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

COMMISSION2021. 1. 15. 21:06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확실해요.
혹시 그걸 의심하나요?
/스트린드 베르크作, 미스 줄리

 

   그 이후로 유향은 줄곧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주 여러가지의, 그러나 이전과는 아주 다른 생각들에. 그녀는 믿기지 않는, 잊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그러나 매우 유의미한 경험을 했고, 그로 인해서 얻은 상처들은 빠르게 아물었지만 머리에 각인된 여러가지 가능성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헬레나는 어떤 의미있는 결과를 얻었을지 모르지만 정작 고통에 몸이 찢겨나가는 며칠을 보냈던 자신의 머릿속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 나름대로 떠올리려고 갖은 노력을 해도, 싫은 기억만 와르르 쏟아졌다. 그러나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잔인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에겐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제키엘이 갑자기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것, 그리고 결박되어 있는 자신을 억지로 떼어내가려 한 것, 그리고 긴 언쟁 끝에 결국 돌아갔던 일. 고막이 파열되고 시야가 흐려진 상태였던 자신의 기억 속에 남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분명 어떤 대화를 했겠지만, 그 대화에 모든게 들어있겠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제대로 기억나는 말이 없었다. 단지 그들이 수백번도 넘게 외친 '안개'라는 단어만이 머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그야 안개가 그렇겠지. 나는 안개 때문에 그 자리에 갔는걸. 마치 영화처럼, 그 당시에 방 가득 자욱하게 자신의 안개가 깔려있어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그녀를 한층 더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 밖에도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그녀 때문에 밀려버린 일들을 수습하고 도우러 다니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따라서 티엔이 염원했던 그녀와의 평범한 일상을 되찾는데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다.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고, 흉터가 아물고, 생각을 정리하고, 밀린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분명 하루 아침에 끝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기나긴 일상의 공백 속에 티엔은 남 모를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허탈, 무상감 같은 모든 허무한 감정이 노력, 시간, 믿음 같은 것에서 오듯이, 그런 회의감 역시 함께했던 시간과 깊은 유대감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시간은 눈 깜짝할 새 흘러서 거리엔 눈이 소복히 쌓이고, 다들 겨울 옷을 꺼내 입으며 차가운 손에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재빨리 걸어가는 겨울이 왔다. 연말을 맞아 재단 일은 매우 바빴고, 그 바쁜 일엔 티엔은 물론, 유향도 자유가 아니었다. 유향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죄책감에 특별히 열심이었고, 자연스럽게 전에 가졌던 한가한 티타임도, 어떤 실없는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그 외에도 그녀는 한참 멀리 동떨어진 생각에 잠겨있으므로, 일부러 시간을 빼내어 찾아가는 일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은 어쨌든 성탄절이었고, 그 말인 즉슨, 왠지 모를 분위기에 다들 취해 느슨해지는 날이었다. 이날만큼은 거리의 캐롤에 취해 짐을 좀 적게 옮기더라도, 난리법석을 떨며 신난 아이들 사이에 끼어 성탄절 장식을 흔들다 약간 지각을 하더라도 누구도 나무라지 않는 날인 것이다. 따라서, 유향은 슬쩍 옮기고 있던 짐박스를 가판대 아래에 밀어넣고 주위 눈치를 살피다, 아주 오랜만에 티엔을 찾아갔다. 아주 잠깐 갔다오는 것 정도는 상관 없을 것이다. 미리 사둔 디저트와 차 티백을 담아둔 종이가방을 챙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유향은 쏜살같이 달려 티엔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얼른 주고, 얼른 돌아가서, 얼른 일을 마치고, 얼른 돌아와 '오늘만큼은' 그와 함께 있을 작정이었다.

 

   "또독, 똑. 들어가요?"

 

  그녀의 노크소리에는 약간의 음조가 실렸다. 한껏 심란한 얼굴로 서류를 찢을듯 노려보고 있던 티엔은 고개를 들었고, 금세 손님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그는 불편한 한숨을 폭 내쉬고, 이번만큼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의 반응을 기대했던 유향은 잠시 문 앞에서 갸웃거렸고, 실눈을 뜨고 방문을 노려보더니 없나? 라며 문을 열었다. 마주친 두 눈.

 

   "뭐야, 있었으면 말을 하지. 티엔! 이거 봐요. 오늘 같이 먹으려고 사온거."

 

   유향은 티엔이 앉아있는 책상으로 돌진해 종이가방을 보였다. 가방 안에는 큰 맘먹고 산 디저트들과 차들이 가득했다. 거기에는, 만국 공통의 거대한 기념일을 즐겁게 보내고 싶은 마음과, 저번 일에 대한 미안함과, 그 동안 보지 못한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디저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위주였지만, 티백은 대부분 티엔이 좋아하는 종류였으니까. 물론, 그들은 천천히 서로를 닮아갔기 때문에 상당히 넓은 교집합이 그에 포함되어 있었다. 티엔은 유향이 내민 종이가방을 흘겨보더니, 살짝 밀어냈다. 화가 난 마음에 쳐서 떨어뜨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까지는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동안 열심히 모르는 척 하더니, 이제와서 성탄절을 같이 보내자고 말하는군."

