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S(上)
DREAMING/SLAMDUNK2023. 3. 19. 05:47생존 43일 차의 일이었다.
북산의 거처가 습격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우연은 아니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좀비들은 떼거지로 일제히 몰려 와 난동을 부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쉘터가 무너지는 일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정말이었을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 가운데 오래 전에 누군가가 감염되었고 그것을 모른 채 방치하다가 내부의 적에 몰살 당했다는 모양이었다. 사실이 어떻든 당장에 피하지 않으면 안 됐다. 오래도록 모으고 아껴서 꾸려왔던 살림들을 전부 다 버리게 되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생존 20일 쯤에 탈취한 대형 버스를 통해 도주하여 북산은 전원 생존했다.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채로 살아 도망친 것도 생존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 상처는 정대만의 것이었다. 알고 있었던 건 권준호 뿐이었다. 정대만은 채치수에게 조차 이 일을 말하지 않았다. 채치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안고 있었고 그에게 이런 무거운 소식으로 짐을 더해줄 순 없었다. 정대만은 태평한 얼굴로 권준호에게 자신의 부상을 전했다. 죽음이 목전에 오면 오히려 초연해진다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그때 버스 문을 깨려는 놈을 떨어트리다가 물렸어."
"그럴수가……"
"채치수에겐 비밀이다. 치수에겐 지금 힘든 짐이 너무 많아."
충격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권준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감염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순 없었다. 내부의 적을 방치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들 자신이 제일 잘 알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을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너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그런 고민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정대만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적당히 정리하고 이곳을 떠날 거야."
"…대만아."
"어쩔 수 없잖아, 너희를 전부 다 위험하게 만들 순 없으니까. 그리고……"
팔을 물어 뜯긴 그 순간에 정대만은 떠날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떠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묵직한 짐은 몇 가지 남아 있었다. 재난이 시작되고 모두와 함께 생존해 나가기로 한 이후로 북산은 서로 의지하며 오로지 절망만이 남은 세계에서 희망을 찾아냈지만 그곳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솔이는, 어떻게 하려고 그래……."
"솔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해줘야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왜인지 서글펐다.
사태가 발발하고 나서 한동안 혼란으로 가득 찼던 도시는 며칠 간의 소요 사태를 거쳐 무질서 속 질서를 갖춰갔다. 도시에는 빠르게 무리가 생겼고 아무도 말로 설명하지 않는 불문율이 생겼다. 그리고 한솔은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길거리 음악가들이 살아가는 골목의 아지트에서 생활했다. 사태가 최초로 발발했던 그 순간에 한솔은 공연 중이었고 어딘가로 따로 갈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그대로 그들과 뭉쳐 지내게 된 것이었다. 크게 불만은 없었다. 곁에는 항상 함께 했던 밴드 멤버들이 있었고 친하거나 사적인 교류가 있진 않았지만 음악 활동으로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때론 위안이 되는 순간들도 있었고, 가끔이지만 함께 웃는 시간들도 있었다. 살아서 내일 해를 볼 수 있을지 조차 모르는 그런 상황 속에서 음악이란 참 무용하고 시덥잖은 꿈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겐 백 마디 말보다, 가끔은 살아가는데 가치있는 것들 보다도 위로가 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물자를 구하러 나갔던 사람들이 다른 구역의 생존자들에게 붙잡히는 일이 벌어졌다. 그들은 한솔의 밴드 멤버였던 두 사람을 인질로 하여 가지고 있는 물자와 지내고 있는 생활 거처를 요구했다.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인질을 죽이겠다고. 한솔은 그 두 사람을 구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어젯밤까진 그다지도 다정했던 아지트의 단 한 사람 조차도 그들을 도우러 가야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남아있었던 다른 멤버들 조차도. 한솔은 그들을 구하고 싶어서 온 도시를 이잡듯 돌아다니며 교섭이 될만한 물건들을 구해왔지만 아지트에 돌아온 한솔에게 온 찢어진 택배 상자 안에는 거칠게 잘린 친구의 손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그들의 것이었다. 그것을 한솔은 아주 잘 알았다.
"……."
"…저, 솔아."
