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로네(Amarone)

BELOVED/METROPOLIS2021. 1. 22. 21:29

   기념할만한 일이었기에 아스틴은 바에 걸어둔 달력에 남몰래 오늘을 표시해두었다. 특별할 것은 없고 단지 빨간색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치고, 서툰 그림솜씨로 바이올린을 검은색 볼펜으로 그려둔 정도였다. 남이야 왜 휴가 날짜에 바이올린을 그리냐고 묻지만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그날은 드물게 휴가를 낸 날일 뿐이고, 달력에 그린 바이올린엔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니까. 아스틴은 오늘 하루, 바텐더의 의복을 벗고 자주 입지 않는 잘 빠진 검은 정장을 입었다. 잘 다린 하얀 와이셔츠, 선이 들어간 깔끔한 정장바지. 와이셔츠 위에, 스턱 타이는… 너무 평소 같으니까. 로프 타이? 로프 타이는 너무 가벼워 보일 것 같고… 그래, 평범하게 포인핸드 타이로. 깔끔한 회색 바탕에 너무 튀지 않고 조잡하지 않게 검은색 체크무늬가 들어간 것이 좋겠어. 넥타이만 정해진다면 매는 것은 손 쉬운 일이었으니, 그는 익숙한 손길로 넥타이를 맸다. 넥타이를 겹쳐두고, 아래로 들어간 쪽을 두 번 돌려 매고 중앙으로 난 틈으로 집어넣어 빼 당겨서 완성. 넥타이 핀은 역시 은색으로. 그 위에 베스트, 그리고 딱 맞는 검은 자켓까지. 안경은 평소와 다르게 은색 메탈로. 그는 거울 앞에 앉아 옷을 입기 전에 잘 말린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묶어야 좋을까. 일하러 가는 것은 아니지만 식사를 하러 가는 길이니, 풀어 헤쳐두면 식사에 방해가 되겠지. 그는 몇 번 손으로 머리를 묶어 올리고, 내리다 연분홍빛 머리칼이 잘 보이도록 바깥으로 꺼내어 하나로 헐게 묶고 왼쪽 어깨 아래로 늘어뜨렸다. 씻느라 잠깐 빼두었던 은색 반지도 잊지 않고 왼손 약지에 끼웠다. 뭐가 남았지? 아. 그는 일어서며 공중에 검은 향수를 뿌리고 그곳을 스치듯 지나갔다. 몸에 직접 뿌리는 향수는 불쾌할 뿐이니. 블랙페퍼의 쏘는 향기가 코 끝을 스쳤다 곧 사라졌다. 도착할 때 즈음엔 라벤더 향이 나겠지. 마지막으로 구두를 고르는 것도 일이었으나, 역시 오늘 같은 날은 잘 닦아 둔 검은 구두가 좋을 것이다. 그는 신발장에 잘 보관해 둔 새 구두를 꺼내어 신었다. 길들이지 않은 신발은 제법 불편할 수도 있으니 그는 집을 떠나기 전 잠깐 집 주변을 배회하며 새 구두를 발에 붙였다. 좋아. 이제 약속한 장소에 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문을 닫고, 느긋하게 길을 따라 내려갔다.

 

