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잃은 새 이야기
COMMISSION2021. 1. 8. 03:28새장 속 책사는 잠 못 들고 오늘도 죽지 못해 아침을 맞고 다가올 내일을 저주하고 오지 않는 주인을 그리며 허공에 목을 매고
오랜 전쟁은 끝났다. 황녀 에르제는 황제가 됐고 노스피스의 귀족들은 추방당하거나 그 고귀한 신분을 박탈 당했다. 그들의 대표이자 유구한 섭정이고 뛰어난 책사였던 네빌로 유르겐은 그 아들의 손에 죽었다. 한때 그의 권력을 잠시 휘둘렀던 대귀족 안제 웨인은 처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의회는 이름만 남았고, 한때 혁명을 도모해 천계를 다스리고자 했던 그 귀족들은 완전히 몰락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무너진 겐트와 황궁을 재건하는 일도 착실히 수행되었다. 제 아비를 직접 사살한 에드윈 유르겐은 권력자의 측근이 되어 반역자들을 직접 처분하고 다녔다. 황도군의 노련한 총사령관인 잭터 이글아이는 이름 없는 비석 아래 묻히고 군함 에를록스 호로 다시 태어났다. 겐트 수비대는 연이은 전투로 훌륭한 병사를 많이 잃었다. 황녀의 정원은 짓밟힌 채 이제는 황제가 된 주인을 맞이했다. 내전이 끝나고 남은 군인들은 으레 그렇듯 처형되거나 감옥에 수감되었다. 데 로스 제국의 파병군은 일이 끝나자 분위기를 살펴 슬쩍 천계를 떠나 철수했다. 그를 떠나지 않을 듯 찰거머리처럼 들러붙던 정신의 악몽에서 깨어난 운 라이오닐은 무법지대의 사령관이자 대장군이 되었다. 다시 뭉친 세브 샤즈가 개조한 비공정 필라시아는 이 역사에 휩쓸린 모험가에게 하사되었다. 그는 황제에게서 모험이 끝나고 황궁에 돌아올 자리를 약속 받기도 했다. 모험가가 떠난 그곳에 남은 것은 전쟁의 황폐함 뿐이었고 어디에나 사람이 부족했다. 해안 수비대는 코엔 하퍼의 발칙한 내부 고발에 대한 책임으로 전원 산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단 한 사람을 빼고. 그리고 그 우두머리인 하이람 클라프는, 하이람 클라프는…….
베르너 클라프는 그 연대책임의 유일한 예외였다. 그 자신은 제가 도대체 왜 제외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이젠 그 까닭을 물어볼 사람도 없어졌다. 그는 세상에 하나 남은 클라프였기 때문이다. 그 탓에 그 열외는 특권도 혜택도 이익도 다행도 위안도 되지 못했다. 그것은 그저 혼자 남겨진 고독이었고 견디기 힘든 상실감이었고 다 하지 못한 언행에 대한 후회였고 덧없는 세월에 갇힌 무기력함이였다. 그 안에 담을 사람을 잃은 해안 수비대는 당연히 유야무야 와해되었다. 자신을 소속감이라는 울타리로 감싸주던 유일한 조직이 사라지자 베르너는 대부분의 군인이 맞는 뻔한 결말을 두려워했지만 동시에 이 주인 잃은 삶을 이제 끝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스스로 죽을 용기는 없었고, 그렇다고 그대로 살아가기엔 망망대해에 혼자 빠진 것처럼 앞으로의 삶이 막연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평생 그래왔듯 남이 제 삶을 결정지어주길 은연 중에 바라며 어디로 도망치지도 그렇다고 투항하지도 발악하지도 않고 그저 제 주인이 눈 감은 안트베르 협곡에 덩그라니 남아있었다. 어쩌면 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길 바랐는지도 몰랐다. 제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기엔 그는 너무도 나약했다.
