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실
DREAMING/LIMBUS COMPANY2023. 5. 6. 02:15
불안한 악몽을 꾸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혹은,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꿈, 이 공간에 존재하는 색이라고는 단 두 개다. 벽을 온통 뒤덮은 청색. 그리고 흔들리는 적색. 청색 가운을 입은 사람의 형체가 흔들거린다. 희뿌연 시야 속에서도 항상 또렷했던 붉은 사과보다도 선명하게 그 몸이 보였다. 그를 이루는 색채는 매우 단조로웠다. 머리칼은 칠흑색이고, 눈은 짝짝이다. 한쪽은 머리카락보다도 짙은 검은색이고 반대쪽은 타버린 하얀색이다. 피부는 밀랍인형 마냥 창백했다. 표정 없는 얼굴은 이쪽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보이지 않았을 색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필시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듯한 사람이어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왜인지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처음 보는 것이 틀림 없을 그의 이름이 입 안에서 달싹였다. 왜 당신의 이름을 알 듯 한 기분이 드는거지? 나는 차라리 당신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길 바랐다. 그러나 기쁨도 슬픔도 없는 그 탁한 눈에는 마주 선 내 모습 조차 비치지 않는 듯 했다. 그는 끈에 매단 사과를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나는 이곳을 나가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다. 팔을 뻗어 무기력하게 흔들리는 사과를 조각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이쯤되면 그 잘난 목소리로 지겨운 설명을 반복했어야 했는데. 사람인 것으로 보이는 그 형체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손에 묶은 끈만을 흔들었다. 당신은 알고 있기라도 한 걸까? 사과를 맞춰 잘라내기만 하면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간단한 사실 쯤은 진작에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이해를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의 의문은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것이었다. 진자처럼 흔들리는 사과를 따라서, 내 눈알도 똑같이 진자 운동을 한다. 마침내 이해하기를 포기하려던 그때. 나는 한 가지 발칙한 생각을 해냈다. 하릴없이 흔들리는 이 사과가 아니라 만약, 그 너머의 당신을 꿰뚫는다면. 이 악몽은 끝이 날까.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만 제대로 기억이 난다. 팔을 휘두른 그 순간에 알았다. 나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언제였을까, 악몽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미 현실의 한 가운데였다. 내가 꿰뚫은 것은 사과보다도 붉은, 당신의 심장이었다.
늦은 새벽 겨우 잠든 로드릭은 앓는 소리에 깨어났다. 창 밖은 여전히 어스름달이 떠있어서. 벽에 걸린 시계를 봐도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인 것을 알았다. 시계 밑에 걸린 달력을 보고 알아차렸다. 오늘은 성탄절. 그레고르와 함께 도망치고 약 5년이 되도록 한 번도 챙기지 않았다. 그 흔한 선물, 케이크 한 번 사지 않았던 겨울의 어느 날. 로드릭은 멍한 정신으로 옆에 누운 그레고르를 내려다보았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아니면 어딘가 아프기라도 한 건지 답지 않게 앓고 있었다. 로드릭은 그를 깨울까 말까 고민하다 뒤척임이 심해지자 그의 어깨를 살짝 붙잡고 흔들었다.
"그레⋯"
그레고르가 몸을 벌떡 일으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어깨에 손이 닿자마자 눈을 번쩍 뜬 그레고르는 그대로 왼손으로 로드릭의 목을 붙잡아 바닥에 처박았다. 몸이 뒤엉키면서 잠자리 옆에 펼쳐 둔 테이블이 엎어지며 위에 둔 물건을 바닥으로 쏟아냈다. 닳은 볼펜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쓰러지면서 탁자에 머리를 부딪힌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군인의 억척스러운 손은 얄쌍한 의사의 목을 쥐어잡고 힘줄이 돋을 정도로 거세게 졸랐다. 확실한 적의를 느낀 로드릭은 제 목을 붙잡은 손을 두 손으로 잡고 떼어내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진심으로 저를 죽이려고 하는 그레고르를 힘으로 당해 낼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살기 위해서 손에 닿는 무엇이라도 붙잡고 그를 때릴 각오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모든 일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정상적으로 사고하기 이전에 숨이 막혀왔고, 끔찍한 통증이 찾아왔으며 죽음으로의 공포가 엄습해왔다. 차갑게 내려다보는 그 눈은 명백하게, 로드릭을 죽일 셈이었다. 그레고르는 목을 쥔 반대편 손을 높게 치켜들고 절규했다.
이딴 건 원한 적 없어!
그리고 로드릭을 향해 그 칼을 찍어내렸다.