   용의주도하고 꼼꼼한 그는 미리 예약하는 것을 잊지 않았기에 기다릴 필요도 없었고, 음식을 따로 주문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긴 시간 속에서 이미 상대방이 무엇을 시킬지 알고 있었고, 어떻게 준비해야 만족스러워할지 알고 있었다. 뒤엉켜 풀기 힘든 기억이 불쑥 올라와 밤의 사막을 방황하는 이들의 오랜 새벽 별인 그에게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는 통유리로 되어 밤이 내린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창가의 2인석을 예약했다. 고목나무의 색을 닮은 진한 갈색 가죽 소파는 안락하고 편안했고, 필요한 식기와 유리잔, 냅킨 역시 깔끔하고 단정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은은하게 내린 조명 역시 너무 밝아 눈부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상대에게 그림자가 질 만큼 어둡지도 않아 만족스러웠다. 그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아 상대방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없이 기꺼운 기색이었다. 두 사람이 앉자 음식은 기다릴 필요 없이 제 순서를 맞춰 테이블에 오르기 시작했다. 에피타이저는 패스트리를 곁들인 클램 차우더 스프에, 샐러드는 구운 까망베르 샐러드, 그 위에 얹은 토마토 올리브 드레싱, 과일 셔벳까지. 메인은 미디움 레어로 익힌 안심 스테이크로, 디저트는 계절과일. 와인은… 역시 레드와인이 낫겠지. 그는 예약할 때 특별히 부탁하여 이탈리아의 와인을 주문했다. 와인은 전채 요리를 무른 후 메인으로 준비한 스테이크가 나올 때 함께 나왔다. 아마로네(Amarone)라, 확실히 발폴리첼라 와인의 일종이었던가. 그는 주방장의 선택에 만족하고 베이스와 붙어 있는 스템의 낮은 쪽을 잡고 잔을 살짝 들어 웨이터가 따르는 와인을 받았다. 기울인 손 끝에서 떨어지는 와인 줄기는 와인 잔 보울의 벽면을 따라 요동치다, 볼의 아래 부분까지만을 채우고 멈췄다. 그래, 이 정도가 딱 좋아. 유리 잔의 나머지 부분이 향으로 가득 차게 되니까. 그는 마시기 전에 유리잔에 일렁이는 붉은 수면을 잠시 감상하고, 잔 안에 갇힌 와인 향을 한껏 느낀 후에 아무 의미도 없는 휴가를, 소중한 사람의 단 하루 뿐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건배했다. 그래, 단 하루 뿐이지. 우리에게 처음은 곧 마지막이니까.

 

   그래, 생일이었다. 오월하고도 이십 칠 일. 루다노 델라 로베레의 생(生)일. 루다노의 베를린 공연 직후 신문에 실린 기사 중 여지껏 잊지 못하는 칼럼이 있었다. 변변찮은 음악 칼럼가였던 그는 루다노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것은 마치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의 환생과도 같다고.

 

   그 밖에 나머지 말들은 영 잡다하고 쓸모없는 것들이라 그는 칼럼을 닫자마자 그것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 한마디 만큼은 어쩐지 심장에 콱 박힌 듯 여지껏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고 남아있었다. 음악엔 별 식견이 없는 그도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바이올린 연주의 신화인 니콜로 파가니니겠지. 그는 음악 천재들이 으레 그렇듯 평범한 범인들이 부모님의 품에 안겨 손가락이나 빠는 나이 때부터 악기를 잡고 연주하고, 가르치는 것이 무색하게 스승을 능가하는 놀라운 재능을 선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연습을 시켰고 바이올린 한 대로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그는 세계를 돌며 이름을 떨쳤다. 나뭇가지로 연주한다든지, 악보를 거꾸로 올리고 연주한다든지, 그런 자잘한 일화들도 무궁무진하고. 놀라울 만큼 당신과 닮아있지 않나요? 그 천재 음악가, 결국 어떻게 되더라. 매독이며, 수은이며, 재산 탕진에 후두결핵, 죽은 후에도 잠들지 못하고 세계를 돌아다녔다던가. 서서히 자신에게 드리우는 죽음의 그림자를 눈치 챈 음악가는 그저 괴로운 숨을 뱉으며 손짓했다. 이미 제 목소리를 잃은지 오래 된 목구멍에서는 거친 임종의 바람 소리만이 나왔다. 다 죽어가는 음악가를 찾아간 성직자가 있었다고. 그는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환자에게 지독히도 무례한 질문을 계속 들이댔다. 그것은 질문보다는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 상대를 감정적으로 동요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음악가는 뼈 밖에 남지 않은 손을 휘적이다 결국 머리맡에서 주인을 지키는 바이올린에 손을 뻗고 말했지. 저것엔 악마가 들어있다고.