황제 에르제는 그 뒤로 한 차례 무너진 천계를 또 다시 일으켜 세울 새로운 정책을 궁리해야했다. 그는 하늘의 길을 직접 열고 천하를 평등히 만들어 다스리겠다 선언할 정도로 포부가 있고 당찬 여제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전에 섭정을 둘 정도로 너무도 어렸고 천계를 뒤흔든 반란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경험이 모자란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를 도울 뛰어난 인재들은 너무도 적었다. 급격하게 줄어든 인구 문제, 군주정에 대한 반발심, 여전히 천계인에게 남아있는 용에 대한 혐오, 무너지고 황폐화된 겐트와 황궁의 재건, 무법지대 웨스피스의 문제, 귀족과 군인들의 처벌과 데 로스 제국과의 대외적인 문제, 폭풍의 바다에서 일어난 차원 폭풍. 해결해야 할 문제는 너무도 많았고 시간과 힘은 아무리 쏟아부어도 모자랐다. 자는 시간을 줄였다. 몸단장은 명백한 사치였다. 식사하는 시간도 아까웠다. 잘 먹지 못하고 잘 자지 못한 몸은 금방 지치고 병들었다. 감기 몸살을 앓으면서도 일하기를 쉬지 않는 에르제를 보며 에르윈은 그를 도울 현명하고 충실한 인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반란 분자를 처분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고 당연한 처사였지만 사람은 부족했고 그 중 총명하고 쓸모 있는 것들은 더더욱 희귀했기에 그는 모든 사건의 잔재를 이 세상에서 추방시키는 것이 현명한 결정인지 방황했다. 그리고 그는 기침하는 천계의 군주를 뒤로 하고 혹여나 사라지지 않은 헤르만의 폭탄이 남지 않았나 방문한 안트베르 협곡에서 죽은 하이람을 끌어 안고 저 깊은 협곡 아래를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는 베르너를 발견했다. 그는 며칠은 먹지 못한 듯 바짝 야위어 있었다. 퀭한 인상 아래 물을 먹지 못한 식물처럼 바짝 말라있는 가여운 육신은 바람이라도 불면 곧 가루가 되어 날아갈 것 같이 가녀렸다. 본래 깨끗한 하얀색이었을 해안 수비대의 제복은 온갖 오물과 오수, 누구의 상처에서 나왔는지 모를 검붉은 핏자국, 황야를 날아다니는 흙과 모래 같은 것들로 얼룩덜룩 했다. 한쪽 신발은 어디로 간건지 까맣게 때가 탄 양말 뿐이었고, 반대쪽 신발이라 한들 멀쩡한 것은 없어보였다. 그는 단지 품 안에 이미 숨을 멈춘 하이람을 애닳게 끌어안고 며칠 간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인기척을 쫓아 고개를 느릿느릿 돌렸다. 그 텅 빈 눈은 에드윈을 바라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이번엔 당신이 내 주인인가요. 그는 스스로 검은 목줄을 물고 이방인에게 다가가 꼬리를 힘없이 흔들었다. 그래도 그는 저를 두고 간 영원한 주인을 버리지 못해 힘없는 팔로 그 텅 빈 육신을 질질 끌고 갔다. 그래, 베르너는 하이람을 버릴 수 없었다. 차라리 버려지는 쪽이 나았다. 그때 그는 흔들거리며 껌뻑이는 시야 속에서 며칠 간 찾지 못한 그 열외의 까닭을 찾아냈다. 바로 그 사실이 그를 혼자로 만든 것이었다.
베르너가 무슨 결말을 기대했든, 그는 처형당하지 않았다. 에드윈은 베르너를 데리고 와 우선 식사를 먹였고, 청결하게 씻겼으며, 새로운 옷을 입혔다. 그는 해안 수비대의 제복을 세탁해서 입고 싶어 했지만, 그의 고집은 딱 목에 찬 쵸커까지였다. 새로 입은 옷이 어색했다. 본디 천한 출신인 그에겐 차라리 옷은 없는 편이 익숙했다. 그 딱딱한 제복을 제대로 갖춰 입는 데 익숙해지는 것도 시간이 필요했고 때론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옷을 입은 것이 기꺼워 괜스레 웃음 지은 날도 수두룩 했다. 이제와 또 다른 옷을 입는 것이 그는 싫었지만, 해안 수비대가 그 스스로 궤멸되었음을 알았으므로 사라진 조직의 제복을 입겠다 생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고 또 그럴 입장도 아니었다. 그는 허겁지겁 제 앞에 차려진 음식을 집어 삼켰다. 욕실에서 거울을 보고 나서야 초라하고 찌든 모습이 보였다. 뭐라도 먹고 나니 몸에 기력이 돌아오고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몸에 힘이 돌기 시작하니 병들고 아픈 것이 느껴졌다. 그는 그제서야 제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불결을 통해 청결을 깨닫고 공복을 통해 포만을 깨닫고 질병을 통해 건강을 깨닫고 죽음을 통해 삶을 깨달았다. 그는 그가 한번 안트베르 협곡에서 제 주인과 함께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저 그 몸뚱아리만이 자신의 미천함을 부끄러이 여기지 못하고 스멀스멀 다시 산 자의 경계를 넘어 온 것이었다. 그는 제가 그곳에서 죽은 것이 오히려 기뻤다. 죽음마저도 그 사람과 함께였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만족스러웠다. 하이람은 그 협곡에서 혼자 죽고 남은 단 한 구의 시체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 위에 주인을 따라 투신한 충성스러운 노예였다. 생을 멈추는 순간까지도 그와 함께 했다는 사실이 짧은 편지 한 장을 어떤 이에게 남기고 이미 죽은 자의 대지로 간 그와 여전히 염치도 모르고 살아있는 자의 대지에 머무르는 자신을 여전히 연결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이 몸이 여기에 남아있어도 그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베르너 클라프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러니 이 남은 육신이 어떤 방식으로 쓰이든 그것은 딱히 아무 상관 없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살아있는 시체로 살아가는 것이 비련한 노예 베르너 클라프가 삼 십 년이 넘게 살아온 방식이었기에 이제와서 낯설지도 않았다. 그저 베르너는 하이람에게 딱 한번, 원래라면 주어지지 않았을 생(生)을 허락받은 것 뿐이었다. 그러니 그것을 멋대로 질질 끌고 다니고 내키는대로 휘두르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강제로 끝내는 것도 그 사람인 것이 당연했다. 