   "네? 아니, 모르는 척? 그런 적 없는데."

 

   티엔은 당황한 상대의 눈을 피했다. 아무데나 시선을 처박고, 그는 무슨 일이냐며 캐묻는 말을 모르는 척 흘렸다. 무슨 일이 있던게 아니니까. 나는 단지, 네가 오지 않았던 긴 시간이 미칠듯이 지루했을 뿐이니까. 그 무료함 속에서, 남 모를 불안감에 시달렸을 뿐이니까. 무엇이 잘못됐을지 정답 없는 고민을 하느라 진이 다 빠졌을 뿐이니까. 사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이, 그다지도 짜증나고 싫은 일이었을 뿐이니까, 네게 어떤 투정을 부리고 싶었을 뿐.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이상한 상상에 빠져있었다. 사실은, 자신이 은연중에 저지른 실수 때문에 괜히 사이가 멀어졌다는. 무엇이 잘못인지도 몰랐던 그는 어떻게 해결해야할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리도 허무하게, 성탄절이라며 간식과 차를 가득 들고 들어오는 널 보고, 어떤 위안감과 함께 말로 할 수 없는 허탈함을 느꼈을 뿐. 티엔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상대가 미워서, 이 상황이 싫어서 라기 보다는, 거기에는 어떤, 자신에 대한 한심함과 무력감을 포함했다. 네가 없는 나날이 이다지도 무력하다니. 그는 잔뜩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휩싸였다.

 

   "네가 통 오질 않아 내게 화가 났거나, 아니면 내가 무언가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엥, 그런 적 없는걸! 솔직히 미안해야할 사람은 완전 저인데."

 

   그는 남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어떤 자신이 모르는, 아마도 평생 모를 이유에 그들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이 관계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까봐. 그로써 다시는 너와의 성탄절을 즐길 수 없을까봐. 그것이 거슬릴 정도로 불안했을 뿐. 그러나 그는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자존심과 관련된 일일수도 있고, 혹은 입 밖으로 낸 일의 실현이 두려웠던 것일수도 있다. 아님, 단순히, 왠지 네가 나의 한심한 고민같은 것을 알지 못했으면, 하길 바랬던 것일수도.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곰팡이 슨 벽지에 시선을 박고 있는 티엔을 본 유향은, 더이상 웃지 않고 종이가방을 책상 아래에 내려놓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반사된 눈이 약간, 반짝였다.

 

   "내가 티엔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럴리가 없잖아요. 아니, 좋아한다는 말도 모자란 것 같아. 사랑한다고 해야하나? 티엔, 물론 제 마음을 뚜껑 열고 보여줄 순 없지만 내가 많이 사랑한다는거 티엔도 알잖아요."

 

   티엔은 그 말에 돌렸던 시선을 유향에게 맞췄다. 다시 눈이 마주쳤고, 그제야 유향은 다시 웃으며 내려놓은 종이가방을 들어 안에서 디저트 상자를 열었다. 예쁘게 일렬로 포장된 마카롱과, 예쁜 일회용기에 담긴 머랭 쿠키들. 아몬드가 들어간 초콜릿들과, 작은 머핀 몇개. 유향은 종이가방을 기울여 그 안으로 보이는 차 티백들도 슬쩍 보여주었다.

 

   "그동안 안온건 일이 바빠서였어요. 저 때문에 티엔도, 하랑도 재단 사람들 다 바빴잖아요. 제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요. 그래도! 오늘은, 저 이제 곧 일이 끝나거든요. 오늘만큼은 조금, 덜 해도 이해해주실거니까. 엄청 빨리 끝내고 돌아올테니까, 끝나고 돌아오면 이거 같이 먹고, 차 마셔요."

 

   유향은 끝까지 웃어보이는 일에 성공했다. 물론, 일이 바빴던 것이 티엔을 찾아오지 않은 표면적인 이유에 해당했다. 그러니 거짓말은 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녀에게는 좀 더 마음이 어지러웠던 이유가 분명히 존재했다. 예를 들면, 붙잡혀 있었을 때의 일과도 같은 것들. 안타리우스와, 헬레나가 자신에게 협조한 이유, 제키엘에 대한 것과 앞으로의 방향에 관한 일들. 여러가지가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기에 남을 마주할 여유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안의 이유였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내색하지 않는 것에 성공했고, 결국 티엔의 옅은 미소를 따내고 말았다. 그녀는 꺼내서 보였던 포장된 디저트들을 도로 종이 가방에 넣고, 책상 밑에 비스듬히 걸친채 쏜살같이 다시 달려나갔다. 이유가 어찌됐든 오늘만큼은 그냥 잊어버리고 싶었다. 시간은 이제 앞으로도 쏟아질 것이니, 복잡한 고민들은 미루면 그만이었다. 그런 시시한 고민을 하느라 시간을 버리기에는, '성탄절'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들뜬 분위기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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