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

BELOVED/METROPOLIS2021. 1. 22. 21:31

   그것은 아주 오랜 재회였다. 두 사람은 메트로폴리스에서 헤어진 후 서신 한 번 주고받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변했음에도 그들은 확실히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잊을 수 있을리가. 서로를 마치 집어삼킬 것처럼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하려는 그 짐승들은 마치 천적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머릿속에 상대방을 강렬하게 새겼다. 그것은 본능에 가까웠다. 살기 위해 사고를 거쳐가기도 전에 그 눈에 분명하게 박아넣는 것과도 같았다. 포식자는 기억한다. 제 앞에 바들바들 떨며 나약하게 주저앉은 찬란하게 빛나는 녹빛 눈을. 피식자는 기억한다. 제 앞에 위협적으로 군림하는 타오르듯 빛나는 금빛 눈을.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변했음에도 그들은 확연하게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서로를 마치 집어삼킬 것처럼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떠올리려는 그 짐승들은 마치 천적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머릿속에 상대방을 강렬하게 불러온다. 그것은 이성에 가까웠다. 죽기 위해 본능보다도 먼저 그 몸에 분명하게 박아넣는 것과도 같았다. 포식자는 피식자의 이름을 부른다. 길게 자라 곱게 땋아 내린 흑빛 머리칼, 새하얀 동방의 전통복과 오른쪽 귀에서 반짝이는 금빛 귀걸이, …그리고 빛 아래 차분히 가라앉은 녹빛 눈. 피식자는 포식자의 이름을 부른다. 헐게 묶은 흑빛 머리칼, 검붉은 검은 정장과 금이 간 바이올린, …그리고 그림자 위 눈을 부릅뜨고 상대방을 노려보는 금빛 눈.

 

   "루다노 씨."

   "코하쿠."

 

   그것은 아주 찰나였고 제 이름이 불린 순간 코하쿠는 팔을 겹쳐 넓다란 소매에 감춘 왼손을 꺼내 앞으로 내질렀다. 그것은 어떤 신호였고, 암호였고, 암구호였고, …그리고 어떤 언어였다. 그가 서 있는 자리로 내리는 눈부신 햇빛 아래 짙은 그림자가 진다. 발밑에서부터 점점 커지는 그림자는 일그러진 삼각형의 형태였다가, 사각형의 형태였다가, 일그러진 원의 형태로 형체를 달리한다. 거대해진 암흑에서 하나 둘 일사분란하게 빠져나오는 수 십, 수 백 마리의 뱀은 곧장 주인의 손 끝을 따라 아주 빠른 속도로 바닥을 기어 먹잇감의 발을 붙잡고, 다리를 타고, 허리를 지나 가슴을 감싸고 머리로 올라간다. 끊어버릴듯 팔다리를 속박하고, 숨통을 끊을듯 목을 거세게 조르고, 터뜨릴듯 심장을 겨눈다.

 

   "안녕."

 

   그는 인사한다. 바람이 지나며 길게 내린 땋은 머리가 양쪽으로 흔들거렸다. 넉넉한 품의 옷이 사방으로 휘날린다. 그럼에도 그 눈은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게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이름이 불린 순간 루다노는 금이 간 바이올린을 들어 활을 긁었다. 소리가 나기도 전에 그는 알아챈다. 상대방이 수행하고 있는 복잡한 형태의 의사소통을. 그 의미는 알지 못할 지언정 그는 그것이 그들만의 지독히 개인적인 대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하고, 신기하고, 신비하며, 괴상하고 비겁하며 수수께끼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제 발 밑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하는 수 십, 수 백마리의 검은 뱀을 내려다 봤다. 그 뱀들은 자신의 구두를 타고, 정장 바짓단을 올라 자켓을 지나고 목전으로 다가와 자신을 감쌌다.

 

   "…오랜만이군."

 

   그는 인사한다. 그는 그림자 아래에서 검은 뱀에게 싸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 눈은 칠흑같은 검정 속에서도 확실하게 제 존재를 알리듯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무슨 인사법이지? 하율을 따라 조선으로 간다더니, 거기선 이렇게 인사를 하나보군."

   "조선에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데……."

   "안녕… 뭐라고?"

   "……."

 

   조선의 말은 서양인으로선 따라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는 서툴게 그 나라의 인사법을 따라하다 그만뒀다. 뱀이 제 목숨을 끊기 일보직전인 지금에도 그는 어쩐지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몇 년 전 첫 만남에서 제게 눈도 못 맞추고, 말도 똑바로 하지 못하던 그 약한 검은 뱀이 어느새 제 숨통을 직접 조를 수 있게 될 줄이야. 그는 녹슨 독니를 가진 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아주 날카롭고 매서운 치명적인 독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저 모르고 있었던 뱀이었을 뿐. 그는 그 사실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변하지 않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코하쿠는 제 숨통을 직접 끊기에는 여전히 다정하고 상냥하며, 여리고 연약한 훌륭한 의사라는 진실을. 그 사실이 그를 웃게 했다. 이 웃음은 그가 죽지 않거든, 그 이름을 떠올릴 적마다 지을 법한 웃음이었다. 쓰지 못하는 독니가… 과연 독이 든 이빨인가? 그는 그 물음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 들리는 힘빠진 비웃음을 한 번 흘리곤 말했다.

 

   "…코하쿠. 이게 무슨 짓이지? 주치의가 되어주겠다던 네가 날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구는군. 이게 네가 말한 의사로서 나를 죽이는 방법인가?"

   "……."

   "죽일 수 있으면 죽여도 좋아."

   "……."