충격이 너무나도 커서인지 오히려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한솔은 지금 제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음을 알았다. 택배 상자를 보고 있던 제게 다가온 것은 살아 남은 밴드 멤버였다. 그는 천천히 한솔에게 다가갔다. 한 발, 한 발.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그 발걸음은 한솔을 향하고 있었다. 그 얼굴엔 충격도 공포도 없었다. 어딘가 넋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을 하곤 그는 제게 다가오더랬다. 딱 두 발 자국 거리가 됐을 때 그는 등 뒤에 숨긴 칼을 한솔에게 휘둘렀다. 진심으로 심장을 찌를 생각이었다. 한솔은 메고 있던 기타 가방을 휘둘러 칼을 막아냈다. 가방이 북 갈라져 들어가며 속에 있는 물건을 마구잡이로 찢어댔다. 그는 한솔이 며칠 밤낮을 모아 온 물자를 내놓고 가라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소리질렀다. 여기서 벗어나야 돼. 한솔은 가져 온 물건들이 든 배낭을 힘껏 멀리 던졌다. 그는 던진 장난감을 쫓는 개처럼 칼을 내던지고 날아가는 배낭을 쫓아 달려갔다. 한솔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한참을 달렸을까? 전혀 모르는 동네까지 뛰어들고 나서야 한솔은 발을 멈추고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잠시 느슨해진 긴장감에 힘이 탁 풀렸다. 그제서야 제가 보고 겪은 모든 일들이 떠올랐다. 먹은 것도 없는 입에서 위산을 가득 토해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충격에 생각을 강제로 멈춘 머리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죽었을 것이다. 죽지 않았더라도 잘린 손을 보면, 죽음보다도 못한 삶에 처한 것이 틀림 없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니 온갖 게 다 후회로 돌아왔다. 그들을 처음부터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 전에 이런 아지트에 모이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러고보면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짜여진 일처럼 돌아갔다. 당번은 항상 그들에게만 돌아갔고 그 중 열외되는 대상이 한 명 있었다면 마지막으로 한솔에게 칼을 겨눈 그 사람 뿐이었다. 그게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함께 노래했던 사람들이기에 믿고 앞장을 선 것이 모든 일의 씨앗이었다.
모든 책임은 혼자 살아 도망친 한솔의 것이었다. 핏빛 하늘, 먼지 바람, 죽은 벌레 소리와 떨어지는 별, 죽음으로부터의 발자국. 모든 것들이 그를 책망하고 있었다. 넌 아무것도 막지 못했어. 그 책임은 오롯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웠다. 그 무게가 버거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는 수중에 있는 방법 중 가장 편한 방법을 선택했다. 죽은 사람에게 무슨 책임이 남는단 말인가? 그는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마침 도처에는 죽을 수 있는 방법이 널리고 널렸다. 다 무너진 건물에 올라가서 투신해도 될 것이고, 저기 멀리 보이는 바다에 걸어 들어가도 될 것이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아무 물건이나 주워서 심장을 찔러도 되고 그 많다는 좀비를 불러들여서 제 몸을 물어뜯게 놔둬도 될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은 그것이 줄 해방감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가벼웠다. 한솔은 진실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한솔은 숱한 방법 중 가장 그다운 방법을 골랐다. 그는 이미 다 망가진 기타를 들고 공터로 갔다. 다 시든 회색 잔디나 무너진 조형물들을 보아 아마 이곳은 한때 공원이었겠지. 한솔은 그곳에서 마지막 공연을 열기로 했다. 이젠 스틱을 두드려 내는 시작 신호도, 그를 받쳐 주었던 베이스 소리도, 함께 화음을 맞췄던 기타 소리도, 독특한 음색을 내는 피아노 소리도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한솔은 그들이 이제껏 몇 번이고 소리를 맞춰왔던 곡들 중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골랐다. 기타줄을 누르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잔뜩 뭉개지고 엇나간 기타 선율에 그는 목소리를 입혔다. 마이크가 없어도 사방에 있는 좀비를 불러들이기엔 충분했다. 손이 마구 떨려서 더 이상 기타를 칠 수 없었던 한솔은 그저 기타를 품에 안은 채 저를 향해 돌진하는 땅울림을 반주 삼아 노래했다. 죽음은 확실하게 한솔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에서 한솔을 건져 낸 것이 바로 정대만이었다.
정대만은 일단 상처를 숨겼다. 권준호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떠나기 전까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달라고. 권준호는 정말로 그 비밀을 지켰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지독한 상처가 될 지라도 정대만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상처를 숨긴 채 정대만은 그 이후로 대부분의 시간을 한솔과 보냈다. 정대만은 정말로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솔의 곁에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변화가 의심스러웠지만 기꺼운 것도 사실이었다. 한솔은 그 뒤로 지독하게 앓았으니까.
정말로 죽을 생각이냐며 억지로 손목을 이끌려 이곳에 왔지만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된 한솔에겐 북산에서 생활하는 것이 두렵기만 했다. 그 어떤 친절도 믿을 수 없었던 한솔은 한껏 가시를 세워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곁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정대만이 유일했다. 한솔은 자신을 죽지 못하게 만든 정대만을 미워했지만 동시에 제게 다시 삶을 준 정대만을 사랑했다. 그 삶에 붙일 핑계가 없다면 그 이름을 대면 되었다. 정대만이 죽지 못하게 만들어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사실은 누구보다도 살고 싶어했던 자신에게 그렇게 거짓말했다. 그 미움을 마주보는 것도 사랑을 묻어두는 것도 하지 못해서 한솔은 어떤 날엔 증오를 쏟아내고 어떤 날엔 애정을 갈구했다. 제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꼴사나웠지만 정대만은 싫은 소리 한 번 없이 그의 투정을 받았다. 그런 음울하고 지독한 관계가 유지되는 만큼 한솔의 삶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