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常
COMMISSION2021. 1. 15. 21:08돌아가는 길 역시 고되었다. 중상을 입은 하랑과 유향은 곧 정신을 잃었고, 그 두 아이는 그에 준하진 않지만 묵직한 부상을 입은 나머지 사람들이 업고 가야할 몫이 되었다. 제키엘과 두 강화인간이 그들을 살려 보낸 일은 다행이었지만 그 뒤에 남기고 온 많은 것들이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래도 다섯 사람 중 두 사람이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들은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재단에 도착하자마자 하랑과 유향은 병원으로 급하게 이송됐고, 마찬가지로 부상을 입은 브루스와 티엔도 곧 병원으로 향했다. 그 자리에 남은 마틴은 경상으로 그들의 빈자리를 한동안 바쁘게 채워야했다.
유향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모든 일이 마무리가 되어 있었고, 티엔과의 대화 후에 그 일에 대해서 다시 거론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녀를 책망하는 사람도 없었고, 간혹 곱지 못한 시선이 꽂힐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일에 전념해야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티엔과의 관계가 약간 소원해지기도 했으나 그 일은 곧 찾아온 성탄절을 기점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들은 다시 건강한 관계를 회복했고 연말이 지나 연초가 되면서 일거리가 약간 줄어 이전에 영위했던 평범한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마음 속에는 여러가지 상념이 존재했다. 자신을 통해 얻으려 했던 헬레나의 목적과 그들이 자신을 사이에 두고 나눴던 대화, 그 후 실험 과정에서 느꼈던 의구심과 자신이 겪었던 이상현상의 궁극적인 정체 등이 그 주제였다. 그러나 떠올리려 노력할 수록 머릿속에 희뿌연 안개가 쌓였다. 그 속에서 강렬하게 보이는 딱 하나의 단어는 '안개'였다. 안개 속의 안개. 그 뒤로 자신을 찾으러 왔던 재단 사람들도 유향을 배려하여 그 때의 일을 거론하지 않았으므로 어디에 대고 상담할 곳도 없었다. 그에 더해 자신이 여전히 안타리우스를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었다. 아마 괜한 불안을 살 것이다, 라는 생각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암암리에 다른 소속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찾아와 은근히 물어댈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신경 써 준 것인지 그런 수상한 접근도 일절 없었다. 도리어 그 점이 미치도록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헬레나는 그랑플람 재단이 다녀간 후 유향을 대상으로 했던 실험을 다시 연구했다. 제키엘이 유향을 테라듀로 공격하고, 그녀는 쓰러진 유향을 데려가 구속하고 신체를 조사했다. 신체에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그녀는 미친듯이 뿜어져 나오는 안개에 손을 뻗었고, 자신의 신체 능력이 일시적으로 향상되는 반응을 확인했다. 그 뒤로 머리카락, 손톱, 약간의 살점, 구강세포 등 신체의 일부를 채취해서 특이사항이 있는지 살폈지만 별다른 사항을 확인할 수 없었다. 실험에는 공격 받았을 때의 변화를 확인하기위한 폭력이 수반되었고, 각종 약물 주사 등이 포함되었다. 외상, 내상, 그리고 기타 질병에도 '이상 현상'은 사라지지 않았고 헬레나는 특별한 결론을 낼 수 없었다. 곧 그랑플람 측에서 먼저 접근할 것이라는 제키엘의 말이 떠올랐다. 결론을 내기에는 특별한 단서가 보이지 않는데도 시간만이 급하게 흘러갔다. 반쯤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유향의 앞에 앉아 안개 속을 헤집고 있던 차에, 다시 예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며 제키엘이 실험실로 들어왔다. 그 귀청을 찢어버릴 것만 같은 웃음소리는 헬레나를 향한 조롱과 약간의 쾌감을 포함했다.
"연구는 잘 되가고 있나? 박사."
"…제키엘."
"박사치고는 보기 드문 얼굴이군. 그 자신감에 찬 표정은 어디로 간건가, 응?"