그레고르가 꿈에서 깨어난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그레고르는 진심으로 그 심장을 꿰뚫을 생각이었으나 천만다행으로 그 칼이 관통한 것은 바닥이었다. 참기 힘든 공포가 느껴져도 로드릭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목은 그때까지도 있는 힘껏 졸리고 있었고 거기서 더 힘을 줬다간 그대로 터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대신 아프다는 말을 했다. 그마저도 다 꺼져가는 목소리를 겨우 짜낸 거였지만.
"아, ⋯파,"
개미만한 목소리였을텐데도 그를 깨우기엔 충분했는지 직후에 목을 조르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리, 릭⋯"
로드릭은 저를 향해 다가오는 손을 저도 모르게 매섭게 쳐냈다. 그를 원망하기 보다는 그 손이 다시 저를 옥죌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로드릭은 그레고르가 상처 받을 것이 염려되었다. 그는 빠르게 변명하듯 덧붙였다.
"⋯괜, 콜록. 찮아."
마른 기침이 말 사이 사이로 끼어들었다. 살기로 번득이던 그 눈이 두려워서 로드릭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래도 입 밖으론 다정한 말들이 멋대로 튀어나갔다. 이렇다 저렇다 해도, 로드릭은 그레고르가 걱정됐다.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그레고르는 대답을 대충 얼버무렸다. 안 좋은 꿈을 꾼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런 건 새까맣게 잊을 정도로 가슴 속이 요동쳤다. 이제까지 사람은 숱하게 많이 죽여왔는데도 단 하나의 살인미수에 심장이 떨려왔다. 명백한 살의였다. 그는 그 순간만큼은 기계적으로 심장을 꿰어 낼 뿐인 벌레 군인이 아니라 스스로 사람을 죽이길 선택한 살인자였음을 알았다. 슬쩍 곁눈으로 흘겨 본 그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맹수 앞의 작은 동물처럼 벌벌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기어이 목엔 벌건 손자국이 남았다. 양쪽으로 조금씩 난 손톱자국에선 피가 살짝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미안해서 그만 눈을 돌리고 말았다.
그날은 성탄절이었다. 그렇게 저주스러운 성탄절은 처음이었다. 휴일이라서 꼼짝없이 집에 묶여 있어야 하니까. 로드릭이 쉬겠다며 방 안으로 들어간 후에 그레고르는 거실을 왔다갔다 하며 손톱을 씹었다. 겁에 질려서 이쪽을 보던 눈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로드릭은 평생을 아파 본 일이 없는 도련님이었다. 그는 군의관 답지 않게 상처에 약했으며 아픈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것이 몸에 남든 마음에 남든 작은 상처도 로드릭은 참기 힘들었고 그래서인지 그는 단 한번도 전선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다치는 것이 끔찍하리만큼 힘든 그에게 죽음이 목전으로 다가왔는데도 악몽이라도 꿨느냐며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걱정을 건넸었다. 그 다정이, 이쪽을 보지도 못할 정도로 겁에 질린 그 눈이 아파서. 결국 자기 전에 그레고르는 그 문을 두드리고 말았다.
조금 기다리자 문은 조용히 열렸다. 문 뒤에는 어두운 표정의 로드릭이 서 있었다. 그가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걸 알아차렸지만 못 본 척 했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게 설령 원망일지라도 목소리 한 번을 듣기 전까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욕을 해도 좋으니 아무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아직까진 되돌릴 수 있다고. 어쩌면 로드릭이 그다지 심하게 상처받진 않았을지도 몰랐다. 목에 난 손자국은 하룻밤이면 없어질 것이고 상처는 며칠이면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그저 악몽 같은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을지도 몰라. 그는 그런 식으로 죄의식 위에 얄팍한 기대를 덧씌웠다. 방 안으로 들어가는 그레고르의 손에는 약 상자가 들려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덧바르고 덮어내면 없던 일이 될 것만 같아서. 사실 그 일이 있고 난 직후에 약이라도 바르자고 했었지만 로드릭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새벽에 났던 상처는 그대로 벌겋게 부어 올라있었다. 그레고르는 한사코 괜찮다고 하는 로드릭을 앉히고 구급상자를 열었다. 로드릭처럼 박식하진 않더라도 그레고르 역시 군인이었고 응급처치엔 익숙했다. 익숙했는데도 왜인지 손이 떨려왔다. 이제껏 봐 온 숱한 부상들에 비하면 이 정돈 날벌레에 물린거나 마찬가지인데도. 그건 죄책감 때문일까. 아니면, 눈 먼 소중함 때문일까.
