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SICK GIRL (上)
DREAMING/ACE OF DIAMOND2021. 2. 11. 04:23
사랑이 끝나더라도 시간만큼은 아랑곳 않고 데굴데굴 굴러갔다. 우울에 짓눌리더라도, 슬픔에 눈물이 나오더라도 아침에 해가 뜨면 그 하루를 살아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른 척 다시 잠드는 것도 할 수 없고,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들은 서로 아침 신문을 꺼낼 때 담장 너머로 인사를 나눌 것이다. 서로 운이 나쁘면 같은 시간에 집 밖에 나서다 마주칠지도 몰랐다. 그것이 이전까진 퍽 기꺼웠다가도 이제서는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랄 수 밖에 없었다. 유우키는 속으로 만나지 않길 기도하며 스포츠백을 들고 아침 일찍 나섰다. 다행히 아메나시는 아직 휴일을 잠으로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담 너머에서 반갑게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드는 아메나시 이사에게 본 듯 만 듯 애매한 인사를 건네곤 유우키는 서둘러 집을 떠났다.
아메나시가 당분간 고등학교 수험 준비로 야구부를 쉰다고 한 이후였기에 야구장에서 유우키는 마음놓고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실컷 우울해하고, 실컷 슬퍼하며 생각없이 날아오는 공들을 쳤다. 이전의 집중력이 조금 흐려졌지만 자율 연습이었으니 아무래도 괜찮았다. 공이라도 쳐서 멀리 날리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잡 생각이 몰려와 평소처럼 호쾌하게 공이 날아가지 않았다. 치면 칠수록 답답해지는 기분에 유우키는 결국 한 시간도 안 되어 배트를 놓고 야구장 구석에 앉아 쉬었다.
딱히 후회가 되는 건 아니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되리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아메나시는 감정을 숨기는데 서툴렀기에, 그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모를 수 없었다. 그는 '친한 친구'인 유우키에게 몇 번이고 그 일을 상담했으니까. 아메나시와 수석 자리를 두고 항상 다투는 옆 반의 그 녀석. 안경을 쓴 것이 좋을까 싶어 괜히 알 없는 안경을 쓰기도 했다. 난데없이 잠시 야구를 쉬겠다며 공부를 시작한 적도 있었다. 머리를 기를까 생각했던 적도.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전부 그만둔 것은 그 말 때문이었다.
그냥, 걔니까 좋은걸!
그 말은 유우키의 감정에 멋대로 종지부를 찍으려 들었다. 그때 남몰래 접었다면 이렇게 될 일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대로 없던 일로 하고 싶지 않았어. 돌아가는 길에 아무렇지 않게 건넸던 말은 사실은 이제까지 나눈 어떤 말보다도 괴로운 말이었다. 맥락없이, 두서없이 튀어나온 그 말은 어딘가 미숙했기에 더욱이 진심처럼 느껴졌다. 아메나시는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해서 안 돼. 그 말은 억지로 모른 척 했던 마침표를 다시금 그에게 들이밀며 그 서툰 사랑을 확인사살하려 들었다.
돌아오는 길은 무겁기만 했다. 우울을 끄집어낸 듯 흐린 하늘에선 기어코 비까지 쏟아졌다. 유우키는 뛸 생각도 하지 않고 축축 쳐지는 발걸음을 억지로 끌어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거실에 불이 꺼져 있었기에, 그는 집이 비어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랬기에 문을 열자마자 수건을 들고 반겨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평소보다 배로 놀라웠다. 그것이 남동생도, 부모님도 아닌 아메나시라는 점이 더더욱 그랬다.
"비 맞으면서 왔어?"
"…유이."
그는 눈으로 여긴 왜 왔냐고 물었다. 내가 여기 오는데 이유가 필요해? 대답은 그렇게 들려온 듯 했다. 유우키는 신발에서 대충 발만 꺼내고, 현관 매트에 물기를 털어낸 후에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신발 제대로 놔야지! 하는 말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왜 온거야. 차라리, 자긴 없는 것처럼 여기고 이젠 좋다는 그 사람이랑 잘 지내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집까지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항상 뭐든 똑같이 했던 소꿉친구 답게 두 사람은 똑같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이뤄지지 못할 게 확실한 그런 사랑을.
씻고 나오니 아메나시는 마치 제 방인 것 마냥 침대 위에 누워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자기 책상 위에 책까지 펼쳐놓고. 공부하면서 기다린건가? 과연, 기말시험이 얼마 안 남은 시점이었고 펼쳐진 부분도 시험범위 내용이었다. 아메나시는 누운 채 페이지를 넘기다가 목에 수건을 걸치고 젖은 머리를 털며 들어오는 유우키를 슬쩍 바라봤다. 그는 다른 곳을 보며 아메나시를 등지고 바닥에 앉았다. 왜 그렇게 쌀쌀맞게 대해, 테츠. 유우키는 뒤에서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척 했다. 몸이 떨리는 이유는 쏟아지는 폭우를 맞고 돌아온 탓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아메나시는 저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테츠를 뚱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무시 당하니 기분이 나빴다. 그렇게 못 들은 척 하는 건 무슨 경우야? 이사시키의 취향을 담은 만화책은 어디엔가 던져놓고 아메나시는 침대 아래로 꾸물꾸물 내려갔다. 그는 바닥으로 내려가서 유우키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등진채로, 하지만 그렇다고 방에서 나가진 않은 채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아메나시는 은근한 손길로 유우키의 허리에 손을 얹더니, 그대로 천천히 그를 끌어안았다. 등에 꼭 붙어 뺨을 부비자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툭 떨어졌다. 그렇게 가까이 붙어있으니 그가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떨림에 아메나시는 설핏 웃었다. 그 웃음은 곧 불 탄 잿더미를 입으로 불어 날린 것처럼 부서지며 사라졌다. 예쁘게 웃던 그 표정은 어느덧 못나게 어그러져 어딘가 다른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외로웠다.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어서.