제키엘은 손으로 유향의 턱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전에 테라듀에 무참히 찔려 입에서 터져나왔던 피가 그대로 턱에 굳어 촉감이 썩 불쾌했다. 초점을 잃은 흐릿한 눈동자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제키엘은 여전히 한 손으로는 유향을 붙잡은채 반대쪽 손에 든 구겨진 서류봉투를 바닥에 앉아있는 헬레나의 앞에 떨어뜨렸다. 유향의 모의전투 기록이었다. 모의 전투에 참여한적이 몇 없기에 매우 간략한 기록이었지만 능력과 전투 방식에 대한 짤막한 평가가 써져있었다.
"이 계집애의 능력."
제키엘은 새파란 입술을 혀로 훑었다. 무엇도 담지 못하는 눈동자 속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았다. 제키엘은 등 쪽에서 테라듀 기둥을 작게 뽑아 결박된 유향의 왼 손목에 꽂아넣었다. 기력을 잃은 가느다란 손목이 기둥에 꽂힌채로 몇 차례 덜렁거렸다. 지독한 고통에 몸이 약간 요동쳤고 입에서 낮은 비명이 샜다. 기둥이 뽑힌 자리에 살과 근육이 찢어진 구멍이 남았다. 상처에서 흐른 피가 왼팔을 덮었다.
"제키엘!"
일순간에 사방이 뿌얘졌다. 축 쳐져 바닥에 떨어진 왼손에서 걷잡을 수 없이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제키엘은 붙잡은 턱을 내리고 천천히 걸어 헬레나의 앞에 섰다.
"박사. 박사는 이 안개를 몇 번이고 느끼면서도 떠오르는게 없었나? 박사라면 나보다 훨씬 이전에 알아차렸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헬레나에게 고개를 약간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안개다, 안개! 그 신비한 힘이, 아주 보잘 것 없는 정도지만 저 계집애의 손에서 재현되고 있다. 가망도 없는 시시한 변수에 언제까지 매달릴 셈이지? 우리의 거룩한 행보는,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박사는 아직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아마도 '우리들' 중 가장 가여운 자는 박사였던 것 같군, 그는 목청이 터져라 웃어제꼈다. 그는 우연히 모의 전투 기록을 얻게 되었고, 아주 짤막하게 기록된 유향의 기록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두드러지는 능력자가 아니었고 안개 능력자이면서도 전투 방식에 체술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안개에 대한 평가는 매우 짤막했지만 확실히 이능력자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크게 강화시킨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그는 일순간 세계수의 안개를 떠올렸다. 정제 방식에 따라 능력자들의 힘을 비약적으로 강하게 만들어주는, 비극의 오랜 시발점. 물론 그것이 유향이 세계수라든지, 하는 터무니없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그는 누구도 풀어내지 못한 그 신비한 힘을, 수많은 비극의 찬란한 목적을 연구하는 초석이 될 수 있다고 믿었을 뿐.
그 뒤로도 그들은 약간의 언쟁을 거쳤다. 헬레나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이상 현상에 대한 연구를 포기할 수 없었고, 제키엘은 박사의 연구가 안개 자체에 집중되길 바랐다. 그로 인해 그들은 연구의 방향성에 대한 언쟁을 종종 벌여야했다. 그리고 제키엘의 예상대로 정말 며칠 지나지 않아 그랑플람 측의 습격이 포착되었다. 제키엘은 헬레나에게 안개에 대한 것을 가능하면 많이, 남겨두라고 지시하고 레나와 함께 그들을 막으러 나갔고, 헬레나는 마지막 연구를 시작했다. 그녀는 끝까지 폭주 현상을 풀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안개가 주로 사지에서 발생한다는 것에 주목해 사지를 절단할 경우 능력이 나오지 않는지 시험하기로 했고, 마음 속에 억지로 구겨 넣었던 죄책감이 들썩거려 머뭇거리는 사이에 문을 박살내고 티엔이 들어왔다. 헬레나는 순식간에 책상 위의 보우건과 흩어진 앰플들을 낚아채 티엔에게 발사했다.
"유향을 데려가겠다."