단지 지금 제가 여전히 살고 있는 이유는, 그 숨을 멈추기 전에 어떤 이의 손에 억지로 거두어져 주인을 따라 죽음까지도 불사르는 그 고결함을 더럽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베르너 클라프는 에드윈의 제안을 받아들여 처형을 면하고 황제 에르제의 숨겨진 책사로 수감되었다. 에드윈은 본래 해안 수비대였고, 그 대장인 하이람 클라프의 종이자 병사인 베르너 클라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있을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하여 그를 감옥에 일단 수감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에드윈은 베르너가 나라의 중직을 맡았음에도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대가로 그가 하는 것에 따라 황제의 허가를 구해 반란을 도모한 죄를 사면하고 여지껏 돈을 타고 팔려다녔던 그의 지위를 격상시킬 것을 약속했다. 그것은 일방적인 계약이었을 뿐 베르너는 처형을 당하든 책사의 지위를 받든 죄를 사면받든 지위를 높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그는 속이 텅 빈 인형과도 같은 존재였고 필요에 따라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거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숨 쉴 뿐인 이 천계의 새로운 책사였다. 그저 그를 증명하는 신분이 노예에서 죄수가, 하는 일이 전투에서 책략으로 바뀐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베르너에겐 이제사 어떻게 되든 좋은 일일 뿐이었다. 본래 영리한 그라면 분명 어린 황제에게 이치에 맞는 조언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은 익숙해지다 못해 이젠 그가 살아가는 조건이 되어버렸다. 누군가에게 멸시의 시선을 받고 경멸당하는 것도 그다지 상관 없었다. 오래 길들여진 그 몸은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참을 수 없는 희락을 느끼기도 했다. 다만, 그는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다는 에드윈의 말에 죄수복을 입든 뭘 입든 상관 없지만 자신의 제복을 세탁해서 가지고 있게 해줄 것과 차고 있는 쵸커를 그대로 착용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베르너가 가진 것 중 더이상 하이람이 살지 않는 이 땅에서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에드윈은 잠시 침묵하다 그 요구를 받아들이고 해안 수비대의 제복을 세탁해 돌려주고 쵸커를 그대로 찰 수 있게 해주겠다 약속했다. 그리고 베르너는 그 길로 곧장 천계의 비밀 책사로서 수감되었다.
수감 생활은 의외로 쾌적했다. 나라의 인재에 대한 에드윈의 배려인지 그는 깨끗한 독방을 받았으며 창살로 막혀 있어 나가지 못하게 되었을 뿐 청결하고 깔끔한 침대에 불투명한 유리로 막아진 욕실, 낮은 책상과 여러 장르가 마구 섞인 책들, 작은 사물함과 스스로 청소 할 수 있게끔 필요한 청소도구를 담은 청소도구함 등 죄수가 사는 감옥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윤택했다. 식사 역시 영양소가 고루 잡혀 맛있었고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것들은 합리적인 이유라면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베르너는 아침이면 일어나 세안 후 식사를 하고, 방 안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그리고 오전 일과로 해안 수비대에 있을 적에 매일 했던 것처럼 자신의 몸을 단련했다. 독방에 갇힌 죄수 신세였으므로 그때 했던 것처럼 길게 달린다든지 중화기를 쓴다든지 할 순 없었지만 방 안에서도 할 수 있는 훈련은 많았다. 그는 더이상 군인이 아니었으니 구태여 운동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하이람이 가르쳐준 것들을 잊고 싶지 않아 베르너는 오늘이 몇 월 며칠이고 무슨 요일이고 날씨가 어떻고 상관없이 아침 시간을 그런 식으로 보냈다. 오후가 되면 꼭 맞춘 시간에 점심이 나왔다. 점심을 먹고 나면 베르너는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만 읽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책사인 만큼 나라 사정을 잘 알아야 했기에 자신이 직접 볼 수 없는 천계의 사정을 꿰뚫어보듯 알고 있어야 했다. 전쟁 이후 천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전부 알지 못했기에 그는 일정한 주기로 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에드윈에게 바깥 사정을 전해듣고 그 밖에 다른 매체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받은 책의 권 수는 많았지만, 항상 반납하고 새로 들여오는 책의 종류는 한정되어 있었다. 역사, 천문, 지리, 정치, 법, 병법, 문화, 외국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익혀야했고 그에 더해 런처로서 그가 익힌 기술도 정리해야 했다. 게다가 에드윈이 오는 날에는 해안 수비대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반란을 도모했을 때의 일 역시 보고해야 했다. 때론 그보다 훨씬도 전에, 그가 다른 이의 소유물로써 살아왔던 것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야 했다. 그 일이 괴롭진 않았다. 그것보다도 더한 것도 딱히 힘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갇혀 지내는 것도 매일 몇 십 권씩 책을 소화시키는 것도 과거에 대해 증언하는 것도. 이젠 무엇도 그를 아프게 할 순 없었다. 무언가에 아파하기에 그는 세상이 그에게 들이미는 고통에 너무도 무뎌져 있었다.