"저기."
아메나시는 조용히 유우키를 불렀다. 떨리는 목소리였어도,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왜."
이어진 질문은 잔인했다.
"아직도 나 좋아해?"
"응."
대답 역시 저릿했다. 망설임없이 나온 대답에 아메나시는 잠시 말을 멈췄다. 허리를 꼭 끌어안던 손길이 점점 위로 올라가더니, 유우키의 뺨을 부드럽게 만졌다. 얄궂은 장난을 치고 싶었다. 날 사랑해주지 않는 그 사람을 향해야 했을 미운 감정이 유우키를 향했다. 넌 날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해도…
날 사랑해줄거지?
그 손은 그렇게 묻는 듯 했다. 유우키는 그 손을 잡지도, 그렇다고 막지도 않았다. 등에서 느껴지는 거짓된 따스함이 밉다가도 기뻤다. 차라리, 거짓이어도 좋으니 사랑한다고 해 줘. 차마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뺨을 쓸던 손가락은 어느덧 아무 말 없는 입술로 향했다. 다음에 나온 말은 영락없는 도발이었다.
"그럼 나랑 키스하고 싶다든가 하는 생각도 했겠네?"
"……뭐가 말하고 싶은거야."
아메나시는 그때 손을 거두고 유우키에게서 떨어졌다. 따스함이 떨어진 자리에 남는 것은 쓸쓸함 뿐이었다. 이대로 떨어지는가 싶었더니, 아메나시는 자신을 등진 유우키의 앞으로 가 앉은 그의 다리 위에 올라탔다.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대더니, 짓궂게 물었다.
"해볼래?"
키스.
먼저 입술을 맞댄 것은 아메나시였다. 그는 유우키가 혼란스러워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에 바닥을 어색하게 떠도는 손을 겹쳐 잡곤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입술이 떨어지기도 전에 상대방을 먼저 붙잡은 것은 유우키였다. 그는 간신히 스스로 그어놓은 선을 훌쩍 넘곤, 아메나시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 처음으로 탐욕스럽게 그를 욕망했다. 입술을 부비고, 혀를 섞거나, 때론 조금은 아플 정도로 입술을 깨물기도 하며 서로의 숨을 주고 받았다. 머리가 어질한 것이 도쿄의 여름 더위 때문인지 하면 안될 것 같은 사랑을 나누는 배덕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라도 이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 유우키는 팔로 아메나시를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그리고 꿈에서 깬 것은 아메나시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
이렇게까지 가까이에 있지 않았다면 분명 못 들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 작은 목소리로 아메나시는 이름을 불렀다. 유우키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그때 유우키는 이 모든 것이 거짓임을 알았다. 알았지만 모른 척 했던 것이었다. 그 이름은 그를 꿈에서 현실로 끌어냈다. 그리고 직후에 이어진 행동은 그도 스스로가 그럴 줄 몰랐던 것이었다. 한번도 아메나시에게 있어, 그에게 뿐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도 폭력적으로 행동한 적이 없었던 그 유우키 테츠야가 했으리라곤 아무도 몰랐을 그런 행동이었다. 유우키는 아메나시를 끌어안고 있던 팔로 그를 거세게 밀어 바닥에 쓰러트렸다. 바닥에 등이 부딪힌 충격에 아메나시는 작게 신음했다. 당혹감과 두려움으로 눈이 떨렸다. 유우키는 바닥에 쓰러진 아메나시 위에 반대로 올라타 그를 내려다봤다. 그 표정은 애정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고, 혐오도 아니었다. 그게 전부 섞이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부들 떨다 그냥 다시 일어나 앉았다. 화가 나서 아메나시와 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밀어도 억누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스스로를 잘 제어하는 사람이었다. 상처를 심하게 받으면 받을수록 아메나시에겐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그가 아메나시 유이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하려면 하지 그래."
아메나시는 밉살스럽게 쏘아붙이며 비죽 웃었다. 유우키는 다시 그를 등지고 앉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나 너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심하게 상처주면서까지 사랑을 하고 싶은 건 아니야."
"네가 날 한 대 때렸든, 내 몸을 멋대로 만졌든 너한테 상처받는 일은 없어.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
그는 안지 않아도 알 정도로 심하게 떨고 있었다. 아메나시는 다 들리게 그를 비웃었다.
"싫어하게 될 자신도 없이 날 좋아하진 말았어야지."
그 말은 창살처럼 아프게 꽂혔다.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바깥은 여전히 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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