"안타깝지만, 큰 일에는 약간의 희생이 따라야하는 법이야."
"그렇지만 그 '희생'이 유향이라는 것만큼은 동의할 수가 없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도 시퍼렇게 눈이 번득였다.
티엔은 가급적 빨리 유향을 찾아 돌아가야했다. 멀리서 소리를 지르며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때가 마침 맞아 떨어져 유향이 쏟아내는 안개가 몸에 힘을 실어주었다. 티엔은 다리에 기를 모아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헬레나는 건물 바닥에 쩌적 나는 금을 타고 간 충격파를 뒤로 점프해 피했다. 안개가 자욱해 상대가 보이지 않아 소리에 의존해야했다. 마구잡이로 앰플을 발사했다가는 다른 실험체에 영향을 주거나 연구 자료들이 망가질 수 있어 주의해야했다. 헬레나는 우선 손에 들고 있는 유향에 관한 기록집을 뺏기지 않도록 실험실 구석에 던졌다. 티엔은 상대가 한 발 더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결박된 유향에게 재빨리 다가갔다. 상대가 움직이는 소리에 헬레나는 보우건에 앰플을 장전했다. 폭발성 물질이 담긴 앰플이었다. 티엔은 유향 쪽으로 움직이다 장전 소리를 쫓아 방향을 틀었다. 그는 경공술을 써 약간 공중에 뜬 채로 앞으로 빠르게 뛰어갔고 정확히 헬레나의 위치를 돌려찼다. 자욱한 안개 속을 뚫고 갑작스레 튀어나온 티엔에 놀란 헬레나는 그대로 앰플을 발사했고, 작은 폭발음과 함께 두 사람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날아갔다. 헬레나는 손에서 앰플들을 놓쳤고, 타일에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여러번 났다. 게중에는 볼품없이 깨져서 바닥에 나뒹구는 것들도 있었다. 오른쪽 어깨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앓는 소리를 내며 한 손에 의지해 비틀비틀 일어섰다. 안개 속으로 떨어진 티엔은 그대로 일어나 유향에게 뛰어갔다. 쫓아오는 요란한 발걸음이 제법 가까워졌다. 허리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있었지만 그는 사지를 결박한 사슬을 손과 발에 기를 담아 내리쳐 부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유향을 안은 티엔에겐 헬레나와 유향의 연구 기록을 마저 처리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더 지체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그는 재빨리 문 밖으로 나갔고, 그대로 건물을 탈출해 바깥 대열에 합류했다.
이후에 헬레나는 어깨의 부상을 회복하면서 연구 자료를 계속 공부했다. 제키엘이 테라듀로 왼쪽 손목을 심하게 자극해 일시적으로 능력이 또 다시 폭주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여러가지 변수가 존재했고 무엇보다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단순 폭주 현상이었을 확률이 컸다. 능력의 근원을 제거하면 능력이 나오지 않게 되는지도 밝혀내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능력을 폭주시키는 것이 아니라 '잠재우는 것', 혹은 '제어하는 것'에 대한 답을 내지 못했다. 그 어떤 논리적인 이유도 정답이 되지 못했다. 시간은 너무나 촉박했고 그녀가 원하는대로 연구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후에 제키엘이 그녀에게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허무하게 날렸다며 질책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결국 어깨가 다 나을 즈음 그녀는 연구 자료집을 정리하며 단순한 '변칙 현상' 정도로 그 일을 마무리 했다. 기막힌 우연일 뿐이라고, 혹은 한 개인에게 나타나는 특이 체질일 뿐이라고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연구는 수포로 돌아갔고 그녀는 다시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갔다.