   아스틴은 와인 잔을 가볍게 돌리며 유리잔 너머로 굴곡이 져 보이는 루다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더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된 그의 연주를 설명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 악마였던 거겠지. 믿을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을 마치 마법 같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이성적으로 납득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것들 조차… 납득 가능하고 설명할 수 있는 말로 정의하고 싶어하고. 하지만… 때론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가만 받아들일 때, 그것은 우리에게 깊숙히 녹아들어 떨쳐낼 수 없이 질척하게 달라붙지. 볼 벽을 따라 출렁이던 와인은 곧 잔잔히 멈춰들었다. 그래, 마치… 당신처럼. 상념은 거기까지였고 아스틴은 알 수 없는 즐거움에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었다.

 

   "이런 나날이 얼마나 더 지속될까요?"

 

   그것은 꾸며낸 연심이었고 사랑의 흉내에 불과했다. 마치 왼손 약지에 낀 반지가 형태 뿐인 사랑의 약속인 것처럼, 그 웃음은 상대를 향한 가장된 호감의 표현이었고 다정한 손짓은 텅 빈 애정에, 그 목소리는 거짓된 상냥함에 불과했다. 이것은 단지 긴 여정에 잠깐 스친, 이를테면 그래. 벤치에 앉아서 쉰다든가, 숙소를 잡아 잔다든가, 시장 바닥을 돌며 만물을 구경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숲내음을 느끼거나, 바다의 소리를 듣거나, 뭐가 됐든 그저 즐거운 시간 낭비일 뿐. 결국엔 멀어지다 끝이 나고, 종국엔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샛길로 새는 것은 항상 아주 유쾌하며, 꼭 그런 쓸모없는 것까지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간직하려 발버둥치지. 지금 당장은, 그것이 아주 값지고 소중하게 보이니까. 당신은 내게 딱 그래요. 지금 당장은 당신이 아주 가치 있고 값어치 있게 보여요. 아주 중요하고… 또 사랑스럽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은 항상 즐거워요. 탈선하는 것만큼 짜릿하고 쾌락적인 건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뿐이야. 그는 눈을 감았다. 제 안의 깊숙한 어딘가에서 지독한 이기심이 들끓어 올랐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치사하고 유치한 욕심이었다. 내가 당신을 향해 웃을 때 당신은 내게 울며 매달려 줘. 내가 당신의 얼굴을 다정히 붙잡을 때 당신은 내게 거칠게 입맞춰 줘.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은 무너지며 내 앞에 무릎 꿇어 줘. 그래. 만약 당신이 정말 파가니니의 환생이라면,

 

   이번엔 당신의 영혼을 내게 팔아줘.

 

    "……."

 

   그것은 그저 시간 문제일 뿐이다. 뻔히 이길 것을 알고 하는 게임만큼 재미 없는 것도 없을 터인데, 왜인지 이번만큼은 지극히 흥미가 일고 앞으로의 일이 기대가 되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당신은 내게 울며 매달릴 것이고, 참지 못하고 내게 먼저 입맞출 것이고, 결국 내 앞에 무너지며 무릎 꿇을 것이다. 결말을 아는 영화만큼 지루한 것도 없을 터인데, 왜일까. 아니, 이미 상식의 영역을 벗어난 것을 이해하려 해봤자, 그저 이런 저런 명분들을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해. 그는 그저 자신의 논리를 벗어난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그럴 때 그것은 제 안에 깊숙히 꿰뚫어 박히는 법이니까. 그래, 마치 당신처럼. 그는 다시 눈을 떴다. 다시 건배할까요? 우리. 그것은 마음에도 없는 얄팍한 감정이었다.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생일 축하해요, 루다노."

 

   내년 생일은… 글쎄요. 챙겨줄 수 있다면 좋겠군요. 그는 잔에 남은 와인을 쭉 들이켰다. 달콤한 첫맛은 곧 잊기 힘든 진한 쓴맛이 되어 헤어나오기 힘든 진한 여운을 남기고 종국엔 존재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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