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합숙
DREAMING/ACE OF DIAMOND2021. 1. 15. 21:18위기는 예고와 함께, 여름 합숙에 찾아왔다. 예선을 앞 둔 합숙이야 이미 이전에도 익히 들은 일이었지만서도, 시작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대뜸 내일부터 합숙이 시작이니 통학 인원도 기숙사에서 지내라는 말에 누구보다 곤혹스러웠던 것은 아메나시였다. 아메나시로 말하자면, 올 것이 온 것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만 넘기면 앞은 어떻게든 될 터였다. 아메나시는 합숙 전날,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짐했다. 절대로 들키지 않겠다고. 그가 이제껏 용케 걸리지 않고 지켜왔던 비밀이 탄로나는 날엔 찍 소리도 못하고 짐을 싸 나가야 할 게 틀림없었다. 그것만은 안 돼. 아메나시는 코앞으로 불쑥 다가온 여름 합숙에 투지를 불태웠다.
"…진짜 괜찮겠어? 내일부터 합숙 시작인데."
"절대로 안 걸릴거야. …절대로, 절대로."
반복된 말엔 굳은 의지가 비쳤다. 이 고비만 넘기면, 고시엔 예선이었다. 고시엔 예선에 아메나시가 출전하는 일은 없었으니 이 위기를 넘기면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당연히 금방 들킬거라던 유우키의 예상과 다르게 요령 좋게 합숙이 시작되기 직전인 지금까지 걸리지 않고 버텨왔다. 그 말인 즉슨, 야구부 내에서만 들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들키지 않은 것이었다. 어떻게 가능하겠냐만은, 출석 번호도 딱히 성별로 나뉘지 않고 반이 따로 구분되는 것도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애써 단발로 기르던 머리를 다 잘라버리고, 교복 역시 남학생 용으로 샀다. 괜스레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 걱정되어 말 수도 부쩍 줄였다. 십 수 년간 써온 1인칭 호칭까지도 바꿨다. 많은 것을 포기한 아메나시에게 이제와서 들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절대로 안 돼. 그 말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절대 합숙 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누구도 그를 의심하거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유우키는 손을 휘저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아메나시를 가만 바라보았다. 앞길이 걱정이었다.
합숙 첫날도 고되었다. 충분히 쉰다고 쉬었는데도 견디기 어려운 오랜 훈련과 몸의 피로는 진득하게 선수들을 괴롭혔다. 1학년들은 거의 전멸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단 한 명. 아메나시 만큼은 전날의 결의를 지키듯 지친 내색을 내보이지 않고 끝까지 합숙 첫날을 견뎌냈다. 웬만해선 터지지 않는 강한 체력으로 거뜬히 합숙을 버텨내는 것이었다. 남들이 지친 기색을 보이더라도, 더는 설 수도 없어 바닥에 쓰러지더라도 그는 아랑곳 않고 멀쩡히 달렸다.
"체격은 료처럼 짜그만데 말이지."
이사시키가 기숙사 벽에 눌러붙으며 중얼거렸다. 합숙 땐 통학하는 선수들도 빠짐없이 기숙사에 머물러야 했으니,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선수의 방에 눌러붙을 수 밖에 없었다. 원체 좁은 방을 3명이서 나눠쓰기에 방은 좁고도 또 좁았지만, 이제사 좁은 방 따윌 신경 쓸 정도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기운이 남아있는 2학년, 3학년들은 훈련 후 남은 시간을 제멋대로 쓸 뿐이었고 그럴 기력도 남지 않은 1학년은 그저 방바닥 어딘가에 늘어져 잠들길 기다릴 뿐이었다. 몰려다니며 친해졌던 1학년들이 마치 정해진 듯 전부 한 방에 모여 있으니 원래 이사시키와 같은 방을 썼던 2, 3학년들은 이미 다른 방으로 옮겨 간 후였다. 녹초가 되어버린 1학년들만 있는 이 방에서 멀쩡히 앉아 있는 것은 아메나시 뿐이었다.
"…야, 유이! 원래 스태미너 강한 건 알았지만, 괜찮은거냐?"
"멀쩡히 앉아있는 게 유이 뿐이라니, 우리도 분발해야겠네."
"아메나시 쨩… 내 푸딩 좀……."
유우키는 여전히 가쁜 숨을 고르며 침대에 누운 채 곁눈으로 옆을 바라봤다. 그곳엔 의연히 흙투성이로 반듯하게 앉아있는 아메나시가 있었다. 그 역시 유우키 쪽을 보고 있었다.
"그럭저럭, 괜찮은데. 푸딩 여기."
"진짜냐고……."
진이 다 빠진 1학년들은 한참이고 겨우 움직일 힘을 되찾을 때 까지 각자의 자리에 누워 쉬었다. 그리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시간이 지나고,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타키가와였다.
"일단, 다들 씻고 쉬는 게 어때."
아메나시는 앉은 자리에서 움츠렸다. 그랬다. 최악의 고비. 일단, 이렇게 하루종일 땅바닥을 구르며 훈련을 한 이상 씻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동안은 집에 귀가하고 나서 씻겠다며 통학 나름대로의 핑계를 댔지만, 합숙으로 기숙사에서 지내게 된 이상 이 일주일 간의 가장 큰 고비는 샤워였다. 씻지 않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씻을 수도 없어. 아메나시는 난감한 표정으로 땅바닥을 노려봤다. 그나마 있을 법한 작전은, 이런저런 변명으로 당장 씻는 것을 유예한 뒤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누구도 샤워하지 않을 법한 시간에 조용히, 몰래, 혼자 씻는 것 뿐이었다. 좀비처럼 누워있던 1학년들이 느릿느릿 일어나 갈아입을 사복을 꺼내기 시작하자, 아메나시는 고개를 들었다. 멍청히 고개를 숙이고 생각만 한다면 의심을 살 뿐이었다.
