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월반생
COMMISSION2021. 5. 6. 21:48자캐 커뮤니티 신청서 성격란 대필
그 3학년엔 이전에 조기 입학한 남학생이 있더랬다. 상당히 괴짜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으나, 정작 본인은 소리소문 없이 살아가는 걸 원한다고 했던가. 그는 대체로 조용했다. 얌전하고, 또 고요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죽은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본디 소리 없이 타는 불꽃이 가장 큰 재앙이라고 하였다. 그는 분명 이 근처에서 가장 거세게 불타는, 막을 길 없는 지옥불일 것이다. 모든 것을 살라버리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는 가장 악독한 재난이었다. 타고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이미 발 끝에 불이 붙어있게 하는, 가장 잔인하고도 위험한.
소년은 말이 없는 만큼이나 표정도 없었고, 따라서 뭘 생각하고 느끼는지 유추하기 어려웠다. 그저 어딘가를 항상 가만 노려볼 뿐이고 누가 다가와도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런 그가 무엇을 표현하고 인간다운 감정을 내보일 때는 오로지 시비가 걸려 선악과 승패를 가려야할 때 뿐이었다. 그럼에도 누군가 집요하게 캐묻는다면 소년은 돌려 말하는 일 없이 하고싶은 말을 곧이 곧대로 꽂았다. 창처럼 꽂히는 말들은 항상 상대방의 싫은 곳을 푹푹 찔러댔다. 그러니 소년을 고깝게 보는 이들도 꽤 되었다. 안 좋은 소문이 돌아도 그 뿐이라는 듯 그 태도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지만.
그 괴팍한 성격의 기저에 깔린 것은 자신이 세상의 정의라는 지독한 오만함이었다. 오물로 가득한 지저분한 세상에서 스스로 생각하길, 그는 홀로 고결한 선이었다. 그는 이것이 자만이요 곧 거만함임을 알았다. 그랬기에 그는 요란한 성질머리에 비해 조용했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주저없이 본인이 질서라고 말하겠으나, 동시에 묻지 않는다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느샌가 이 세계의 유일한 순백으로서 어둠으로 가득찬 더러운 세상을 관망하는 것을 즐겼다. 그 속에서 느껴지는 은밀한 우월함에 취해서….
그러나 정의를 추구하는 자들이 맞는 시련이 으레 그렇듯 지천에 흐르는 악의 물결에 반하는 이를 세상은 편히 두지 않았다. 그가 걷는 길엔 언제나 파란이 일었고 기어이 폭풍우가 쳤다. 그 출발은 항상 폭력으로, 제게 주먹을 휘두르는 이가 있다면 소년은 반드시 맞받아쳤다. 그가 내지르는 주먹은 항상 급소를 쓰리게 쑤셔댔고 그렇게 불화를 만드는 것이 일상이 된지 오래였다. 그 모든 불화는 도처에 존재하는 죄인들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기어코 이 세상의 끝에서 모든 악을 토벌해 내리라고 마음 먹은 듯 했다. 그 기준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정의인 소년 자신만이 선악을 심판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일은 반드시 옳은 이치대로 돌아가리라(事必歸正). 이 오염된 대지에서 그는 필시 투명한 꽃을 피워내는 물(湯)이 되리라. 그리하여 이 세상을 정화하리라. 그것이 소년의 유일하고도 지고지순한 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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