   "하지만 괜찮겠나? 생명이다. 보아하니 네가 여기 누굴 죽이러 온 것은 아니고, 누굴 살리러 온 것 같은데… 누군가를 살리려는 사명을 가지고 온 의사가, 아니. 그보다 좀 더 본질적으로."

 

   너같이 다정하고 약한 의사가 사람을 죽일 수 있을리가 없지. 

 

   그것은 공격이었고, 협박이었으며 농간이었고 상대방을 향한 모욕과 도전이었다. 그는 코하쿠가 제 앞에서 무너졌던 그 날을 여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손 쓰지도 못하고 와르르 무너져 내린 그 모습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더럽고 치졸하며 혐오스러운 감정이었을지 몰랐다. 누군가를 무너뜨려 제 앞에 무릎 꿇리는 그 일이 주는 기묘한 만족감과 이상한 떨림, …지독한 쾌감을, 그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그것은 제가 모든 일생을 바쳐 염원하는 소망을 직접 눈 앞에 실현시킨 것과도 같았다. 상대방의 눈물과 슬픔이, 비명과 고통이, 절망과 비탄이 주는 치명적인 충족감을 그는 확실하게 그 손끝에 기억했다.

 

   코하쿠는 가만히 선 채로 저를 노려보는 루다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은 이제 더이상 타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요동치는 일 없이 평온했다. 그 말은 확실한 저에 대한 칼날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온전히 받아냈다. 심장에 박혀 피가 나더라도 그는 이제 도망치지 않았다. 괜찮아. 난 조금도 두렵지 않으니까.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아. 아직… 당신을 죽일만큼 난 모질지 않아."

   "…그래. 역시 넌 그때와 조금도…"

   "하지만 당신을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나의 선택이고."

 

   그 다음 말은 확실하게 그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다.

 

   나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있어.

 

   그 말에 옅은 미소와 낮은 웃음은 걷혔다. 제 앞에 무너져 스스로 엎드린 약한 피식자는 죽지 않고 바닥을 구르고 또 기어가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제 발목을 붙잡고, 땅바닥에서 자신을 꿰뚫을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느리지만 분명하게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 자신을 한 번 죽인 포식자의 숨통을 제 손으로 쥐고 힘주어 조르고 있었다.

 

   "나를 공격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만이 살아가는 방식은 아니잖아."

 

   알 수 없는 불쾌함이 일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방식이었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부정하는 그에게 미칠듯한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내가 틀렸다는건가? 그렇게 나약하고 느슨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네가… 내 삶을 부정할 순 없어. 그는 그것이 옳은 정답임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화가 치밀었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그는 그것을 수십 년 간 외면하고 회피하면서 뜬구름처럼 떠다니는 단 하나의 염원만을 좇아 살았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하니까. 그는 이를 부득 갈며 오른팔을 거세게 흔들어 제 팔에 붙은 뱀을 떨쳐내고 거칠게 현을 그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나자 마치 바이올린의 파동을 눈으로 보여주듯, 수 백 마리의 검은 뱀들은 그의 몸에서 떨어져 사방으로 튀어 파삭 부서졌다.

 

   "…코하쿠. 그래서 어떻다는거지? 여기는 전장이다. 참전하면서도 사람을 죽일 각오 없이 그저 적군을 살려 보내는 넌 여전히 나약해 빠진 의사일 뿐이야."

 

   그는 자유로워진 몸을 움직이며 바이올린을 켰다. 너는 뱀의 언어를 알지. 그것은 그만의 언어였다. 코하쿠로서는 가늠하지 못하는, 마치 그가 그렇듯이. 그는 끌어모은 소리를 강한 파동으로 응축해 터뜨렸다. 제가 켜는 바이올린의 의미를 알면서도 저를 담담하게, 그리고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저 눈이 미치도록 신경질이 났다. 그것은 어떤 분노고, 암울한 우울이고, …알 수 없는 공포였다. 코하쿠는 저를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폭발을 온몸으로 느끼며 날아갔다. 그는 서 있는 지면에서 붕 떠 허공에서 한 바퀴 돌고 터널의 벽에 부딪혀 튕기듯 바닥에 엎어졌다. 날아가던 도중 검은 뱀 네 마리가 일제히 뛰어내려 벽을 기어 바닥으로 내려가 주인이 땅에 쓰러지자 곧바로 그 옷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저것이 진짜고, 아까 건 가짜였군. 그는 걸리적거리는 머리를 대충 손으로 걷어내며 바닥에 쓰러진 코하쿠를 향해 다가갔다. 바닥에 엎어진 채 콜록이며 피를 뱉어내며 제 발목을 콱 붙잡는 그 모습이 과거에 제가 꿇어 앉힌 그 모습과 겹쳤다. 그래, 그것이 내가 아는 너야. 

 

   마치 죽은 듯 뱀의 수족으로 살아가는, 마치 살아있는 시체와 같은 너. 

 

   그는 그 모습에서 아찔한 짜릿함을 느꼈다. …아니, 아니다. 그때 저를 덮쳤던 지독한 쾌감과는 달랐다. 뭐지? 이 불쾌하고, 애매하고 찝찝한 이 기분은. 그것은 제가 모든 일생을 바쳐 염원했던 소망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았다. 상대방의 의지가, 용기가, 흔들림 없는 강인함이 주는 구역질나는 끔찍함이 무엇인지, 그는 확실하게 그 발끝에 기억했다.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루다노 씨. 혹시 내가 정답을 맞췄어?"

 

   이것은…….

 

   "괜찮아… 난 조금도 두렵지 않아. 이것이 내 선택이 짊어진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시리게 빛나는 생(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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