"유이, 안 씻어? 유니폼도 더러워졌고 세탁해야할 것 같은데."
"아, 크리스. 내 것도."
"내 것도!"
"아, 나는……."
아메나시는 타키가와의 팔에 하나 둘 걸쳐지는 흙 묻은 유니폼을 보며 입을 달싹였다. 생각해내야 해, 이 상황을 타개할 핑계를! 그 눈은 팔에 한가득 유니폼을 안은 타키가와를 타오르듯 노려보고 있었다.
"…아, 아메나시?"
"아, 나, 나는."
"…그러고보니, 유이. 감독님이 할 말이 있다고 하셨다."
"어, 어?"
유우키는 타키가와의 팔에 제 유니폼을 얹어주며 갈아입을 사복을 챙기고 먼저 밖으로 나섰다. 이어 같이 가자며 우르르 방 안에 있던 이사시키, 코미나토와 탄바, 마스코가 우르르 나갔다. 둘만 남은 방에서 타키가와는 이미 제 팔에 산더미처럼 쌓인 유니폼을 보며 말했다.
"감독님이 부르셨다는데, 가보는 게 어때."
"아… 그, 그래. 세탁실까지 같이 가줄게, 크리스."
첫번째 위기를 넘긴 아메나시는 타키가와의 팔에서 유니폼을 반 정도 덜어 제 팔에 안고 방 밖으로 나섰다. 이래서야……. 뻔히 들이닥칠 난관에 입에서 절로 나오는 것은 한숨이었다.
선배들도 없으니, 하고 몰래 아메나시와 마스코가 사온 야식까지 먹은 1학년들은 3개 뿐인 침대와 좁을 뿐인 방에 어떻게든 낑겨 잠자리에 들었다. 타키가와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2학년의 손에 이끌려 나간 뒤 소식이 없었고, 마스코는 이불 하나를 깔고, 그 위에 쿠션 하나를 벤 채로 바닥에서 잠들었다. 탄바는 본래 이 방의 2학년이 쓰던 2층 침대를 사용하기로 했다. 코미나토가 탄바 아래의 1층 침대를 사용했고, 이사시키가 마스코 옆에 이불을 깔고 잤다. 그리고 남는 좁은 바닥에서 아메나시가 자는 것이 승부의 결과였다. 합숙이 끝날 때까지 매 저녁마다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내어 결정하기로 했으니. 모두가 잠들었을 법한 세 시 쯤, 아메나시는 조용히 일어나 미리 꺼내 둔 세면도구를 챙기고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 배트 연습이라도 하러 가는지 오해하면 곤란했기에 방 안을 눈치껏 기웃거리며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밖으로 나선 것이었다. 이 새벽에 용건은 단 하나, 아까 하지 못한 샤워를 하는 것. 감독님한테 갔다왔다는 핑계로 모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옷을 갈아입고 탈취제를 뿌려 어물쩡 넘겼지만 정말로 씻지 않고 일주일을 버틸 순 없었다. 아메나시는 조용히 샤워실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 후, 주변 눈치를 살피며 살금살금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목욕탕의 물은 다 빠진 후였고, 보일러도 꺼졌는지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았기에 차가운 물로 빠르게 씻는 수 밖에 없었지만 한여름이니 만큼 그것 나름대로 괜찮은 듯 했다. 차가운 물 밖에 나오지 않았기에 절로 씻는 속도가 빨라졌고 들어간지 10분도 안 되어 아메나시는 몸을 바르르 떨며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그 15분 사이엔 아무도 주변에 오지 않은 듯 했다. 야간에 개인 연습을 하는 사람들도 새벽 서너 시까지 깨어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아메나시는 다시금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머리를 털어 말렸다. 누군가 드라이기를 가진 사람이 먼저 꼽아두고, 그것을 돌려 쓰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역시나 이 새벽엔 드라이기 같은 건 없었다. 아메나시는 수건으로 될 수 있는 한 머리를 탈탈 털려 말리고 자신이 이 시간에 마지막으로 목욕탕을 쓴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코미나토의 방으로 돌아갔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기숙사 계단을 오르자, 멀리서 유우키가 급히 방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밖으로 나설 때완 달리 유우키가 신는 신발이 제멋대로 현관에 굴러다녔다. 원래 유우키가 신발을 단정하게 현관에 모아놓고 방에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던 아메나시는 그 대신 신발을 모아 방향을 바깥 쪽으로 하여 현관 벽에 세워두었다. 고개를 들자, 원래 제 자리로 펴뒀던 현관 앞 이불 위엔 유우키가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아메나시는 잠시 현관에 선 채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죽이고 현관에 앉아 쿠션도 없이 눈을 감고 있는 유우키를 쳐다보았다. 원체 눈치가 빨랐던 아메나시는 이 일련의 변화가 말하는 결론을 알고 있었다. 하여튼, 솔직하게 그냥 같이 가자고 말하면 될텐데. 누가 오나 걱정이 되어서 따라 나온거겠지. 아메나시는 방 안으로 들어가, 원래 오늘 밤 유우키의 자리였던 침대 위에 있는 베개를 유우키의 머리 밑에 넣어주었다. 고단한 합숙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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