에드윈이 됐든 다른 사람이 됐든 항상 저녁 식사가 오는 시간에 면허가 끝났다. 그를 보러 오는 사람은 그들이 전부였다. 에드윈, 그리고 에드윈의 대리자, 교도관. 그것이 이제 와서 서글픈 것은 아니었지만 때론 등을 맞댔던 해안 수비대의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거기엔 당연히 하이람 클라프도 포함되었다. 물론 그것은 베르너에겐 너무도 과분한 사치였고 지금 이 정도가 그의 분수에 맞는 처사였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했던 유년기가 다 지나기도 전에 그는 제 부모 역시 누군가의 목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노예였음을 알아야 했다. 그걸 알고 난 직후에 베르너는 제 등에 새겨진 영원한 주홍 글씨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걸 받아들이기에 베르너는 너무 어렸지만 세상은 그가 자라기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노예들의 자식으로 사는 삶은 참으로 잔인했다. 다른 주인의 손으로 목줄이 넘어가기 전까지 맛없는 식사를 하고, 눈을 뜨고 일어나 다시 감고 잘 때까지 일해야 했고, 주인이 먼저 불 끄고 자기 전까지 아무리 피곤해도 눈 감을 수 없었다. 아파도 티내지 않는 요령을 알아야 했고 우는 법을 배우기 전에 억지로 웃는 법을 배워야했다. 누군가의 어린 아이로 사랑 받는 것보다는 삼 분 후면 사라질 동정을 사는 것이 더 나았다. 그에게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편하게 잘 수 있는, 아플 수 있는, 울 수 있는, 사랑받을 수 있는 권리 같은 건 없었다. 태어나고 죽는 것까지도 돈으로 살 수 있는 타인의 권한이었던 베르너가 행복할 자격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다 생긴 우연으로 구원 받은 후에도 그 생각은 변함 없었다.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괴로웠던 어린 아이는 누군가가 재미 삼아 내민 구원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고 붙잡았다. 그리고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던 지옥을 기어코 살아나왔다. 그는 그 삶의 기회를 잡으면서도 하이람이 자신을 구한 것이 어떤 자선도 아니며 자신이 특별해서 였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그는 제 눈 앞에 주저 앉아 바짓단을 잡고 비는 어린 노예를 충동적으로 데려간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저를 지옥에서 꺼내주고 제 아래 가까운 부하로 길러 노예로서는 과분한 여러가지를 가르쳐준 상사이자 스승이고 동시에 주인이었던 그에게 사적인 감정을 품지 않을 순 없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괴로웠다. 자신에게 사랑을 이루고 행복할 자격 같은 건 없었다. 그 자격은 하이람의 것이었다. 감히 하지 못할 말을 썩혀만 두다 결국 곪아버린 감정을 그는 모른 척 했다.
무언가를 주거나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대신 그저 받는 것만큼은 허락되었다. 그래서 그는 하이람이 주는 모든 것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내었다. 그가 요구하는 호칭, 겉모습, 훈련, 잡일, 지위, 역할, 관계, 감정, 욕구, 욕망……. 그리고 그 모든 걸 머리에 새기고 몸에 박아 잊지 않게 했다. 옷을 벗었을 때 눈이 저릴 정도로 온몸에 새겨진 흉한 자국은 그것의 일부였다. 전부는 아니였다. 전부라고 하기에 그 상처들은 너무도 적었다. 그 흉터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당연히 칼에 베이면 아프고 불에 닿으면 뜨거웠으며 누군가에게 맞으면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그는 하이람이 제 몸을 흉지게 하는 것이 썩 기쁘고 만족스러웠다. 그 상처들은 노예인 자신이 주인에게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각인이었다. 제 몸에 남은 상처를 볼 때마다 그와 함께 보낸 은밀한 밤이 떠올라 제가 그의 특별한 무언가라도 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의 더러운 욕망을 받아내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쓸모였다. 그랬기에 그 밤들은 베르너가 제대로 삶의 이유를 수행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가쁜 숨을 뱉으며 침대 위에 쓰러진 채 뿌얘진 시야에 제 주인을 담을 때마다 베르너는 저도 모르게 종의 본분을 잊고 하이람에게 무언가를 기대했다. 그것은 가족애일 수도, 전우애일 수도, 가까운 친우로서의 우정일 수도, 제대로 된 연인으로서의 사랑일 수도 있었다. 무엇이든 그에겐 과분할 뿐더러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었다. 그 사실이 그를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도취된 꿈에서 깨어나 현실에 떨어지는 기분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럴 때마다 외출 전에 제대로 꺼진 불을 다시 확인한 것 같은 안도감이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밝아온 아침에 다시 눈을 떴을 때 곁에 있는 하이람을 보며 그는 또 다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누군가와 함께 눈을 뜨는 것조차 베르너에겐 한없이 낯선 일이었다.