제키엘은 늦은 새벽에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정처없는 것처럼 느릿느릿 걷고 있었지만 사실은 목적이 있어 한 장소 주위를 빙글빙글 느리게 돌고 있었다. 기다리며 노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 헬레나는 그 연구를 포기했지만 제키엘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치르고 있는 의식과는 약간 별개의 것이었지만 안개의 비밀을 안타리우스가 쥐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무기는 없을 터였다. 숱하게 일어난 처참한 비극들의 진상. 괜한 소란을 피우면 일을 치르기도 전에 곤란을 겪을 수도 있었으니 주의해야했다. 그는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그림자 진 골목을 끼고 천천히 움직였다. 곧 이어 노란 불빛들만이 거리에 남자 제키엘은 골목의 바깥쪽으로 움직였다. 재단 건물의 입구가 보여야했다. 마침 때가 되어 다음 날의 신문을 배달하는 어린 소년이 재단의 편지함에 신문과 편지들을 꽂아넣었다. 그는 신문과 편지가 가득 든 가방을 메고 지나가는 소년을 붙잡았다. 겁박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약간의 관용을 베풀어 지폐 몇 장을 쥐어주며 말했다.
"사람을 한 명 불러주었으면 하는데."
소년은 금방 화색이 되어 다시 대문으로 향했다. 마음 속으로는 벌써 이 돈이면, 하고 떠오르는 것들이 많았다. 살아가기 위해서 새벽부터 일어나 쉴새없이 일을 다니는 어린 아이들에게 달러 몇 장은 그토록 잔인한 존재였다. 소년은 대문 너머로 사람을 불렀다. 짧은 대화가 오가고 약간의 언쟁이 있었으나 그는 곧 신경질을 내며 대문을 연 채 다시 돌아갔고, 소년은 골목 쪽을 향해 꾸벅 인사하고 얼른 사라졌다. 제키엘은 소년이 자리를 뜨자 대문이 열린 자리 옆에 서 유향을 기다렸다. 머지 않아 잠에서 막 깬 듯 몽롱해보이는 유향이 눈을 비비며 열린 문으로 나왔다.
"오랜만이군, 제물."
혀로 귀를 핥는 것 같은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그는 낮게 낄낄대며 유향이 나오자마자 그녀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표정이 굳은 유향은 약간 그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붙잡힌 손목이, 불안에 떠는 눈동자가, 심장이 터질듯이 두근거렸다. 희미하고 흐렸던 머릿 속 안개가 일순간 걷혔다.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들이 선명하게 다시 떠올랐다. 지독했던 이상 현상과 조무래기 신자를 협박했던 일, 헬레나를 만나 나눴던 대화와 갑작스러운 제키엘의 난입, 그리고 가슴을 관통했던 그 지독한 통증. 그렇게 강렬했던 목소리 마저도 잊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그만 멍해졌다. 너무 많은 것들이 한번에 떠올라 머리가 제기능을 멈춘 것 같았다.
"…겁도 없이."
"겁? 겁 먹을 일이 있던가."
그는 너털 웃었다. 불쑥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노려보는 눈이 부담스러워 유향은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짧은 새에 그녀는 여러가지 많은 것을 생각해냈다. 손과 발에서 스멀스멀 안개가 나오고 있었다. 조금씩 자신을 둘러싸는 안개에 제키엘은 입꼬리를 높게 올렸다.
"보아하니, 이제는 괜찮은 모양이군."
"알 거 없잖아요?"
"왜 아니지? 박사가 그 현상을 고치기 위해 밤낮으로 너를 지지고 찔렀는데. 안그래도 오늘도 그것 때문에 찾아왔다. 전에는 쥐새끼들이 들어왔었지."
"함부로 말하지마!"
"세계수의 안개를 알고 있겠지? 포트레너드를 뒤흔드는 그 안개 말이다… 그 안개가 궁금했다. 그러나 안개는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손에서 멀어지지……. 그리고 나는,"
기막힌 우연으로 너를 찾아냈다. 제키엘은 표정이 잔뜩 구겨진 연유의 턱을 잡고 자신을 향해 올렸다.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미묘하게 압박감을 주었다.
"그러나 전에는 다소 지나치게 굴었지. 이번엔 그럴 일 없을거다. 보상 역시 약속…"
"안 돼. 싫어요. 안 할거에요. 제정신이에요? 날 그렇게 찢어놓고 뻔뻔하게, 비켜요. 수취인이 직접 받아야한다는 비밀 소포가 당신이라면 반송하겠어. 이번만큼은 못 본 척 해줄테니 돌아가요."
