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의 환상
COMMISSION2021. 4. 4. 02:21
기묘한 일이긴 했다. 분명 유도부 활동에 방해가 되니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기숙사에 가란 말은 아니었는데. 당초에 매일 이런 식이긴 했어도 이 혁은 딱히 먼저 간 적이 없었다. 늘어지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면 또 모를까. 그러니 가방까지 다 들고 돌아갔을 때 교실이 텅 비어 있는 건 이상했다. 아니, 그 이전에 왜 아무도 야자를 안하는거냐? 1학년 A반은 전부 공부를 포기한 녀석들 뿐인거냐? 누구라도 붙잡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사람도 없이 1학년 A반은 텅 빈 상태였다. 기숙사에 먼저 간 건가? 간 거겠지. 어쩐지 실망스러워 들을 사람도 없는 말이 절로 나왔다.
"마 간다면 간다고 말을 좀 하고 가지…"
없는 놈을 찾아도 별 수 없으니 일찍 돌아가기로 했다. 옆에서 종알 대는 사람 없이 혼자 돌아가는 일은 또 오랜만이었다. 조용할 일이 없는 녀석이라 그런지 유독 혼자 걷는 복도는 조용했다. 이 고요함이 유독 어색해서 일부러 걸음을 빨리했다. 눈 둘 곳도 없었기에 괜히 멀리 창문을 보며 걸었다. 그랬기에 마주 다가오는 사람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키가 아주 작아서일지도. 1학년 복도 끝에서 부딪힌 것은 조그만 아이였다.
"윽……."
"아이고, 미안타. 괘안나?"
근데 와 아가 여기 있노. 부딪혀 바닥에 넘어진 아이는 묘하게 혁을 닮아있었다. 다른 건 다 아니라고 해도 퍼렇게 빛나는 눈만큼은 똑같았다. 동생인가? 동생이라고 해도, 아이는 혁과는 다르게 당차고 활기찼다. 입은 옷도 취향이 묘하게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촌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아이는 처음 보는 누군가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묻는 말에 밝게 대답했다.
"3번지 놀이터에 있었는데 눈을 뜨니까 이곳에 있었어요."
3번지 놀이터? 한 10년 전쯤 생긴 놀이터였다. 아직도 찾는 사람이 있다니. 일단 혁을 빼닮은 게 신경이 쓰여 혼자 두지 않기로 했다. 잠시만… 그럼 이 자식은 요만치 어린 자기 동생을 학교 아무데나 내버려두고 기숙사에 간 건가? 아니면 학교 어딘가에 가있는건가? 당초에 이 외딴 곳에 동생을 데리고 온 이유가 뭐야. 표정이 절로 구겨졌지만 어린 아이 앞에서 형을 흉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속으로 삼켰다. 아이는 낯도 가리지 않는 모양인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형아, 형아 하며 잘도 쫓아다녔다. 여긴 어디냐는 둥, 형 이름은 뭐냐는 둥. 가까워지기까지 제법 오래걸렸던 제 형과는 다르게 제법 해맑은 아이였다. 무섭다고 울거나 하는 것보단 한참 낫지. 매서운 인상이라느니 하며 아이들에겐 공포만 샀던지라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아이가 신기하기도 했다. 성격이 밝고 명랑해서 그런지 혁의 동생이라 그런지 아니면, 혁을 쏙 빼닮았기 때문인지 마음이 쓰였다.
어쨌든, 제 동생을 학교 복도에 두고 갈 만큼 글러먹은 놈은 아니(길 바라기도 했고)었기에 아이를 데리고 학교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아이가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거리기에 어깨에 얹고 다녔다. 아이는 이렇게 천장과 가까워져 본 적은 처음이라며 퍽 기뻐했다. 1층도, 2층도, 3층도 가보고 하다못해 운동장도 가봤지만 혁은 보이지 않았다. 점마 저거 진짜 동생 내버려두고 기숙사 들어가부렀나. 꾹 참고 있던 말이 결국 체육관에서 나올 때 실실 새어나왔다.
"이거 진짜 아 혼자 내팽겨치고 어데갔노…"
"형, 저건 뭐예요?"
"아, 저건… 뭐라카드나. 교목? 학교 나무 그런거다. 나무 이름까진 모르겠고."