"안 해도 괜찮은데⋯⋯."
"안 돼. 그냥 두면 덧날거야. 흉질 수도 있고."
그는 최대한 꼼꼼히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발랐다. 로드릭이 움찔 거리는 것이 보일 때마다 그 역시 조금씩 움츠렸다. 아파서 그런거겠지. 조금 따끔거리는 정도일 거라고 속으로 위로하기가 무섭게 꽉 쥔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잔뜩 뻣뻣하게 굳은 채로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애써 모른 척 했다. 정말이지, 그 모든 순간들이 심하게 아팠다. 로드릭도, 그레고르도.
넓은 밴드까지 붙인 후에 그레고르는 상자를 정리했다. 그는 모든 작업을 최대한 느리게 했으나 상자를 닫은 이상 그 방에 더 있을 수는 없었다. 용건은 끝났고 그에겐 입이 있어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바로 나갔어야 했지만 왜인지 그대로 방문을 닫고 나가버리면 영영 그를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레고르는 필사적으로 붙일 말을 찾아 헤맸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좋으니 뭐라도 말을 뱉어야만 했다. 그는 고독이 두려웠고 로드릭에게 미움받는 것은 더더욱 괴로웠다. 실없는 말이 마구 차올라서 쏟아지려고 하는 그때에, 로드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화는 좀 풀렸어?"
다만 나온 말은 몹시 의외여서. 저도 모르게 반문이 튀어나갔다.
"뭐? 화? 내가?"
"이런 건 원한 적 없다며. 그 기술을 개발한 건 나니까⋯ 너한테는 그게 싫었겠지."
그런 말을 했던가?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잠결에 화가 나서 내뱉은 말인 것 같았지만. 그레고르는 그것이 제 본심임을 인정했다. 그는 한 차례도 원한 적 없었고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분명 지금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제 반쪽 팔이 몹시도 싫었다. 그리고 그 팔을 만들어 낸 것이 로드릭인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레고르는 로드릭이 이런 현실을 바란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는 그저 인체의 한계를 확장시키는 방법에 흥미가 있었고 그런 기술이 개발된다면 분명 인간 사회가 좀 더 풍요로워 질 것이라고 믿었다. 어떤 기술이든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할지는 인간이 정한다고 하질 않던가. 그는 제가 발명한 이 기술이 연기 전쟁을 발발 시킨 것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그 전쟁의 이름을 제게 새겨진 죄로 여기는 그에게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 난 그런게⋯"
"원하면 언제든 화풀이 해도 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목에 붙은 밴드를 만지작 거렸다. 그 눈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치 꿈속에서처럼. 확실히 그는 오늘의 일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어딘가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마치 죄를 덜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느꼈던걸까. 오히려 그는 그레고르가 가끔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책망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욕이라도 들으면, 얻어 맞기라도 하면. 분명 그곳에 존재하는 죄가 조금이라도 덜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레고르는 그 순간에 로드릭이 저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았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제 손으로 사지로 몰아넣은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그저 닿지도 않을 사과를 웅얼거렸다.
"⋯미안,"
손자국은 로드릭의 목에 났고 흐르는 피는 그의 것이었으며 고통 역시 그의 몫이었지만 왜인지 있지도 않은 상처가 아려왔다. 어쩔 도리도 없이 아프게.
잠을 못 이루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성탄절이 지난 늦은 밤에 로드릭은 어김없이 그레고르의 옆에 와 누웠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서 반사적으로 자는 척을 한 탓인지 이불도 들추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웠다. 그는 아주 오래 뒤척였지만 동이 틀 무렵엔 잠에 든 것처럼 보였다. 인기척이 멎자 그레고르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옆에 누운 이를 쳐다보았다. 저를 등진 채 누워있는 그는 이불 끝에 발을 넣고 새우처럼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품에 꼭 안고 있는 고양이 인형의 뜬 눈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왜 불쌍하게 저러고 누워서 자는거야. 행여라도 말로 뱉진 않았다. 그는 잠귀가 매우 밝았고 아주 조금의 소리에도 곧잘 깨곤 했으니까. 말을 하는 대신 그레고르는 제가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 로드릭에게 덮었다. 못내 신경이 쓰여 고개를 살짝 뻗어 보니 생각했던대로 손자국은 이미 희미하게 된 후였다. 다행이다. 하지만 왜인지 한 번, 두 번 눈을 깜빡이면 여전히 목이 붉은 것처럼 보였다. 숨이 콱 막혀왔다. 그의 목을 조르는 것은 없었는데도. 그레고르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평소보다 이른 출근을 하게 될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