유향은 붙잡힌 손목을 뿌리치고 대문 사이로 빠르게 들어갔다. 철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고, 그제야 유향은 문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지만, '만약'이라는 이름을 붙여 떠오르는 처참한 장면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다음에 다시 오지, 제물."
제키엘이 닫힌 철문의 작은 틈새로 속삭였다.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도 제키엘은 끊임없이 유향에게 접근했다. 처음에는 전처럼 밤과 새벽 시간에 주로 찾아왔지만 그 뒤로 접근이 쉽지 않자 과감하게 아침 시간에 접근하기도 했다. 그는 유향이 티엔의 제자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고 갈 수 있을 법한 장소는 한정되어 있었다. 유향은 여전히 안타리우스를 바짝 경계하고 있었고 마음 속에는 여전히 쉽사리 걷을 수 없는 두려움이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점점 제키엘의 등장에 익숙해져갔고, 횟수가 반복될수록 그녀는 천천히 예전의 여유를 되찾아갔다. 제키엘은 유향을 회유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럿 고안하고 고민했지만 그 중 뜻대로 실행되는 것은 손에 꼽았다. 그의 계획에는 이전에 없었던 상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시행되지도 못하고 무산됐다.
"전에 하던 얘기를 계속하지. 미리 말하지만 예전처럼 난폭하게 행동하는 일은 없을거다."
"나는 할 얘기 없는데요? 하랑, 이하랑! 여기 좀 와 봐!"
"제물. 지난 번에는…"
"내 이름 제물 아닌데."
"제… 후. 유향."
"이봐요, 잠시만요. 할 말만 하고 틱 가지 말고, 이제 그만 올 때도 되지 않았어요? 거기엔 절대 안 돌아가요. 더 귀찮게 하면, 저기요! 교주님!"
"나는 교주가…, 아니. 방해꾼이 오는 모양이니,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지. 그 때까지… 크큭, 그 손이나 잘 간수하고 있거라."
"아! 이제 알았다. 당신, 나 좋아하는,"
"아니다."
"저는 토끼 같은 애인이 이미,"
"아니라고."
수 차례의 접근 끝에 제키엘이 한가지 분명히 알게 된 것은 그가 생각하는 정상적이고 이상(理想)적인 방법으로는 유향을 데려갈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전의 행적을 고려하여, 그리고 피실험체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다소 평화롭고 우호적인 방식으로 유향을 데려가고자 했지만 과거의 일 때문에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비이상적인' 방법을 선택해야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비이상적인 일도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제까지의 방법이 그에게 있어서는 더할나위 없는 비이상이었지만 그는 어쩐지 망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길고 짧은 반복적인 만남 끝에 믿을 수 없는 사사로운 감정이 생긴 것은 아닌지, 제키엘은 문득 자신이 한심해 혼자 있는 방에서 자신을 비웃었다.
계획한 날이 다가와 그는 마지막으로 유향을 찾아갔다. 시간은 다시 늦은 밤이었고 그녀를 만날 계획은 이미 다 짜둔 후였다. 그는 그녀의 그 날 동선을 알고 있었고 늦은 밤에 돌아갈 예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행운이 따른 것인지 가로등도 제 수명을 다해 노란 불빛을 꿈뻑이고 있었다. 제키엘은 다소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긴채 기다렸고, 모의 전투가 끝난 지친 몸을 끌고 귀가하는 목표를 포착하자마자 빠르게 접근해 그 목덜미를 붙잡고 골목으로 끌어당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시퍼런 살기가 번득였고, 유향은 상대가 제키엘임을 직감적으로 확신했다. 잠시 불빛이 돌아와 일순간 스치듯 상대의 모습이 보였다. 등 뒤로는 날이 선 테라듀 기둥이 자신을 향해 빛나고 있었다. 유향은 자신의 목덜미를 붙잡고 벽에 처박은 손을 붙잡았다. 붙잡힌 손목부터 시작해서 한쪽 팔이 순식간에 안개에 휘감겼다.
"그 때랑은 다를걸?"