기어코 그 위에 핀 꽃을 보겠다기에 한참 이름도 모르는 나무 아래 서있었다. 나무 위엔 봄 답게 꽃이 만발했다. 몇 주 전까지만도 가지만 있었던 것 같은데 잔뜩 핀 꽃가지가 봄을 실감하게 했다. 어쨌든 운동장에도 체육관에도 혁은 없었다. 체육관에는 양궁부니 육상부니 하는 운동부 녀석들 뿐이었고 알기로 친한 친구는 A반에 밖에 없을 녀석이 다른 교실에 갔을 리도 만무했다. 그렇다고 교무실에 그렇게까지 오래 잡혀있을 이유도 없고. 아이는 꽃 만지는 게 질렸는지 이젠 아폴로가 먹고 싶다며 문방구에 가자고 졸라댔다.
"불량식품 같은 거 먹지 마라. 몸에 안 좋다."
"돈이 100원 밖에 없는데…"
"요즘 100원 갖고 뭘 사겠나."
불량식품도 300원은 하는데. 이 외진 곳에 문방구가 있을 턱도 없고 구태여 돈 쓸 이유도 없으니 문방구 말고 카페테리아로 데려갔다. 무엇이 먹고 싶냐 묻자 찾기 힘든 과자가 좋다고 하는 바람에 어르고 달래 다른 과자를 잔뜩 사주었다. 아이스크림이며 음료수며 하는 것까지 하나씩 쥐여주자 표정은 금방 밝아졌다. 아이가 간식을 먹는 동안 몇 시간 째 답장 오는 일이 없는 휴대폰을 꺼내 다시 부재중 전화를 남겼다. 전화를 해도 도통 받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평소라면 걸자마자 받았을텐데. 아이는 한참 과자를 먹다가 형아, 하고 불러댔다. 고개를 슬 들어 아이를 바라보자 아이는 손에 든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그게 무엇이냐 물었다.
"핸드폰이잖아. 스마터폰."
아이는 눈을 깜빡이더니 말했다.
"그런 핸드폰은 없는데요? 휴대폰은 뚜껑을 열거나 미는 거 밖에 없잖아요."
뚜껑을 연다면 폴더폰이고, 민다면 슬라이드폰이리라. 어느 쪽이든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초등학생 때나 그런 핸드폰을 썼지, 요즘은 어르신들 아니고서야 쓰지 않는 구식 핸드폰인데. 혁도 스마트폰을 쓰는데 왜 동생은 모르는거지? 그래도 유치원 등원을 하거나 초등학교를 다닐 나이로 보였는데 날 때부터 스마트폰과 함께할 세대가 할 말이라곤 믿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핸드폰이 없다면 모를까.
"이게 마 어느 시대 얘기고……. 그래, 딱 내 초등학생 때 그 핸드폰이 유행…"
섬찟한 예감이 스쳤다. 어딘가 촌스러운 옷, 이미 없어진 3번지 놀이터, 어긋난 금전감각, 단종된 과자, 10년 전에나 유행했던 핸드폰.
"…너 이름이 뭐고."
딱히 부를 일이 없었기에 한 번도 묻지 않았던 뒤늦은 질문이었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듯 당연하게 떨어졌다.
이 혁 인데요?
"이게 대체 머선 일이고……."
묘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럴 순 없는 노릇이었다. 10년 전의 이 혁이 갑자기 나타나다니! 충격적이라고 거기에 그대로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내색하지도 못하고 결국 아이를 데리고 운동장만 빙빙 돌았다. 기숙사에 데려가자니 아는 얼굴을 만나 오해를 살까 겁났고 그렇다고 딱히 이렇다 할 대책도 없이 원래 살던 곳으로 데려가기도 좀 그랬다. 7살 이 혁이 여기 있다면, 17살 이 혁은 어디로 간거지? 지금이 10년 후의 세상인 걸 알게 되면 곤란했을 법도 한데 아이는 본 적 없는 스마트폰에 온통 마음을 뺏긴 듯 이런 저런 의문점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고양이 영상 밖에 없네요?"
"고네이 귀여우니까."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오늘 혁이 무슨 이상한 모습을 보였나 생각해도, 요 일주일 간 평소엔 없던 일이 있었나 생각해도 특별하게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비현실적인 일을 현실적으로 설명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납득 가능한 이유를 찾는 자신이 있었다. 입에서 절로 나오는 것은 한숨 뿐이라,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고양이 영상 뿐인 시청기록을 돌아다니는 아이를 데리고 무작정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쌀쌀한 초봄이었고 계속 거기 뒀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곤란하니까. 아무 교실에나 들어갈 수도 없어서 결국 들어온 것은 유도부실이었다. 이미 활동이 끝난지 꽤 된 유도부실은 직접 정리하고 나온 그대로 깔끔했고 빛이 들지 않는 밤에 보자 오히려 쓸쓸해보이기도 했다. 다행히 누가 있지도 않았고 편하게 있어도 좋을 듯 했다. 당초에 이 아는 이 혁 금마다, 라고 설명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테니 누가 봐도 딱히 곤란할 게 없었을지도 몰랐다. 아이는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들춰보더니 쌓인 매트 위에 올려달라며 성화를 부렸다.
