.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여기에 서 있기까지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함께 쓰는 우산은 좁았지만 행복했고 그는 젖은 몸 때문인지 자꾸만 그에게서 떨어지는 아메나시를 붙잡아 가까이 붙었다.
"어깨 젖잖아."
아메나시는 그가 한참 우산을 제쪽으로 기울여 들고 걷는 걸 알았다. 마음이 저리면서도 기뻐서 아메나시는 그에게 가만 붙어 걸었다. 그가 입고 있었던 점퍼는 따듯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유우키의 집까지 온 아메나시는 그의 배려를 얻어 욕실에 들어갔다. 젖은 옷은 건조기에 넣었고, 오랜만에 그의 옷을 빌렸다. 어릴적과 다르게 옷이 제법 컸지만 이제 그의 집에 어쩌다 잊고 놓고 간 아메나시의 옷 같은 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메나시가 씻는 동안 유우키는 커피포트에 물을 담고 찬장에서 티백을 넣어둔 상자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꺼냈다. 차는 어릴 때부터 다도를 해온 아메나시에게 배운 것이었다. 상자 속에 있는 것들은 전부 아메나시가 특별히 좋아하는 차였다. 차가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면서, 누군가 좋아하는 차가 있느냐고 물으면 무턱대고 그가 좋아하는 차 이름을 외우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졸라 집에 기어이 티백을 한가득 들이곤 아메나시가 놀러올 적이면 직접 차를 내어주곤 했다. 전문적으로 다도를 배운 어머니에게 직접 다도 예법을 익힌 아메나시에게 넘칠 듯 담은 물에 티백으로 우린 차는 밍밍하기만 했지만 그래도 아메나시는 웃으면서 끝까지 마시곤 했다. 그것이 유우키가 스무 살이 되도록 잊지 못한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씻고 나온 아메나시에게 유우키는 직접 끓인 차를 내주었다. 가장 좋아하는 히비스커스 티백에 딱 맞는 물의 양과 온도, 귀여운 토끼가 그려진 하늘색 컵. 그의 것은 밝은 노란색 컵에 담은 캐모마일 차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는 입에 맞냐든지, 왜 기다렸냐든지, 비는 왜 가만 맞고 있었냐든지, 잘 지냈냐든지, 왜 경기를 보러 오지 않았냐든지, 그 날은 미안했다든지, 아직도 널 좋아한다든지 하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아메나시는 그게 퍽 고마웠다. 4년 전만 해도 그가 끓인 차는 그다지 맛이 없었는데, 그 사이에도 계속 차를 마셨는지 제법 맛이 괜찮아졌다. 고마워, 차 맛있다. 아직도 차 좋아해? 혼자 살면서 이런 컵은 왜 갖고 있는거야. 사실 딱히 할 말이 있어서 널 기다린 건 아냐. 비는 어쩔 수 없이 맞은 거야. 잘 지냈을 리가 없잖아. 경기 보러 갔었어. 그 날은… 미안해. 사실, 정말로 그냥 하는 말이지만, 어쩌면 널 좋아하고 있을지도 몰라. 아메나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가 고마우면서도 또 왠지 미웠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거야? 너 나한테 할 말 많잖아. 사실은 내가 싫다고, 그 날 이후로 날 미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 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말하는 대신, 아메나시는 찻잔을 놓고 슬쩍 유우키의 옆으로 갔다. 그때처럼 은근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멀어지진 않는지, 자길 밀어내진 않는지. 그는 그 날처럼 가까이 붙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았다. 그때처럼 대담하게 유우키를 끌어안는 그런 용기는 스무 살의 아메나시에겐 없었다. 대신 열 여섯 살의 아메나시보다도 훨씬 지독한 외로움이 있었다. 그는 외로웠다. 더 이상 무엇도 볼 수 없게 되어서.
"저기."
아메나시는 조용히 유우키를 불렀다. 그는 곧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이어지는 질문은 어딘가 병들어 있었다. 천천히 아물어가는 유우키에 비해 아메나시의 상처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이 깊게 패이고 썩어 곪아들어갔다. 그것이 아픈지 목소리가 막 씻고 나온 머리카락보다도 푹 젖어있었다.
"아, 직도 나 좋아해?"
"……."
침묵에 불안은 곧 경사로 아래로 굴린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아메나시는 잔뜩 움츠린 채로 꼼질거리며 바닥을 짚은 유우키의 손을 잡았다. 그가 자길 뿌리칠까 두려워 손을 다 잡지도 못하고 손가락을 조금 잡았을 뿐이었다. 기울어 받쳐 준 우산과 젖은 어깨, 덮어준 점퍼, 맛이 좋아진 히비스커스, 좋아하는 색의 귀여운 컵. 그 모든 것에 조금씩 드러나있는 그의 다정함을 아메나시는 놓치지 않았다. 사실은 거짓이어도 좋으니까 사랑한다고 해 줘. 유우키는 제 손가락을 힘없이 잡은 그 손을 잡지도,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아메나시는 마침내 그 손을 힘주어 잡을 정도의 용기를 냈다. 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웠던 상처투성이의 스무 살 아메나시는 기어코 또 다시 사랑을 갈구했다.
"나, 너랑 키스하고 싶어. 그동안 줄곧 그런 생각을 했어."
그를 올려다보는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둑 둑 떨어졌다.
"이제 그런 말 안할게. 딱히 다른 사람 생각하지도 않을거야. 그러니까… 한 번만. 응?"
어느새 아메나시는 유우키에게 바짝 가까이 붙어 있었다. 아메나시는 한 손으론 유우키의 손을 꼭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론 그의 뺨을 쓸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자꾸만 쏟아져 그 손 위로 떨어졌다. 왜 우는거야. 그는 몇 번이고 상상했다. 눈이 벌겋게 부은 채 울면서 빗속을 걸어가는 아메나시를. 그럴 때마다 왜인지 모를 죄책감이 그를 질타했다. 아메나시가 아무리 그를 괴롭게 할지라도 울지 말았으면 했다.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불행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네가 원하는대로 해주면, 넌 울지 않게 될까. 그는 결국 마음이 무너져 처음으로 아메나시에게 먼저 입 맞췄다. 지나간 시간 만큼이나 어른이 된 그는 이전처럼 그저 말로 하기 벅찬 사랑을 전하는 것에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반대쪽 팔로 그 날처럼 아메나시를 끌어 안았다. 그것은 전처럼 다신 보이지 않을 환상을 다급하게 붙잡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에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줄곧 여기서 널 기다렸다고 말하는 것에 가까웠다. 유우키는 몇 번이고 아메나시에게 키스했다. 진득하게 혀를 얽으면서도 서툰 그가 벅찰까 싶어 잠시 틈을 두어 떨어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잠깐의 사이가 아쉬워 아메나시는 잡은 손을 놓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눈에선 서글픈 눈물이 자꾸만 떨어졌다. 그 꿈은 오래 이어지는 듯 했다.
"테츠……."
이렇게까지 가까이에 있지 않았다면 분명 못 들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 작은 목소리로 아메나시는 이름을 불렀다. 유우키의 이름을. 그때 유우키는 이것이 환상보다도 더 거짓같은 현실임을 알았다. 그 부름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가 기분이 좋을 때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유우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참이고 서로의 숨을 주고 받았다. 몇 년 동안이고 쌓아온 온전한 사랑을 쏟아주던 유우키는 한참 후에 아메나시에게 대답했다.
"…응."
그것은 대답하지 않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아직도, 너를 좋아한다고. 그는 병든 사랑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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