어쨌든, 저녁 식사 후엔 할 일이 없었다. 운동을 마저 하기도 하고, 못 다한 공부를 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자기 전 그는 꼭 한 번 탈의를 한 채로 욕실에 들어갔다. 욕실 안엔 거울이 있었다. 그 속엔 반전된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꼭 겉모습만 반전된 것 같진 않았다. 그냥, 대부분의 것이 그랬다. 살아 생전에 드러낼 수 없던 더럽혀진 욕심들이 더 이상 숨길 곳 없이 줄줄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거울 속에 비친 제 몸의 상처들을 하나씩 훑었다. 어떤 것이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하다가 생겼는지 그는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와 보내는 모든 날들은 하루하루가 특별했으니까. 상처 위를 손으로 쓸어도 이제 그 아픔이 다시 느껴지진 않았다. 그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런 식으로 그는 한참이고 욕실에 혼자 우두커니 선 채 거울 속 제 모습을 바라보고, 몸에 남은 자국을 훑고 만지며 지난 날을 회상하다 밖으로 나와 다시 옷 속에 추억을 감추고 잠에 들었다.
그렇게 잠들고 난 후엔 제법 잔인하고 행복한 꿈들을 꿨다. 그 꿈들은 평온한 일상이기에 행복했고 이젠 지나가버려 다시 오지 않기 때문에 잔인했다. 먼 옛날의 일들도 꿨다. 감옥에 갇히기 이전에도 혼자 꿈은 많이 꿨지만 요즘은 더욱 그랬다.
태생을 저주받았던 날, 처음으로 제 등에 있는 꽃잎을 네 개 가진 낙인을 봤던 날, 구타 당했던 날, 주인에게 목을 졸렸던 날, 이름 있는 병에 걸렸던 날… 삶의 고비를 살아온 햇수보다도 많이 넘겼던 먼 옛날이 생각나는 숱한 꿈들. 처음으로 하이람을 봤던 날, 신문으로 그가 행한 일을 알게 되고 제 일이 되었을 수도 있었던 죽음의 위협을 느꼈던 날, 그리고 잊지 못할 그의 소유가 되었던 날. 사는 것에 욕심도 의지도 없었던 그는 죽을 때만 되면 어떤 삶의 의미를 찾기라도 한 것처럼 제 목숨을 빌었다. 그 순간이 지나면 또 다시 지독한 우울의 늪에 빠져 삶을 저주하면서도 하루하루를 견디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고 죽음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벌레보듯 차갑게 내려다보는 그 눈을 보고 살려달라 빌었다. 잘 될 거라 생각은 않았다. 잘해야 비웃음거리나 되고 견디기 힘든 모욕을 다 겪은 후에야 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과 다르게 눈앞의 남자는 엎드려 비는 제 앞에 앉곤 머리채를 휘어잡아 더러운 얼굴을 훑어보더니 좋다며 일어섰다. 베르너는 왜 저를 살려줬느냐 묻지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인채 앞서가는 발걸음만 쳐다보며 걸었다. 처음엔 개처럼 기어가야 하나 라고 생각했지만 별 말이 없어 그냥 일어서 걸었다. 그때 가르쳐준 그 사람의 이름은 그를 영원히 속박하는 목줄이 되어 지금까지도 베르너의 목을 죄었다. 그가 저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 그는 아무거나 갖다 붙여 만든 제 이름을 처음으로 입 밖에 내었다. 이제까지 누구도 그에게 이름 따윌 묻지 않았으니 제 이름을 스스로 부르는 것은 아주 낯설었다. 아무거나 가져다 붙여 만든 그 이름은 그 남자에게 처음 불렸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췄다.
"그래? 노예에게도 이름은 있나보네. 난 하이람 클라프."
"그, 그럼… 클라프 주인님……."
그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표정을 구기더니 앞서 가던 발을 멈추고 뒤돌아 말했다.
"아니. 하이람 주인님으로 해, 베르너."
그것은 하이람의 첫번째 명령이었다.
처음으로 배운 것은 글자였다. 노예에게 본디 글이란 필요없는 것이었지만 하이람은 도착한 편지가 누구에게 온 것인지 버벅거리며 읽는 모습을 보고 베르너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베르너는 명석하며 총명한 사람이었으므로 가르치면 가르치는대로 잘 흡수했고 빠르게 배웠다. 나중에는 하이람이 직접 가르치지 않더라도 스스로 책을 보며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 그때부터 하이람은 베르너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것들을 가르쳤다. 언어, 역사, 수학, 과학, 사회,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 베르너가 어엿한 런처가 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그는 무엇이든 열심히 했고 이전보다 나아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야… 빨리 배우네, 너."
"…감사합니다."
그 건조한 칭찬 한 마디에 목이 말랐기 때문이었다.
