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등불

BELOVED/FF142021. 4. 26. 04:50

   영웅은 나날이 지쳐갔다. 제가 하는 일이 어디에서나 옳은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난 후로는 더욱이 그랬다. 영웅은 빠르게 소모됐고, 이슈가르드에 도착할 즈음엔 이미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그래도 티낼 순 없었다. 곁엔 절망에 가득 찬 알피노가 있었다. 알피노가 절망의 한 구석에서, 그리고 곁에 없는 이들이 온 마음을 다해 믿고 있는 것은 그였다. 오로지 그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는 하나의 구심점이 되어 모두를 지탱하고 있는 가장 단단한 기둥이었다. 그러니 어찌 입 밖으로 내겠는가. 힘들다고. 지치다고. 그만두고 싶다고.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건 죄와도 같았다. 이것은 주제도 모르고 영웅이 된 값이었다. 그는 그 값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니 한 차례도 그런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은 채 도망치듯 이슈가르드로 향했다. 이 세상은 여럿의 너른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았지만 그에겐 마치 세상의 끝처럼 여겨졌다. 세상의 끝은 몹시도 추웠고 처참했다. 얼어붙을 듯한 추위가 휘몰아치는 이곳에는 음습한 어둠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들은 한껏 뭉친 분노를 몸에 두른 채 외지에서 온 낯선 이를 쏘아보았다. 한 마디라도 말을 걸면,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가면 금방이라도 아주 오랜 세월 응어리진 감정을 마구 쏟아부을 것 같은 날선 눈빛이었다. 그것이 실제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기보다는, 무거운 마음의 짐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제가 하는 행동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그 날들은. 그는 그 이름의 무게를 무겁게 여기면서도 언젠가부터 긍지를 느끼고 잘못된 확신에 차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옳은 것이라고.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것을 지지할 것이라고.

   그쯤되니 화가 났다. 그가 조금이라도 미성숙한 사람이었다면 아마 당장에라도 이 근처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 또한 자결했으리라. 한 번도 그는 제 입으로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부른 적도 없었고, 남에게 그렇게 불러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다. 날 멋대로 영웅으로 만든 건 너희들이잖아. 그는 몇 번이고, 다시 몇 번이고 후회했다. 이제까지의 발자취를. 이번 한 번이라며,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걸어온 길은 너무도 길었다. 되돌아가기엔 출발점이 까마득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는 오래도 걸었다. 그 결말을 알면서도 옆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가는 누군가를, 길을 잃은 누군가를, 마물에게 습격당한 누군가를 그냥 두고 갈 순 없었다. 그렇게 가득 떠안은 소망은 점점 그를 반대로 짓눌러 왔다. 그는 문득 질식할 것 같은 숨막힘을 느꼈다. 그래도 어른스럽게 굴지 않으면 안되었다. 곁에 알피노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를 희망을 지필 등불로 불러준 이들이 있었다. 꺼져가는 불씨 안에 멋대로 투신하여 생명을 태워버린 이들이 있었다. 그러니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 눈보라가 치는 저 잿빛 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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