"나는 이미 너를 붙잡고 있으니… 이까짓 안개가 문제가 되지 않을거라는건 너도 알텐데."
"그 때는 그랬겠지. 지금은 아니야."
"오늘이야말로 너를 데려갈 것이다. 반항한다면 그 날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지."
서슬퍼런 날붙이가 옷에 살짝 닿았다. 아주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살을 꿰뚫을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똑바로 뜬채 제키엘을 노려보았다. 마음 속에서 잠잠해졌다고 믿었던 혐오스러운 감정들이 물밀듯 치고 올라와 그대로 게워낼 것만 같았다. 두려운 마음이 넘칠듯 흔들렸다. 그러나 분명히 상대는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를 숨겨주는 것은 안개 뿐만이 아니니까. 상대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렸다.
"말투가 평소와 다르군. 언제까지 그럴 셈이지?"
"내가 좋을 때까지."
"뭐, 상관없지. 결정해라. 고운 모습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또 다시 그 날을 반복할 것인지. 네게 선택권을 주겠다."
"돌아가겠어요."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한편, 하랑은 유향을 먼저 보내고 그 뒤를 따라가던 중이었다. 티엔은 다음 약속이 있어 한참 다른 곳으로 간 후였고 자신은 장비를 고칠 일이 있어 다른 곳에 잠시 들렀어야 했기 때문에. 한참 전에 잠들었을 늦은 시각에 느릿느릿 늘어지는 발걸음을 끌며 돌아가던 그는 골목 안쪽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옆을 따라 걷던 신령이 그에게 낮게 속삭였다. 너와 함께 수련하는 여자아이군. 하랑은 소리치며 골목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유향!"
일순간 제키엘은 유향을 놓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상대가 마주 오는 방향으로 테라듀를 내질렀고, 날붙이는 하랑의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제키엘은 바로 기둥을 거두고 물러섰다. 방해꾼이 낀 이상 더 이상의 성가신 일은 사양이었다. 하랑이 낮게 비명을 질렀고, 기둥이 빠지자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져 바닥을 굴렀다. 유향은 하랑을 부르며 급히 그를 부축했고, 제키엘은 그 눈물나는 장면에 대고 웃으며 말했다.
"너는 두번째를 선택했다, 유향. 곧 너의 선택을 거두러 오겠다."
그 뒤로 티엔은 두 제자를 먼저 보낸 자신을 자책했다. 하랑은 그런 말 말라며 너털 웃었지만 엄습하는 불안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티엔은 몇 달 전 유향을 구출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놓고 왔던 많은 것들이 후회되었다. 그는 하랑에게 유향과 항상 같이 있을 것을 지시했다.
"항상 둘이 같이 다녀라. 내가 다니고 싶지만…, 사정상 그러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
"제키엘이 다시 오는 일은… 아."
유향은 잠시 말을 멈췄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그의 이름이 낯설었기 때문에. 그러나 하랑이 동의했기에 그 일은 결국 그 뒤로 하랑과 항상 동행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 걱정과는 달리 제키엘은 한동안 찾아오지 않았고, 몰래 하랑이 약속을 어기고 유향을 혼자 둔 날에도 제키엘이 찾아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유향은 그대로 그 일을 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잊으려하면 할수록 과거의 기억이 점점 또렷해져갔다. 그렇게 믿고 기억을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었지만 왠지 불안에 가득찬 확신이 들었다. 제키엘이 세계수의 안개를 언급한 점, 헬레나와 몇가지 언쟁을 벌였다는 점과 티엔이 자신을 구하러 들어왔던 일, 제키엘이 마지막까지 안개에 집착했던 것. 떠올리면 기분 나쁜 두근거림이 이어졌고 여전히 막연한 두려움이 존재했지만 그녀는 애써 그 일을 밀어두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랜 시간 찾아오지 않았으니 그대로 자신을 포기하거나 잊었을 것이다. 자신을 대체할 누군가를 찾았을 수도 있고, 연구가 잘 되어 자신이 필요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제 괜찮을 것이다. 괜찮을 것이라고, 그녀는 막연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