"떨어지면 우야나."
"안 떨어져요!"
그게 니가 맘대로 되는 일인줄 아나. 그래도 올라가고 싶다니까 순순히 올려줬다. 왜 어린 아이들은 적당한 높이감을 좋아하는걸까. 롤러코스터처럼 한참 높은 곳은 무서워하면서 1층 침대보단 2층 침대를 좋아하고, 담장 같은데 올라가거나 길가 중간에 있는 낮은 화단에 꼭 올라가거나. 아이는 발을 동동 거리며 다시 핸드폰을 달라고 졸랐다.
"…니 진짜 바라는 게 많은 거 아나?"
"심심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스마트폰 속 세상은 아이에겐 마르지 않는 보물상자같은 모양인지 아이는 곧 입을 꼭 다물고 조그만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느새 알고리즘은 고양이 영상에서 한참 벗어나 이상한 발명 영상들이 가득 올라와 있었다. 대체 뭘 누르면 고양이에서 발명 영상으로 가는거지? 따지기 보다도 그냥 좋아하는 걸 보게 내버려두었다. 한참 이어진 정적이 깨진 건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묻지 않았으면 했던 것을 아이는 기어코 물어왔다.
"지금, 2021년이예요?"
아니라고 하면 지금이 2021년이라는 증거를 찾아와 따져댈 것이고 맞다고 하면 귀찮은 질문들이 이어지리라. 그래도 거짓말보단 어울려주는 게 나았다. 묻는 것들은 으레 그렇듯 예측 가능한 것들이었다. 성적이라든지, 꿈이라든지, 동아리라든지, 성격이나 친한 친구 같은 것들. 너튜브 취향이나 과자 취향을 묻기도 했다.
"와 이렇게 질문이 많노."
"궁금하잖아요! 근데 다 알고 계시네요?"
"니가 따라다니면서 묻지도 않은 걸 자꾸 말하니까 그렇지."
아이는 그러고도 한참을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뭘하는지 모르겠지만 한참을 집중해서 화면을 내리고 또 올리곤 했다. 마음에 드는 영상이라도 찾고 있는건가. 찾고 있는 게 있다면 대신 찾아주겠다고 했지만 아이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나, 딱 하나만 더 묻겠다면서 이쪽을 쳐다봤다. 표정은 어쩐지 굳어있어 어색했다. 뭘 물어보려고 저러지? 설마 발명 원리 같은 걸 물어본다거나. 꼬리를 무는 예측을 깨고 튀어나온 것은 제법 있을 법한 질문이었다.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 그렇게 묻는 아이는 처음으로 상대방의 눈을 피하고, 뭐가 나오고 있는지 모를 핸드폰에 시선을 콕 박고 있었다. 그 위로 17살의 혁이 겹쳐보였다. 어른하게 남는 잔상처럼, 무언가를 숨기듯. 그 별난 질문 뒤에 무언가 숨어있을 것을 알았지만 넘겨 짐작할 수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남이 숨기고 싶은 걸 알려고 억지로 파헤치고 상처를 주면서까지 알고 싶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질문에 대답해주려고 해도 혁이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건 알 턱이 없었다. 금마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나. 있었다 해도, 내 앞에선 한 번도…….
"…내가 그걸 우예 아노."
"역시 그렇겠죠?"
혁은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답하곤 생각없이 폴짝 뛰어내려 바닥으로 내려왔다. 어딘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닥에 앉은 날 보더니 일도 없이 활짝 웃었더랬다. 마치 이 다음에 무엇이 일어날지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며 느릿느릿 말을 붙였다. 사실은,
사실은 뭐. 물어볼 틈도 없이 그 순간 아이는 연기처럼 훅 흩어져 사라졌다. 마치 핀 봄꽃이 금방 져버려 바닥으로 떨어지듯 초봄의 환상처럼 흐트러져 그대로 날아갔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것은 나 뿐으로, 아이가 들고 있던 핸드폰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켜져있는 화면은 메신저 어플이었다. 혁과 어제까지 주고받은 시덥잖은 메시지들. 서로의 안부를 물은 인사, 공유한 일상, 너튜브 영상 링크, 몰래 찍은 사진, 이상한 짤방과 이모지, 웃음의 흔적들. 그리고 가장 바닥에 방금 도착한 메시지가 한 건,
저는 누군지 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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