베르너가 인간으로 거듭나는 동안 하이람은 직접 무기설계도를 보완시켜갔다. 스승 헤르만을 만나고 개화한 그의 재주는 마침내 스승의 미완성작을 완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베르너가 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될 쯤 해안경비대에 지원했다. 하이람이 가는 길엔 베르너가 항상 따랐고 베르너가 있는 곳엔 항상 하이람이 있었기에 당연히 베르너도 함께였다. 그는 우수한 제 주인이 수 년만에 수비대의 대장직을 차지하는 것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와 옆에서 나란히 걷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야 저 멀리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쫓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이 제 주제에 맞는 일이었다. 해안 수비대에 들어오고 나서야 그는 평범한 사람들을 처음 만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고 세 끼 식사를 하며 평범하게 가질 법한 직업을 가지고, 그에 걸맞는 일을 하고 번 돈으로 유흥을 즐기고 사람을 만나며 밤엔 잠을 자는 사람들. 한 때는 그것이 신기해 그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겁게 여기던 때도 있었다. 그것이 잠깐 정도는, 자신도 그 평범한 사람들의 궤도에 올라갔다는 착각을 줄 정도였다. 그래도 그것은 노예 베르너에겐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점심 식사 후 함께 한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과 떠들다 제 어깨에 손을 얹고 웃는 목소리에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사람 좋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얘기 하길래 이렇게 즐겁냐? 설마 하니 내 뒷담은 아니겠지."
대화에 한 사람이 더 끼고 나자 베르너는 언어를 잃은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곤 고개를 푹 숙였다. 누가 그의 이름을 불러도 그는 고갯짓으로만 대답했다. 기어코 어디 아프냔 소리가 남의 입에서 나오자 하이람은 지금이 기회인 것 마냥 베르너를 슬쩍 무리에서 빼돌렸다. 그는 사람의 시선이 없어지자 사이좋게 어깨에 얹었던 팔을 치우곤 더러운 것을 만진 것 마냥 옷 소매를 털었다. 그는 먼저 성큼성큼 앞서 걷곤 일정도 끝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숙소로 향했다. 문 앞에서 뜻하지 않게 코엔을 만나 표정 관리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베르너를 먼저 제 방 안에 밀어넣고 베르너에게 무슨 일이 있냐 묻는 그에게 대답했다.
"아, 베르너가 실수한 게 있어서."
가볍게 벌을 주려고. 그는 말을 마치고 방문을 닫았다.
하이람이 들어오자 어쩔 줄 몰라 문 앞에서 쩔쩔매던 베르너는 어깨를 움츠리며 문 근처에서 비켜섰다. 그 얼굴은 공포에 떠는 것 같다가도, 기묘한 기대에 차 딱히 어느쪽이라고 정의하기 힘든 이상한 표정이었다. 하이람은 베르너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 눈은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고 하얀 머리카락 아래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포식자의 그것처럼 빛났다. 그는 서서 이쪽을 보고 있는 베르너에게 명령했다.
"무릎 꿇어."
하이람은 둘둘 말린 설계도를 책상 위에 두곤 등을 젖혀 의자에 거만하게 기댔다. 넌 사람 아니잖아. 서 있을 자격을 박탈 당한 베르너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닥에 엎드렸다. 문 옆에 둔 신발장과 같은 높이로 저 멀리 앉아 있는 주인에게 개처럼 엉금엉금 기어갔다. 마룻바닥의 먼지가 손에 가득 묻는 게 느껴졌다. 그는 현관에서, 맨바닥을 지나 카펫을 두 무릎과 손으로 걷곤 앉아있는 하이람의 다리에 얼굴을 부비적 거렸다. 표정 하나 동하지 않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하이람은 저도 모르게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반대쪽 다리로 베르너를 거세게 걷어찼다.
"어느 건방진 노예가 허락 없이 주인의 몸에 닿으려고 하지?"
하이람은 바르작 거리며 떨고 있는 베르너에게 한쪽 발을 내밀었다. 핥아. 주인의 군화를 핥는 것을 감히 허락 받은 베르너는 걷어 차인 곳의 통증을 다 추스리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가죽 장화를 핥았다. 몇 번이고 혀로 핥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가죽의 미끈한 촉감이 되려 달게 느껴졌다. 그는 한참을 그 구두 끝에 묻은 온갖 오물을 침으로 씻어내다 헤진 가죽의 까슬함에 잠시 멈칫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하이람은 발끝으로 그의 턱을 가볍게 쳤다. 그 입에서 떨어지는 말은 무거웠다.
"누가 멈추래."
베르너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혀를 길게 빼어 긴 장화를 주욱 핥아냈다. 개의 입술 새로 나오는 더러운 욕망의 언어는 명백히 사람의 것이었다.
"…벌해주세요."
그리운 꿈에서 깨자 아직 새벽이었다. 그는 잠에서 깬 것이 못내 아쉬웠다. 잠이야 또 자면 되고 그는 으레 그랬듯 또 다른 꿈을 꾸겠지만 오늘 밤은 모처럼 그 사람이 나오는 꿈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깨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지금은 몇 시지? 이곳엔 시계가 없었기에 아주 작게 난 창문 밖을 보고 어느 때겠구나, 하고 시간을 넘겨짚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해가 뜨지 않은 것을 보아 꽤 이른 시간에 깬 것 같았다. 또 다시 잠들기엔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저 꿈을 꾼 것 뿐인데 처음 몽정한 어린애 마냥 마음이 술렁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뜬 눈으로 시간이 해를 띄우기만을 기다렸다.
점심 식사가 드물게 조금 늦었다. 늦어도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별 일이다 싶었다. 죄수의 생활이 다 그렇듯 칼로 자른듯 규칙적인 것이 군인과의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으려나 싶다가도 그는 그저 시간이 안 됐겠거니 했다. 이곳엔 시계가 없었으니 늦는 것도 그저 직감이었을 뿐이니까. 그러나 생각대로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 맞았다. 식사를 들고 온 면회인이 에드윈이 아닌 운 라이오닐이었으니까. 이젠 웨스피스의 사령관이 됐다던 그가 식판에 든 식사를 들고 계단을 내려오자 베르너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낯익은 손님을 맞이했다. 맞이랄 것도 없었다. 그들은 너무도 오랜만에 얼굴을 맞댔고, 본 적이 있다 한들 제법 껄끄러운 관계였기 때문이다. 운은 문에 난 구멍으로 식판을 집어넣곤 철창 너머에 있는 간의 의자에 앉았다. 에드윈에게 부탁받은 보고서가 여러 장 있었지만 그는 상대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별로 상관없는데. 그래도 그걸 굳이 말로 하기 보다는, 베르너는 상대방의 배려를 감사히 받기로 했다. 그는 습관적으로 항상 그랬듯 바닥에 무릎 꿇은 채로 오늘의 점심을 먹었다. 식사 메뉴는 어제와 비슷했지만 철창 너머에 저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는 탓인지 영 다르게 느껴졌다.
면회는 늘 그랬듯 현상 보고로 시작되었다. 운은 먼저 어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중요도 순으로 보고했다. 보통 하루 걸러 하루 큼지막한 사건이 생기진 않기에 보고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제도 마찬가지였고,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오늘도. 베르너는 웨스피스에 어떤 큰 일이 있어서 운이 직접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운은 며칠 전 베르너가 요청한 새로운 서적을 안으로 밀어넣었다. 부탁하지 않은 책들도 몇 권 끼어 있었다. 그는 어렴풋이 이것이 운의 또 다른 배려 였음을 알아챘다. 이런 거 괜찮은데. 이번에도 그는 구태여 말로 전하진 않았다. 딱히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맙다드니, 미안하다느니 하는 말도 껄끄러워 할 것 같았으니까. 이제 베르너는 강제로 퇴역한 군인일 뿐이고 저는 천계의 대장군인데도 그는 여전히 경어를 썼다. 그건 내가 책사라서 그런걸까? 이젠 군인이 아니어서? 일반인이니까? 어느쪽이든 상관 없었지만 그마저도 낯설게 느껴졌다. 저에게 말을 높여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상했다. 천대받고 하대받고 미움받고 경멸받는 것이 익숙한 저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 이해가 안 됐다. 옛날이야 그랬다 치더라도 이젠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러지 않아도 누구도 눈치 주지 않을텐데. 베르너는 책을 몇 번 사라락 넘겨보다 구석으로 밀어 치웠다. 쌓아놓은 책이 스르륵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중에 치우면 될 일 이었다.
"…그리고, 웨스피스는 새로 시행된 정책에 따라 일정한 시험을 보거나 자격을 요구해 고용하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며칠 전에 에드윈이 말했던 무법지대 차별철폐에 대한 얘기였다. 베르너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천계에 인구가 반토막이 나버렸으므로 어쩔 수 없이라도 반 강제적으로 차별은 줄게 되어있겠지만, 황제 에르제가 선언한 방향으로 어찌저찌 굴러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보고가 끝나자 운은 종이를 넘기고 고개를 약간 들어 베르너를 마주보았다. 각을 맞춰 쓴 모자 아래로 어둡게 빛나는 눈이 보였다.
"직접 온 까닭은… 이 정책 때문입니다만, 황제에 대한 여론도 좋지 못하고 민심도 안 좋은 상황이라 정책에 대한 반발심이 심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자문을 구하고 싶습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천계인이 가진 용에 대한 혐오가 그저 황녀가 용을 타고 내려왔다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하니까. 그것은 베르너도 이미 예상하고, 우려하던 부분이었다. 게다가 재건에 동원할 사람이 모자랄 정도로 인력난을 겪고 있는데다 전쟁 후에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듯 사회가 흉흉할 때였다. 카르텔 건도 있으니 웨스피스에 대한 오랜 편견과 불합리가 정책 한 두가지로 해결될 것이라 기대하진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우선… 시행 결과를 보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고용 근거와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공공연하게 게시하는 것이 나아요. 시행 직후에 있는 반발심은 어떤 정책이든 항상 존재해왔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밖의 문제에 대해선 어떻습니까?"
"여론은… 당장 해결하긴 어려운 부분이니 지속적으로 피해 복구에 전념하시는 게 좋습니다. 천계 상황이 나아지면 민심은 자연히 사그러 들고… 민심이 좋아지면 여론도 좋아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별개로 치안 유지에 신경을 많이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사건사고가 많으니까요. 운은 동의의 의미로 끄덕였다. 그는 보고서 한켠에 짧게 메모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생활에 문제는 없습니까?"
자문이 끝나면 면회인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할 수 있었다. 책을 바꿔달라든지,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든지, 원하는 물건이 있다든지, 뭔가 고장났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베르너는 잠깐 고민하다 생각난 듯 책상 아래에 따로 빼둔 책들을 내밀었다.
"이 책들의 후속 연구나 관련 연구가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책상 다리가 하나 망가졌고… 연필을 다 썼습니다."
운은 창살 틈새로 나온 책을 받았다. 이튼 공업지대의 지리에 대한 연구서였다. 그 뒤로 이어진 대화는 심심한 안부를 묻는 영양가 없는 대화였다. 그들은 이제와서 서로의 처지를 말하는 것이 부질없고 불편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나누는 말들은 피상적인 말들 뿐이었다. 베르너는 문득 이 면회를 빨리 끝내고 싶어져 먼저 말했다.
"다른 볼일이 있으신가요?"
운은 그 말에 담긴 상대방의 음울한 의도를 알아채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베르너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면회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기다렸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잘 수 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하이람이 나오길 기대했다. 어떤 때의 일이라도 좋으니 그를 보고 싶었다. 그를 보기만 하면, 이 마음의 이상한 술렁임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식으로 그는 언제까지고 이 철창 속에서 그와 연결된 채 살고 싶었다.
바란대로 그날 밤도 베르너는 하이람을 만났다. 만났다 한들 이젠 없는 사람을 멋대로 상상해서 만들어낸 것에 불과했다. 꿈 속의 하이람은 그가 생각했던 하이람보다도 잔인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운 그는 오늘 해안 수비대의 제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어렴풋한 그의 기억 속에서, 확실치는 않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었던 옷이 바로 그 옷인 듯 했다. 그는 감히 위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걸었기에 그 옷이라고 확신할 순 없었지만 직감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머리는 묶지 않고 푼 채였고 키도 마지막 기억보다 작았다. 그는 바닥에 무릎 꿇은채 앉아있는 베르너에게 물었다.
"너, 지금 뭐하는거야?"
베르너는 그 말의 의미를 한참이고 곱씹었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랐다. 당신을 바라보고 있어요. 꿈을 꾸고 있는 중이에요. 살아남아 나라의 책사가 되었어요. 하긴, 항상 그랬다. 그는 하이람이 원하는 대답 같은 건 평생 알지 못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도 명확히 말할 수 없는데 남이 원하는 것이라고 알 것은 무어랴. 그래서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열심히 눈에 새겼다.
"뭐하냐고."
그래도 오늘 그는 평소처럼 거칠지 않았다. 평소대로였다면 주인이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 노예가 어딨냐며 한바탕 성질을 부렸을 게 뻔했지만 그는 그 대신에 저에게 몇 발 짝 앞으로 다가오며 대답을 채근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살아남아 꿈 속에서 하이람 주인님을 보고 있어요."
아하, 그러냐. 하이람은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남았냐든지, 왜 살아남았냐든지, 나는 어떻게 되었냐든지, 살아서 뭘 하냐든지, 그 일이 적성에 맞냐든지, 전쟁은 어떻게 됐냐든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든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든지. 대신 그는 베르너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는 확실한 미소를 지었다. 베르너는 그때 그가 보고 있는 것이 하이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를 봐도, 그는 하이람 클라프였다. 그래서 이상했다. 괴상했다. 기묘했다. 기괴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하이람의 탈을 쓰고 그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서."
날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마.
그는 다정하게 베르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너무도 낯설어 베르너는 저도 모르게 움츠리며 목을 뒤로 뺐다. 꿈은 거기까지였고 그는 또 다시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있을 수 없는 일을 본 사람처럼 혼란스럽고 마음이 술렁였다. 악몽이었다. 이보다 더할 수 없는 악몽이었다. 그는 다시 잠들고 싶어 온 밤을 뒤척였다. 어떻게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어서 잠들어 다른 꿈으로 그 이상한 꿈을 밀어내고 싶었다. 차라리 그는 개꿈이길 바랐다. 하지만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그 감각이 소름끼치도록 생생했다. 그는 제 안의 하이람 클라프를 떠올리고 싶어 다급하게 옷 소매를 걷어 올리고 무수히 많은 상처들을 쳐다봤다. 그래도 머리가 멈춘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안개 낀 것처럼 머릿속이 흐렸다. 그 흐린 기억 속에서 살갑게 저를 대하는 하이람이 아닌 것만이 떠올랐다. 그는 잠들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다 억지로 아침을 맞곤 일어났다. 그는 다음 면회가 찾아오자마자 수면제를 요청했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 흐리멍텅한 눈에서 어떤 위험을 느끼고 요구를 거절했다. 그의 요구가 거절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베르너는 그 뒤로 매일 밤 잠에 들지 못해 뒤척였다. 그는 뭔가를 갈망하는 사람처럼 신음하며 절박하게 흉터를 손톱으로 피가 날 정도로 긁어댔다. 그럼 아릿한 통증 속에서 무언가 어렴풋하게 생각날 법 하다가도, 이내 다시 뿌옇게 번졌다. 어쩌다 억지로 잠에 들었을 때도 꿈은 꾸지 못했다. 그 뒤로도 그가 꿈을 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이람이 다시 나오는 일은 더더욱 일어나지 않았다. 베르너는 절망했다. 이것이 그가 자신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이라면 이보다 더 지독할 수도 있겠냐고 생각했다. 그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죽음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새장 속 책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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